200. 베일 너머 (2)
“피데스 님 이거 보셔,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뭡니까?”
비상 점검 기간으로 인해 폭주하는 문의들을 정리하고, 각국의 헌터들과 머리를 맞대 이 상황에 대한 비상대책회의를 주관하던 현시우.
그는 잠깐 집무실에서 홀로 다음 회의 자료를 확인하다가 급하게 달려온 보좌관의 외침을 들었다.
“그, 그게, 그게.”
“괜찮습니다. 숨 고르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현시우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마신이 와서 깽판 치고, 현하빈이 와서 깽판 치는 게 현시우의 일상. 그에 비하면 웬만한 일에도 안 놀랄 자신이 있었다. 수습할 자신도 있고.
물론 보좌관이 보기에는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평온하실 수가 있지?’
마침내 숨을 고른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지금 천천히 이야기할 게 아닙니다! 인터넷 보셨습니까?”
지잉-지잉-지이잉!
보좌관의 그 말을 끝으로 미친 듯이 울려대는 현시우의 핸드폰. 시우는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보좌관이 말을 이었다.
“지금 마이너 패치 측에서, 저희한테 공식적으로 경고문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전 세계 동시 송출, 일반인들도 볼 수 있는 채널로요!”
“그거야 예전에도 겪었던 거 아닙니까?”
마이너 패치의 에라타는 가끔 SPES를 향해 공개적으로 경고 영상 편지를 보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피데스.’, ‘다음 테러 예정지는 싱가포르 국제공항이야’ 따위의 예고장을 날리거나 도발하는 일이 대다수.
모두가 열심히 막아낸 덕에 그 도발이 실제로 성공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비상 점검 기간을 틈타 또 테러를 저지르려는 건가?’
현시우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러나 보좌관의 보고는 전혀 뜻밖이었다.
“아뇨! 평소랑 다릅니다! 이번에 에라타는 공개적으로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지목했어요!”
“……!”
그 말에 네아이바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지목했다고? 누구? 설마 진짜로 맞히지는 않았겠지?]
그와 동시에 현시우의 화면에 속보가 떴다.
-마이너 패치의 수장 ‘에라타’, ‘기만의 수호자 현하빈’을 조심하라는 입장 밝혀.
-‘기만의 수호자’는 대체 누구인가?
“…….”
[혀, 현하빈을 지목했다고? 현하빈을? 설마 다른 현하빈인 거 아냐? 꾸껠울라칸에 사는 34세 병아리감별사 현하빈 씨, 그런 동명이인일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제발 아니어라.
이미 끝난 것 같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현시우는 스크롤을 내렸다.
-현 모 양은 한국에 거주하는 울림국제고 학생으로 밝혀져…….
‘이걸 가린다고 가린 거냐?!’
성씨 현씨에 울림국제고 다니는 사람이면 누가 봐도 딱 각이 나오지! 게다가 에라타가 아예 실명을 언급한 것을 보아하니 에라타 측에서 대놓고 신상을 뿌린 모양. 현시우는 고개를 돌려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원본 영상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기만의 수호자에 대해 설명이 나오던가요? 그 사람이 누군지 어느 정도나 풀렸습니까?”
“울림국제고에 다니는 현하빈 양이라고 아예 대놓고 개인정보와 실명을 언급하던데요.”
‘허……?’
[이야, 상도덕 없네! 마이너 패치답다!]
하긴 범죄 집단이 개인정보 보호 따위 신경 쓸 리 없었다.
현시우는 재빨리 원본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 속에서 에라타는 입 아래까지만 드러낸 채 얄미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안녕! 전 세계의 인간들! 나야. 마이너 패치 수장인 에라타.
-내가 오늘은 아주 재미있는 정보를 가지고 왔어.
-다들 ‘기만의 수호자’가 뭔지 알아? 아, 하긴 모르겠구나! 너희의 위대한 우두머리, 피데스 새끼가 그런 걸 알려줄 친절한 녀석이 아니라서 말이지!
-흐응, 너무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 뒤가 구린 마법사를 믿고 따르다니, 다들 너무 멍청한 거 아닐까?
짧게 비웃음을 지으며 건들건들 손동작과 함께 어깨를 으쓱한 에라타. 그녀는 실시간 댓글 반응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최상위 랭커들이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겠지? 난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알아냈어! 그게 누구냐고? 궁금하니? 그럼 알려 줘야지!
-난 뒤가 구린 누구랑 다르게 모두에게 공평하게 정보를 공개하거든! 대가 없이 알려줄게. 기만의 수호자, 그건 한국에 살고 있는 현하빈이라는 학생이야. 컨티뉴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아가씨. 그 애 맞아!
“…….”
“지, 진짜입니까, 피데스 님?”
보좌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전에 기만의 수호자가 누군지 아신다고 말을 하셨잖습니까. 알고 있는 정보와…… 일치하시나요?”
“…….”
현시우는 대답 없이 영상을 계속 보았다. 아직 여기까지라면 수습이 가능하다. 기만의 수호자 퀘스트에 대해 모두에게 솔직히 알리고,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방향으로.
……아니.
수습이 가능한가?
[어렵지. 그건 거짓말이니까.]
현시우는 현하빈이 기만의 수호자인 걸 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밝혀질 사실. 그걸 계속 숨겨가며 거짓말을 했다간 나중으로 갈수록 더욱 수습하기 어렵다.
‘게다가 에라타가 먼저 선공을 펼친 이상…….’
범죄 조직 수장이 피데스보다 더 신뢰도 높은 정보를 먼저 뿌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몰고 올 파장이 크다.
그럼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닿기도 전에 에라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비상 점검 이거, 기만의 수호자 때문에 생긴 일일걸? 시스템이 기만의 수호자 죽이랬는데 안 죽여서.
-내가 하나 재미있는 사실 더 알려줄까? 기만의 수호자, 걔를 죽이지 않으면 이 세상은 멸망해!
-그럼 다들 건승하라고! 하하!
[와 미친.]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었다. 비상 점검도, 세계 멸망도 현하빈 때문이 아닌데 이 틈을 타서 뒤집어씌우다니.
마침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지금 다들 피데스 님에게 진상 규명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피데스 님이 알고 있는 진실이 뭔지, 정말로 현하빈 양이 기만의 수호자인지 확인해 달라고요! 지금 여론도 무척 안 좋아요!”
현하빈을 죽이지 않으면 세상은 멸망한다고 말한 에라타. 거기다 마침 진짜로 기만의 수호자를 처치하란 퀘스트까지 떨어져 있는 상황.
“벌써 음모론자들은 현하빈을 죽여야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며, 학교를 습격하고 있다 합니다!”
“현하빈…… 양의 상황은?”
“……어디 있는지조차 불명이고요.”
“불명이라고요?”
소재 파악이 전혀 안 된다니.
“확인 결과, 홀로 기숙사로 들어간 이후 사라졌다고 합니다.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없는데 방 안에 없었대요.”
“…….”
‘얘는 지금 이 상황에 어딜 간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있어서 다행이라 할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불안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현하빈이 어디 있을지 제일 잘 알 만한 사람은…….’
“솔라리스 측 반응은 어떻습니까? 컨티뉴는요?”
“아, 물론 그쪽에서도 현하빈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합니다. 의외로 솔라리스와 컨티뉴가 강경한 태도로 현하빈에게 해를 가하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는 중입니다. 특히 컨티뉴는 에라타가 재능 있는 제작계 헌터를 제거하려고 함정을 판 것일지도 모른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해요.”
“일리는 있군요.”
현하빈이 제작계 헌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지만.
“솔라리스는 부길드마스터가 부재중이라 채지세 홀로 발표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같은 입장이고…….”
“잠시만요. 부길드마스터가 부재중이라고? 채지석 헌터가요?”
“그렇습니다.”
“…….”
“엇? 그러고 보니 현하빈 헌터와 부재중인 시기가 좀 겹치는 것 같기도 한데, 설마…….”
“……알겠습니다. 우선 생각할 시간을 주시죠.”
보좌관의 추측이 이어지려는 걸 끊어내며 현시우가 깔끔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잠깐 시간을 달라는 완곡한 표현에 보좌관은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번 현시우를 돌아보았다.
“그럼 지금부로 바깥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정중하게 돌려보내겠습니다. 그래도 오래 끌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 오후에 비상대책회의가 잡혀 있으니…….”
그것마저 취소한다면 파장은 더욱 커질 터. 그러니 반드시 그전까지 입장과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만 한다. 그 뜻을 알아들은 현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마침내 네아이바와 단둘이 남겨진 현시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할 거냐?]
“…….”
다시 의자에 앉는 현시우를 보며 네아이바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지?]
네아이바는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향해 스륵 지팡이의 몸체를 기울였다. 그들 옆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넓고 광활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무실과 전 세계 곳곳의 지부를 일구기까지 헤쳐 왔던 지난날들. 피데스라는 이름의 무게.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다. SPES의 평판, 피데스의 평판. 그런 것들과 현하빈 둘을 모두 지키는 게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때로는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에 타격을 주더라도, 진실을 밝히고 제대로 된 해결책을 처음부터 쌓아 가는 것.
‘혹은 동생의 습격을 각오하고서라도 솔직해지는 것 말이죠.’
[인정. 일단 가면 벗을 생각이면 포션부터 대량으로 구비해 놓는 게 맞다.]
“…….”
현시우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관리자의 패널티와 비상 점검이라는 특수한 상황, 피데스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현하빈, 그의 동생을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까지도.
“네, 그럼 저녁 회의 전에 마지막으로 대책을 좀 세워 볼까요.”
현시우가 핸드폰을 들어 이리저리 화면을 살폈다. 혹시나 싶어 현하빈에게 카톡을 날려 봐도 답장이 없었다. 아마 지금 상황이라면 현하빈 측에서도 폰을 꺼두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국정원에서 위치 추적 같은 방식을 써서 하빈을 찾고 있을지 모르니까.
그 외에 연락해야 할 곳은…….
현시우는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던 금빛 명함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가 가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솔라리스의 이준휘 비서입니다. 지금 솔라리스 길드장 채지세 님께서는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현시우가 건 번호는 솔라리스의 채지세를 향한 직통 번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상황이 워낙 심각하다 보니 쏟아지는 연락이 많아 중간 단계에서 한 번 걸러지는 모양이다.
그래도 설마 현시우의 연락을 안 받을 리는 없을 텐데. 무려 SPES의 수장 피데스의 전화다. 현시우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알렸다.
“접니다 피데스. 이번 에라타의 영상 선전포고 관련으로 회의 전에 말씀드릴 일이 있어서.”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곤란하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비록 지금 전화 주신 분이 피데스 님이신 건 알지만 지금 길드장님께서도 역시 방금 있었던 사건 때문에 바쁘셔서요. 어차피 회의 시간까지 좀 남았으니 잠시 뒤에 연락 주시는 게 어떠실까요? 아끼던 지인의 일이라 직접 나서야 한다고 하더군요.
피데스가 대단한 인사는 맞았지만 어디까지나 솔라리스와의 협력 관계. 피데스는 채지세의 상사가 아니다. 오히려 투자 관련해서는 서로 경쟁할 때도 있었고.
채지세에게는 아무리 거물인 피데스라 해도 현하빈의 일을 처리하는 게 우선순위인 모양. 납득한 현시우는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떨까요? ‘데네브는 황도를 지나지 않는다.’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잠깐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준휘 비서님! 그 전화 지금 당장 바로 연결해 주세요.
채지세의 목소리였다. 다급하게 전화를 넘겨주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침내 이준휘에게서 전화를 전달받은 지세가 물었다.
-……당신이 그 문장을 어떻게 알죠?
수화기 너머로도 동요가 느껴질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건, 내가 현하빈의 오빠, 그러니까…….
현시우에게만 알려 준 문장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