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베일 너머 (1)
그 시각.
홍콩의 어느 구석진 호텔에서 ‘세 번째 사도’는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세 번째. 아직이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에라타의 물음에 세 번째가 인상을 찡그렸다.
“재촉하지 마. 집중력 깨지니까.”
-집중력? 집중력이 필요할 문제야? 네가 봐도 모르겠다고?
“……그래. 이번 종말교에 침입한 놈들, 신원이 도저히 파악이 안 돼. 녹화 장치에 입력된 영상도 이상하고.”
그랬다. 지금 ‘세 번째’는 현하빈이 털어버린 종말교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영상 자료를 뒤져보고 있었다.
마이너 패치 측에서는 종말교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CCTV 정도는 곳곳에 설치해 둔 상태였다.
덕분에 하빈이 헼께록을 갈구는 장면이나, 교주가 세 명 나타나서 깽판 치는 모습까지 다 찍혔다.
‘하지만 찍혀 봤자 뭐 하냐고.’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교주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들이 나타나 교주를 엿 먹였다는 것뿐인데!
-하다못해 DNA라도 검출된 거 없어?
“없어.”
-그럼 사용하는 스킬이나 무기는?
“그런 것도 없어.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장면이 있긴 한데, 외관만 봐서는 시중에 파는 흔한 야구 배트야. 특정 지을 수조차 없어.”
-야구 배트?
무슨 그런 걸 무기로 쓴단 말인가?
“위장용이었겠지.”
-하긴, 무려 ‘기만의 수호자’가 주 무기를 야구 배트로 쓸 리가 없지.
헼께록을 한 방에 보내 버린 걸로 보아서는 평범한 야구 배트는 아닐 것이다.
“모습을 위장한 것처럼 무기 역시 위장했을 가능성이 있어.”
-그럼 전부 위장된 것뿐이잖아?
“그래서 찾기 힘들다는 거야.”
세 번째는 차갑다 못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하곤 핏발 선 눈으로 화면을 훑었다. 에라타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나도 영상 자료를 돌려봤지만 그 녀석, 진짜 특이하지 않아? 헼께록 말로는 다짜고짜 천만 달러를 내놓으라며 좀도둑처럼 굴었다던데. 심지어는 지하실 자료에도 관심 없는 듯 돈만 요구했다더라.
‘천만 딸라!’를 외치며 헼께록을 압박했던 현하빈. 그 내막을 들은 에라타로서는 상당히 갸우뚱할 일이었다.
-이야기만 듣고 보면 딱히 마이너 패치를 노린 것 같지는 않은데, 막상 지하실 장부는 다 털어 갔단 말이지?
“그것뿐만이 아니야. 헼께록의 말에 의하면 그 녀석, 처음부터 여기가 마이너 패치와 관련된 곳인 걸 다 알고 있었어. 거기다 시스템을 교란하는 방법까지 다 알고 있었고.”
여러모로 쉽지 않은 상대다. 상대의 의중을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 거기다 교주가 두 명이나 나타난 것도 미심쩍어. 다른 쪽 교주는 무려 ‘선동’ 스킬을 따라 썼다던데.
“허?”
그 희귀한 선동 스킬을 곧바로 따라 썼다고?
“그거면 그쪽이 기만의 수호자인 거 아냐? 대체 어느 쪽이 진짜지? 설마 기만의 수호자가 두 명일 리는 없는데.”
-그러니 내가 그걸 알아보라고 하잖아. 관리자님도 사라진 마당에 우리가 찾아낼 단서는 이것뿐이야.
“…….”
비상 점검의 원인조차 밝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마이너 패치다. 그들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실마리는 종말교를 습격하던 ‘기만의 수호자’에 대한 정보뿐.
그거라도 제대로 파헤쳐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진전이 없을 수가.’
주변 불법체류자나 밀입국자를 조사해 보아도 아무런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꾸껠울라칸에 살고 있었거나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라고 해도 믿을 상황.
“기만의 수호자는 순간이동 능력이 있나?”
웬만한 순간이동 기술로서도 나라 간 이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거기다 선동 능력도 곧바로 쓰고, 상대의 기술을 똑같이 카피할 수도 있는 데다, 아이템 효과도 모두 무시하고.”
교주만 사용할 수 있는 불을 간단하게 사용해 버리질 않나, 엄중한 방호 장치로 막아 놓은 비밀 지하실까지 계란 껍질 깨듯 와자작 뚫어버렸다.
‘……이런 존재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분석하면 할수록 더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세 번째는 피곤한 표정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기만의 수호자’에 대해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이쪽은 기만의 수호자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저쪽은 이미 DNA 하나조차 남기지 않은 치밀한 완전범죄를 저지르고. 마이너 패치를 하나씩 무너뜨려 가는 모양새다. 에라타 역시 말을 받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은 진짜 괴물일지도.
에라타가 인상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녀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엔 천재가 세 종류가 있는데…….
수화기 너머의 에라타가 휙, 하고 다트를 던지는 소리가 났다. 심심할 때마다 다트를 던지는 에라타. 이번에 그녀의 다트가 향한 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는 피데스의 사진이었다.
-첫 번째는 범생이형 천재. 지긋지긋한 피데스 같은 녀석이 대표적이지. 가장 정석적인 유형인데, 까다롭지만 예측은 쉬워. 나름의 원칙이 있거든.
피데스는 선을 잘 지키고 정의를 잘 지킨다. 그러니 사건이 터질 때의 행보도 어지간해서는 예측이 된다.
사람들을 잘 이끌고, 잘 구해내겠지,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지 따위의 예측. 에라타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천재는 야망형 천재. 이쪽도 예측은 쉬워. 자신만의 목표를 쫓아가니까. 대표적으로 헌터 재벌 채지세. 돈의 흐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찾는 인물이지. 사람들을 돕는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목표도 확실하고.
“그럼 세 번째는 뭔데?”
-세 번째는…….
에라타가 빠득, 이를 갈며 덧붙였다.
-또라이형 천재.
“…….”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에라타는 CCTV 너머로 야구 배트를 짜잔 휘두르는 현하빈의 모습을 보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시X. 도무지 예측도 안 되고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는 놈. 그런 녀석이 제일 복병이야. 제발 ‘기만의 수호자’가 그런 녀석이 아니어야 할 텐데.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 것 같은지! 에라타는 하, 하고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것을 내뱉었다.
이후로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세 번째의 타닥거리는 자판 소리가 그 공백을 채웠다. 에라타와 ‘세 번째’ 모두 종말교 주변의 모든 CCTV 자료를 해킹해서 단서를 찾아보고 있었다. 뭐라도 제대로 된 단서가 어디 없나. 제발 뭐라도 하나 걸려라.
그렇게 몇 시간 뒤.
“……어?”
세 번째는 마침내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종말교가 털리기 직전, 공교롭게도 종말교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골목길 어딘가에.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진 인물 두 명.
그것도 그냥 나타났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허공에서 슈슉 나타난 뒤 재빨리 카메라가 존재하지 않는 뒷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
치안이 좋지 않은 꾸껠울라칸이었기 때문에 CCTV가 아닌 차량 블랙박스 영상에만 겨우 담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두 명의 모습은.
“……이 여자, 보스가 찾던 ‘현하빈’ 아니야?”
-뭐?
드디어 찾은 단서는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 * *
“리베, 떡볶이 먹어도 되겠어?”
-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리베. 불을 뿜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무엇인들 못 하리!
얼른 줘보라는 듯 입을 와앙와앙 다물었다 벌렸다 하는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하빈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 먹자? 속이 쓰릴 수도 있으니까.”
[원래 용의 위장은 튼튼해서 아마 괜찮을 것 같…….]
“쓰읍! 우리 리베는 아기라구!”
[…….]
물론 혹시라도 떡볶이가 원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기에-그러면 막상 실전에서 불을 못 뿜을 수 있으니-연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행히 리베는 떡볶이 떡을 한입 먹자마자 바로 불을 뿜는 데 성공했다.
-삐아아아아……!
정말로 매운지 확, 화악, 하며 뿜는 불꽃!
작은 불이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채지석이 감탄하며 덧붙였다.
“이거, 꿰뚫는 눈 스킬로 보니까 말 그대로 ‘용의 숨결’, ‘용의 불꽃’ 같은 메시지 떠. 아이템 제작 시 굉장히 귀한 등급의 제작 재료나 제작 스킬로 쓸 수 있대.”
“호오…….”
그러고 보니 이쪽 왕도 ‘성스러운 용의 불꽃’을 보여달라고 했었지.
비록 설명에 ‘성스러운’이 붙지는 않았지만, 같은 ‘용의 불꽃’이니 뭐라도 되지 않을까?
아니면 어차피 ‘성스러운’이란 수식은 이곳이 용신교를 믿는 곳이라 앞에 붙인 미사여구일 뿐, 그냥 용의 불꽃이 그걸로 통하는 것일지도.
“일단 보여주면 알아서 하겠지.”
이게 아니라고 하면 그냥 나라를 엎거나 도망가면 되니 괜찮을 듯.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냐?!]
수틀리면 나라 엎기?
일단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안 되면 저쪽이 손해인 거지, 뭐.”
“저쪽이 손해라고?”
“응. 어제 내가 일부러 세게 나가면서 어떤 반응인지 지켜보자고 했었잖아? 그런데 결과적으로 국왕이 한달음에 달려왔지.”
용과의 기 싸움 없이 ‘우린 알현하러 안 가니까 그쪽이 와야 합니다’라는 말에 당장 달려온 호그누 국왕.
“그럼 우리한테 우호적이거나, 우리가 필요한 이유가 있겠지?”
용으로서의 상징이든 뭐든 그들이 하빈 일행에게 바라는 게 있는 모양.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잘 협상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현하빈은 불꽃을 보이기 위해 떡볶이를 챙겼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되자, 다짜고짜 국왕 호그누를 찾아가 바로 말했다.
“용께서 특별히 불꽃을 보이시겠답니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물론 신하들과, 심지어는 왕까지도 리베를 주목했다.
“그, 그게 정말이오?”
“네. 갑자기 아침이 되니 생각이 바뀌셨다고, 너무 오래 기다리면 안 될 것 같다 하시더라고요. 지금 이 나라에 커다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요.”
“……!”
왕의 얼굴에 찰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하는 표정이 스쳤다. 하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우리가 필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네.’
대충 ‘커다란 일’ 하고 찔러보면 효과적인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원래 사주나 성격 테스트 같은 거 보면 그러지 않는가?
일단 상담 온 사람을 향해 ‘지금 큰일이 생겼지?’라고 묻는다.
진짜 큰일이 생길 상황이면 ‘헉 어떻게 알았지?’ 하고 놀랄 것이고, 큰일이 없어서 ‘엥, 없는데요.’라고 대답할 경우 ‘그렇다면 곧 생길 걸세.’ 같은 식으로 또 두루뭉술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
하빈이 쓰려던 방법이 바로 그거였다.
[? 이쯤 되면 그냥 돗자리를 깔고 사이비 종교를 만드는 것이 낫지 않느냐?]
‘으음, 역시 그쪽이 돈을 많이 벌겠지? 헼께록도 돈이 참 많아 보였어. 하지만 그건 사기죄인걸?’
사기죄로 돈 버는 건 안 될 일이지!
준법정신이 투철한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의 눈빛을 살폈다.
‘얼른 불을 보여달라는 듯 안달 난 눈빛들을 하고 있군.’
하지만, 어차피 리베가 불 뿜는 게 확실해진 이상 여유로운 쪽은 이쪽이고, 갑도 이쪽이다. 하빈은 원하는 정보를 먼저 얻기로 했다. 그녀가 뜸을 들이듯 입을 열었다.
“다만. 그전에 저희도 확인할 게 있는데…….”
“어, 어떤 걸 확인해야 합니까?”
“혹시 ‘별의 서’라는 아이템을 아시나요? 요래요래 정도 크기에 종이 재질은 살짝 투명하면서 반질거리고, 거기 적힌 문자는 요-런 식으로 생겼는데.”
하빈이 대충 슥슥 정리해 둔 종이를 꺼내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갖고 있는 별의 서 조각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었지만 믿을 수 있을 때까지는 조심하는 게 좋으니까.
“헉? 이, 이건 신비의 서?!”
하빈이 보여준 그림을 본 대신의 눈이 커졌다.
“역시 용신님께서는 이것까지 알고 오신 겁니까?”
‘? 모르는데.’
뭔데. 너희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자. 하빈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었다.
대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대륙회담 주제가 바로 각 대륙에 흩어진 신비의 서와, 곧 있을 마계의 침략에 방비하자는 내용입니다.”
“아하, 역시 그렇군…… 음?”
다 알고 있었다는 척 고개를 끄덕이려던 하빈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마, 마계 침략?’
설마 그거, 이프시네가 아이스크림 먹으려고 97층 오는 거, 그거 말하는 거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