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98) (198/268)

198. 글모 씨(직업: 마신/나이 불명), 생후 6개월도 안 된 아기용한테 욥떡 먹인 죄로 체포되어…….

리베가 매운 걸 먹을 수 있나, 없나. 궁금해서 몰래 떡볶이를 먹여 봤던 글리치. 그 행각이 밝혀지자 하빈은 얄짤없이 글리치를 다그쳤다.

“내가 뭐랬어! 리베 아기라고 매운 거 먹이지 말랬잖아!”

-큼, 그건…… 그 녀석이 먼저 궁금해했다.

“궁금해한다고 다 먹이냐? 궁금해하면 독도 먹이겠어, 아주? 어쨌든 선배 내 말 귓등으로 들었다고 지금 실토하는 거지? 어?”

-…….

사실 조금 귓등으로 듣긴 했다. 그리고 매운 걸 먹인 것에 대한 억하심정과 실험 정신도 있었고.

글리치는 조금 찔렸지만 반박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불 뿜는 법을 배웠지 않나? 그러니 결과적으로 잘 된 것 아닌가?

“하, 이래서 성과주의와 능력주의가 잘못된 거야. 결과만 중시하는 잘못된 한국 사회!”

“……그게 어떻게 거기까지 가는 건데?”

게다가 마신은 한국인(?)도 아니다. 채지석의 지적에 하빈이 홱 고개를 돌렸다.

“하, 채씨? 채씨도 지금 꼰대 선배의 편을 든다는 거야? 실망이야!”

[이, 일단 진정해라!]

-삐이, 삐이이!

리베가 하빈의 옷깃을 입으로 와앙 물어 말렸다. 어찌 되었든 마신의 고백 덕에 불 뿜는 비법을 알 수 있었으니 나쁠 건 없었다. 글리치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발견인지 아나? 원래 용은 누가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불을 제대로 뿜기 어렵다. 아마 욥떡인가 뭔가가 아니었으면 성체가 될 때까지 홀로 터득해야만 했을 거다.

-삐이이.

-용들에게 이 정보만 팔아도 한 몫 챙길 수 있을, 귀한 정보인데…….

아마 용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불 뿜는 법을 깨우치기가 꽤 힘든 모양. 얼떨결에 발견했지만, 상당히 고급 정보이긴 했던 것이다.

-삐이, 삐이.

리베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모습에 하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흠흠, 우리 착한 리베가 괜찮다고 하니까 이번은 넘어간다. 선배, 그거 말고는 사고 친 거 없지?”

-…….

순간 글리치는 현시우를 공격했던-현시우가 안 막았으면 현시우도 죽고 하빈의 집도 무너질 뻔했던-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도 가면마법사가 알아서 잘 막았기에, 아무 일도 안 생겼으니…….

그럼 된 거 아닌가?

글리치는 시침을 뚝 떼고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없다.

“그렇다면 뭐, 됐어.”

-…….

이어지는 짧은 정적. 마침 그 부분을 노리고 옆에 있던 이프시네가 글리치를 밀쳤다.

-마신니이임! 보고 싶었어요! 진짜 마신님 맞아요?

“아, 맞아. 이프시네!”

하빈은 화면 가장자리에 있던 크릭샤와 이프시네를 돌아보았다.

‘얘네 둘은 어쩌다 꼰대 선배랑 같이 있는 거지?’

게다가 여전히 하빈을 ‘마신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글리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들이 대체 어떤 관계로 다 함께 모였나, 궁금해하던 와중. 마침 이프시네가 입을 열었다.

-마신님, 그런데 진짜 마신님 맞으시죠? 저희는 지금 이 녀석을 의심하고 있거든요!

‘이 녀석’이라고 할 때 이프시네가 글리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녀석이 글쎄, 본인이 마신님을 잘 안다고, 본인이 마신님 편이니까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흐음?”

와다다 쏟아지는 말을 들은 하빈이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글리치가 너희한테 다짜고짜 가서, 나랑 잘 안다고, 같은 편 해 달라고 주장했다고?”

-네!

둘 사이에 끼어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던 글리치.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래, 그러니 빨리 내 신분을 보증해 줘라. 이 녀석들이 날 안 믿어.

-마신님! 정말로 이 녀석이 마신의 심복인 게 맞나요?

-……내가 어쩌다 이런 걸 증명하고 있어야 하지?

그랬다.

진짜 마신이었던 글리치. 그러나 그는 마신임을 드러내기는커녕 하빈의 쫄따구가 맞는지부터 증명해야 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 * *

사실, 처음 마계에 도착한 글리치는 다짜고짜 마왕성을 찾아갔었다.

저번 시종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워낙 악역처럼 보였던지라, 이번엔 모습을 좀 바꾸어 나타났다.

“이번에 마왕들이 싹 바뀌었다지? 여기 마왕들 다 나오라고 해.”

“네, 네넷?‘

다짜고짜 마왕성에 찾아가 마왕들 튀어오라고 하는 건 현하빈과 닮은 구석이 있었을지도.

물론 글리치가 시작부터 본인이 진짜 마신이라 밝혔다면 일은 더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글리치는 본인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후배님한테 넘겨준 건데, 굳이 왜?’

애초에 마왕성에서 첫 등장했을 때도 시종 역할로 잠입하여 정체를 숨겼던 글리치. 어차피 하빈에게 2대 마신 자리 넘겨줄 계획이나 세웠던 그로서는 지금 하빈이 마신으로 공인된 사실이 꽤 재미있었다.

게다가 글리치는 마신 지위 따위 없어도 원래 능력이 뛰어나지 않은가?

마족들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원리를 지키는 자들이니까, 혹시라도 수틀리면 글리치의 힘을 보이면 다들 알아서 극진히 모셔줄 거고,

혹은, 현하빈이 보냈다고 설명하면 되겠다 생각했는데.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당신이 뭔데 우리를 오라 가라 하는 건데요! 저, 이프시네를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건 하빈 님, 아아니, 마신님밖에 없거든요!”

이프시네가 글리치를 의심하며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그러니까 나도 후배님, 아니, 현하빈…… 아니, 이번 대 마신이랑 친한데.”

“허? 친하다고요? 증거 있어요? 감히 우리 마신님을 후배라고 막 부르다니! 가만 안 둘 거예요!”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힘으로 누르면 좀 말을 들을까 싶어서 마력을 방출하거나 위협을 주는 방법도 써봤지만, 이프시네는 눈 하나 까닥 안 했다.

“이이익! 당신 뭐예요? 진짜로 우리 마신님이랑 친하면 증거 대라니까요!”

“증거를 대라고 해봤자…….”

그동안 힘으로 웬만한 일을 다 해결해 왔던 글리치에게 이프시네의 반응은 참 고역이었다.

이 정도의 충성심이면 글리치가 진짜 마신이라 밝혀도 안 믿어줄 것 같다!

그렇다고 힘으로 꺾고 강제로 마계 탈환하기엔, 저 마왕이랑 현하빈이 꽤 친해 보였다. 그럼 현하빈이 가만 안 둘 것 같고.

워낙 완강한 이프시네의 반응에 별수 없이 ‘증거’를 생각해 낸 글리치.

그게 바로 ‘영상통화’였다.

“앗, 그건 하빈 님이 쓰시던 아티팩트!”

다행히 평소 하빈의 생활을 꽤 보아온 이프시네와 크릭샤는 핸드폰이 뭔지 알아보았다.

“그걸 왜 그쪽이 들고 있어요?”

“선물로 받았다.”

물론 하빈이 아닌 채지석한테지만.

생략된 말 때문에 이프시네가 서운한 얼굴을 했다.

“부럽네요. 저도 갖고 싶은데! 그럼 마신님과 연락하고 싶을 때마다 할 수 있겠죠? 너무 부러워요!”

“…….”

둘이서 지지고 볶든 말든 구석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크릭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부럽긴 개뿔. 저걸 가져서 뭐 하려고?’

핸드폰.

언뜻 보아하니 통신용 아티팩트인 것 같은데 그럼 평소에도 하빈의 연락을 받게 된단 거 아닌가?

‘끔찍하군.’

원래 상사의 연락은 적게 받을수록 좋은 일.

제발 하빈과 자주 마주치지 말자고 비는 크릭샤 입장으로서는 하등 쓸모없는 아티팩트였다.

“어쨌든, 네놈이 못 믿으니 직접 현하빈에게 전화를 걸어 증명하도록 하지.”

글리치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그들은 하빈에게 영상통화를 걸게 된 것이었다.

* * *

-마신님! 그래도 이 녀석이 가짜 아티팩트로 저희를 속일 수도 있으니까, 진짜 마신님인지 확인하려고 질문을 준비했는데요!

화면에 나타난 이프시네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저번에 소풍 가서 먹은 음식이 뭐였죠?

척하면 척이었다.

“레몬치킨! 내가 먹는 거 하난 잘 기억해!”

-맞아요! 그럼 이공간에서 사는 사람의 이름은요?

“이공간? 거기 사는 애? 황레몬 말하는 거야?”

-맞아요! 진짜 마신님이 맞으시군요!

이프시네가 신이 나 외쳤다. 화면 너머로도 반짝반짝 빛나는 이프시네의 눈빛이 느껴졌다. 곁에 있던 글리치가 끼어들었다.

-이제 확인 다 끝났지? 내 말이 맞잖아.

-흥! 아직 그걸로는 모르죠. 하빈 님이랑 아는 사이였다는 건 인정해 줘도, 같은 편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하, 그래. 그것도 물어봐라. 어디 한번 다 물어보던가.

-하빈 님! 이 녀석이 하빈 님의 심복이 맞나요? 자꾸 하빈 님을 후배니 뭐니 하고 건방지게 불러요!

-…….

“…….”

‘사실 저쪽이 진짜 마신 맞는데.’

하빈은 슬쩍 글리치의 표정을 살폈다.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게, 억울하고 분하지만 하빈의 입장을 봐서 꽤나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좀 좋게 소개해 주는 게 낫겠지?’

생각을 마친 하빈이 입을 열었다.

“이프시네, 괜찮아. 저 꼰대는 우리 편 맞으니까.”

-정말요?!

“그래. 그리고 나이도 굉장히 많아. 노인 공경해 줘야 해. 너무 막 대하진 말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알겠어요.

이프시네가 한발 물러선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글리치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번만은 넘어가 드리죠, 리치 씨.

“리치?”

-이분 이름이 리치라던데요? 리치 아니에요?

아무래도 글리치는 마계에서 ‘리치’란 이름을 쓰게 된 모양. 글리치를 힐끔대니 그는 대충 넘어가 달라는 듯 황급히 눈짓하고 있었다.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름 뭘 쓰든 자기 맘이지, 뭐.’

어딘가 과일이나 부자 같은 이름이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부분이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하빈은 본격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다들, 97층에 온다니 뭐니 하는 건 무슨 소리야?”

-마신님 지금 97층에 계신다면서요! 리치 씨가 그렇게 말했는데요?

“음, 내가 97층에 있긴 하지. 그런데 왜?”

-사실 저희도 마침 97층에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저희 요즘 각 층마다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데…… 마침 여기 리치 씨가 97층 정도는 데려다줄 수 있다고 해서요.

“그래? 하긴 꼰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근데 여기 와서 뭐 하게…… 아!”

가만히 이프시네의 말을 듣던 하빈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뼉을 딱 쳤다.

“맞네! 그러고 보니 이프시네한테 내가 아이스크림을 안 먹였네!”

-아이스크림이요?

생소한 음식 이름에 이프시네가 고개를 갸웃했다. 곁에 있던 크릭샤가 끼어들었다.

-맞아. 그거 좀 맛있긴 하더라.

밀려나 있던 마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꽤 먹을 만했지.

둘의 이야기를 들은 이프시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예요?! 둘 다 저 빼고 먹어본 거예요? 마신님이 주셨어요?

저만 빼고?!

살짝 충격을 받은 이프시네. 작은 화면으로도 커다란 눈에 살짝 눈물이 고일락말락 하는 게 보였다. 하빈이 급하게 덧붙였다.

“잠깐, 이프시네! 그래서 내가 너 주려고 여기 인벤토리에 종류별로 담아 뒀어!”

하빈이 쏘옥 인벤토리에 있던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초코, 딸기 아이스크림, 솔빙 메뉴를 종류별로 꺼내 보여주었다. 그녀가 덧붙였다.

“이참에 97층 놀러 오면 연락해. 이거 줄게.”

-넷! 지금 당장 달려가겠습니다!

재깍 대답하는 이프시네. 그 말에 곁에 있던 채지석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 잠깐만. 지금 마왕들이 97층으로 넘어온다는 건 꽤 큰일 아니야?”

50층의 지배자. 마계를 대표하는 두 마왕과 평범한 마족으로 위장한 마신 글리치까지 총출동해서 97층으로 온다.

그건 킬스크린 내부에서도 파장을 불러올 만한 사건.

지석의 지적을 귀담아들었는지,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지만 빨리 아이스크림을 안 주면 이프시네가 많이 속상할 텐데?”

“그게 문제라고. 이 큰일을 아이스크림으로 결정해도 되는 거야?!”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아이스크림 줄 테니 오라고 하는 현하빈이나, 아이스크림 먹겠다고 달려오는 마왕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이마를 짚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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