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97) (197/268)

197. Role playing game (3)

나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치는 리베! 그 모습을 보고 하빈은 척하면 척 알아들었다.

‘헉? 설마 우리 리베, 불도 뿜을 수 있었어?’

-삐이!

하빈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끄덕한 리베가 이것 보라는 듯 화악 하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삐, 삐아, 삐아아, 삐이!

이리저리 입을 벌리며 소리를 내질러도 보고…….

-화, 화아, 카아, 퉤퉤퉤!

열심히 입김을 내뿜어도 보았지만.

“……?”

‘요, 용신님께서 뭘 하시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입김을 내뿜는 리베의 입에서는 불씨는커녕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삐?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리베. 이어지는 싸늘한 정적.

“…….”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우리가 설레발을 쳤을 뿐, 리베는 그냥 속이 안 좋아서 트림을 한 것일 수도 있다며 끼어듭니다!]

‘이, 일단 수습하자.’

가만히 있다간 누군가가 의문을 가질 것이고, 그러면 휘둘린다. 하빈은 누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험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다들! 이게 무슨 짓입니까아!”

“……!”

“용신님을 뵙자마자 다짜고짜 축복부터 요구하다니, 정말 너무하군요!”

하빈의 외침에 방 안의 사람들이 주춤했다. 마침 옆에 있던 채지석도 늦지 않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크흠, 용신님에 대한 왕실의 대우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

“그쵸. 거기다! 어? 오자마자 알현하러 오라 가라, 축복을 달라! 무리한 요구를 하니 용신께서도 저렇게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부, 분노?’

‘방금 했던 동작은 분노의 표현이었던 건가?’

덕분에 불을 뿜어 보려고 이리저리 시도했던 리베의 어설픈 도전기는 ‘용신의 분노’로 둔갑되었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용’이라는 종족에 대해 직접 본 이는 없었다. 게다가 리베가 연속해서 입김을 크아앙 내뿜던 모습은 언뜻 보아 분노의 표현 같아 보이기도 했기에 하빈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었다.

상황을 눈치챈 리베도 뒤늦게 무시무시한 얼굴을 했다.

-삐아아!

‘나이스, 리베!’

크아앙, 투명드래곤 버전으로 울부짖는 리베를 보며 하빈이 신이 나 외쳤다.

“이거! 이거 보십시오! 용신님께서 화가 나지 않으셨습니까?”

“역시 왕궁보다 신전을 먼저 방문하는 게 나았을지도…….”

조용히 덧붙이는 지석의 말에 하빈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하, 그렇네요! 역시 왕실보다 신전이 대우가 더 좋았겠어! 저희 이러다 신전 갑니다? 어? 지금 간다? 가요, 신전?”

“자, 잠시만요!”

“그쪽은 창문인데…….”

금방이라도 나가려는 듯 성큼성큼 창문을 향하는 하빈의 동작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했다.

‘핫,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창문을 향했네.’

언제나 학교 창밖으로 뛰어내려 땡땡이를 치던 하빈.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빈이 왕을 향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흠! 아무리 용신님의 가호가 급하다 해도, 우선 여독을 풀 시간은 주고 요구해야 할 게 아닙니까? 이게 무슨 경우인지요?”

“크흠…….”

그 말에 국왕 호그누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찰나 스쳤다.

‘역시 바로 확인하긴 어렵겠군.’

호그누는 리베를 처음 봤을 때부터 뭐가 다르다는 건 느꼈다. 가짜 날개와 가짜 안료로는 절대 흉내 낼 수 없을 자연스러움, 리얼리티!

그야 리베는 진짜 용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이 비주얼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파급력은 컸다.

아무리 봐도 진짜 용처럼 생겼다! 단지 하빈의 강짜를 부리는 태도가 미심쩍게 느껴졌을 뿐.

‘이들이 정말 전설 속의 인물들이 맞단 말인가? 솔직히 전설 속에서 전해지는 신비하고 고아한 이미지보단…….’

실속을 너무 잘 챙기는데.

호그누는 고개를 돌려 하빈을 쳐다보았다. 하빈은 단호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우리 용신님께서도 쉬셔야 하니까, 용신께서 특히 잘 드시는 닭가슴살과 미디엄으로 구운 송아지 요리를 대령하도록 해요!”

“네, 네엡.”

“제일 맛있는 걸로, 알죠?”

“……네.”

그 모습을 보며 호그누는 생각했다.

‘어떤 이인지 오히려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국왕을 보고 오라 가라 한다거나, 익숙하게 이리저리 지시하는 태도.

얼핏 보면 그동안의 사기꾼이나 양아치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는군.’

허세만 가득하다거나, 휘황찬란한 말로 포장을 하는 것과 딴판이다.

‘그리고 아무리 대단한 척을 하려 해도 일국의 왕을 보면 주춤할 수밖에 없을 텐데. 전혀 그러지도 않아.’

그동안의 사기꾼들은 허세를 가득 부려댔지만 눈빛에서 어쩔 수 없는 주눅과 긴장이 느껴졌다. 처음 보는 화려한 왕실과 높은 권력자인 국왕의 앞에서 긴장한 티가 나기 마련인데 이쪽은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태도에는 자신감과 여유마저 느껴진다.

물론 마신 앞에서도 눈 하나 까딱 안 한 하빈이었기에 ‘국왕이든 말든 알 게 뭐람.’ 하는 태도가 가능했던 거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생경했다.

‘게다가, 수틀리면 곧바로 신전에 가겠다고 협박을 하다니. 설마 신전과 왕실을 재고 있나?’

막 내뱉는 것 같아 보여도 하나하나 호그누에게는 민감하게 느껴질 발언. 게다가 왕을 먼저 오라 가라 하는 것과 방 안의 기세를 휘어잡는 능력까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호그누는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이번에는.’

진짜 용신이 나타났을지도 모르겠군.

……혹은 그에 준하는 대단한 작자들이거나.

그래서 호그누는 일단 하빈의 말대로 그 자리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용신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 * *

“에휴, 드디어 다들 갔네.”

사람들을 돌려보낸 하빈이 테이블 위의 요리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마침 테이블 위에는 하빈이 주문한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리베를 위해 준비된 닭가슴살과 스테이크, 그리고 하빈과 지석을 위해 준비된 왕실의 다양한 요리들.

하빈은 소파에 편안히 기대어 리베를 토닥였다.

-삐이!

“리베, 불 뿜으려고 했던 거야?”

-삐! 삐!

리베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지석이 물었다.

“불 뿜어본 적 있었어?”

그 말에 리베가 억울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였다.

-삐악! 삐아아악!

“……진짜 뿜은 적 있는 모양인데.”

“흐음.”

그럼 왜 그때는 못 뿜었던 거지? 하빈이 다시 한번 리베에게 물었다.

“긴장해서 그런 거야?”

-삐이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리베. 답답하다는 듯 이리저리 음식을 가리켰다.

-삐! 삐이, 삐아! 삐악!

“왜 음식을 가리키지?”

고개를 갸웃하는 지석과 하빈을 두고 리베는 팔짝팔짝 뛰어 음식들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한창 이곳의 음식들을 살피던 리베.

-삐! 삐이!

입에서 불을 뿜게 하던 화끈한 맛! 그걸 찾아야 했다.

-삐이이…….

……하지만 리베는 얼마 안 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는 ‘매운맛’ 음식이 없었다. 결심한 표정으로 다시 하빈을 바라보는 리베.

-삐, 삐아아아.

그리고 리베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듯 하빈을 향해 이리저리 날갯짓을 했다.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우리 리베가 뭘 말하고 싶은 걸까?”

-삐아! 삐! 삐악!

날갯짓으로 떡볶이를 표현하는 데 실패한 리베는 총총 접시 사이로 뛰어갔다. 빨간색 토마토 스튜를 가리키며 파닥파닥 더 격렬하게 날갯짓을 하는 리베.

“스튜? 그거 더 먹으려고?”

-삐아!!!!!

아니라며 도리도리 고개를 내젓고, 가슴을 통통통! 두드리는 리베.

‘뭔가 방법이 있긴 한 모양인데.’

하빈은 일단 말을 던졌다. 리베가 아까부터 음식들을 뒤지는 걸로 보아.

“불 뿜는 거, 혹시 음식이랑 관계있어?”

-삐!

오, 맞나 본데?

“혹시 배가 고파서 못 뿜은 거야?”

도리도리.

“그럼 특정한 뭔가를 먹어야 하나?”

-삐!

끄덕끄덕!

“으음…… 그럼 뭘 먹여야 하는 거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조용히 손을 듭니다!]

“오? 반짝이, 좋은 생각 있어?”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불의 연료는 기름과 나무라며, 리베에게 기름을 잔뜩 먹일 것을 제안합니다!]

“기름을 먹이라고?”

-삐아악!

크르릉.

그 말에 화가 났는지 하악질을 하는 리베. 그 모습을 보며 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닌가 본데?”

“뭐야, 그럼 뭘 먹여야 하는 거야?”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들 사이로 하빈의 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잉- 지잉-

“……엥?”

오랜만에 느껴지는 진동에 하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보통 카톡이 오면 카톡 소리가 나게 설정되어 있는데, 굳이 진동을 울릴 일이 있다고?

‘진동 알림은 전화뿐인데?’

이 시간에 누가 전화를?

여러 기능이 설치된 채지세의 던전용 포켓파이 덕분에 와이파이 겸 통신사 전화까지 모두 받을 수 있는 하빈. 그녀가 스윽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마침 화면에 뜬 글자는.

[꼰대 선배]

-영상통화

“……?”

[뭐, 뭐냐?]

화면을 확인하고 괴상한 표정을 짓는 현하빈. 그 모습을 본 지석이 물었다.

“꼰대 선배? 누구야? 우리 학교 학생?”

그새 울림국제고에서 선배를 사귀었나? 아니면 다른 지인의 별명?

그러나 하빈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냐! 이게 바로 우리가 아까 핸드폰 빌려준 마신이라고.”

“뭐?”

“마신이랑 헤어지기 전에 핸드폰도 빌려주고 번호도 교환했던 거 기억 안 나?”

* * *

그랬다. 97층에 진입하기 전, 이공간에서 글리치와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글리치에게 핸드폰과 던전용 포켓파이를 빌려주었다.

이유는 별다를 게 없었다. 글리치가 부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너희 인간들이 쓰는 그 작은 아티팩트, 편리해 보이는데 나는 쓸 수 없나?’

‘뭐야? 왜 핸드폰을 탐내? 이게 얼마나 비싼 줄 알아?’

‘……혹시 저번의 네풀릭스, 베짱이 보일러 이용료보다 비싼가?’

‘당연하지!’

하빈은 세상 물정 모르는 마신에게 핸드폰의 위대함을 피력했다.

‘나도 이거 아직 할부 못 갚았거든! 돈 없는 성좌는 평소처럼 반지로 소통해!’

[그렇다! 나도 핸드폰 없어서 빌려서 카카페 본다!]

‘…….’

할 말을 잃은 글리치. 그를 도와준 건 다름 아닌 채지석이었다.

‘아, 저한테 예비용으로 몇 개 더 있는데 드릴까요?’

솔라리스의 부길마이자, 부자 채지석. 그는 글리치에게 선뜻 새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아니, 채씨는 핸드폰이 왜 이렇게 많아?’

‘던전에서 쓰다 보면 망가질 위험이 있잖아? 그래서 원래 다들 예비용으로 구비하는데.’

‘헉, 그 생각을 못 했다!’

실수로 던전에서 핸드폰 망가지면 네풀릭스도 카카페도 안녕이다. 핸드폰 가격을 생각하느라 폰을 하나밖에 구비해 놓지 않은 하빈은 자신의 과거를 반성했다. 그러는 사이 채지석은 글리치에게 간단한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사용법은 알겠어요? 이걸 누르면 통화고, 이걸 누르면 메시지인데…….’

‘간단하군. 그동안 지켜보며 어깨너머로 꽤 배웠다.’

‘정말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일단 핸드폰을 전달한 그들. 이참에 글리치의 번호를 하빈은 ‘꼰대 선배’라고 저장해 둔 것이다.

“근데 시작부터 영상통화를 쓸 줄 아네? 이거 요금제 채씨가 내는 거 아냐? 영상통화는 요금 비쌀 텐데. 뭐 잘못 건드려서 영통 누른 거 아니겠지?”

하빈이 톡톡 화면을 두드려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화면이 뒤바뀌며 카메라 모드로 전환되었다.

-지지직

약간의 잡음 끝에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그리고 화면 너머 가득 보이는 광경은-

-허억, 마신님?

-마신님!

“뭐야? 어쩌다 다들 모여있어?”

가운데 있는 글리치의 얼굴 양옆으로 크릭샤와 이프시네도 모습을 드러냈다. 배경이 마계인 걸 보아하니 마계에서 셋이 만난 모양. 이프시네가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마신님! 진짜로 97층에 계세요? 저희가 97층으로 지금 당장 출발할까 하는데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하빈이 반문하는 순간이었다.

-삐이! 삐이!

화면을 리베가 팔짝팔짝 곁으로 다가왔다. 화변에 있는 글리치를 보고 흥분한 리베가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다.

-삐!!!

리베는 떠올렸다.

저 마신은 리베가 불을 뿜는 걸 본 적 있다! 그걸 생각한 리베가 하빈을 툭툭 치고, 자신의 입을 툭툭 치고, 마지막으로 화면을 툭툭 쳤다.

“어, 리베? 왜 그래?”

-삐이! 삐아아- 삐이!

자신의 입을 가리켜 화아악, 불 뿜는 동작을 한 다음, 글리치의 얼굴을 탁탁 내려치는 행동. 그걸 반복하는 리베.

‘흐음?’

이게 무슨 뜻이지?

‘불 뿜는 걸…… 꼰대한테?’

아, 설마!

하빈이 무언가 깨달은 듯 리베한테 물었다.

“리베, 혹시 불 뿜는 거 꼰대한테 물어보라고?”

-삐!

리베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들의 소리를 들은 글리치가 반문했다.

-불 뿜는 거?

“뭐야, 선배 알아? 리베 불 뿜는 법?”

-당연하지. 후배님 용 곧잘 하던데…… 저번에 떡볶이 먹였을 때.

“뭐?”

그 말에 하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잠시간의 침묵 뒤, 하빈이 살벌하게 웃으며 물었다.

“선배? 솔직히 말해. 설마…… 나 없다고 우리 리베한테 막 욥떡 먹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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