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Role playing game (2)
[진짜다! 내 이야기를 믿어다오. 정말로 똑같은 부분이 많다! 우선 이 나라 이름들이 내게는 무척 익숙한 게, 예전에 내가 잠깐 방문했던 세타 대륙인 것 같고, 특히 픽셔 제국은 ‘황제를 길들이려다 때려쳤습니다’의 내용과 무척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엥, 그래?”
“그게 정말입니까?”
하빈의 무심한 반응과 달리 채지석은 그 이야기를 굉장히 귀 기울여 듣는 모양이었다. 그의 반문에 아헤자르가 신나서 외쳤다.
[물론이다! 일단 이 대륙의 이름을 확인하면…….]
“잠깐만, 잘잘아.”
가만히 듣고 있던 하빈이 지적했다.
“그래. 일단 여기가 잘잘이가 살았던 예전 세계라고 쳐.”
여기가 아헤자르가 살았던 세계를 복원한 던전이라면……,
믿기 어렵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말은 아니다. 지금 학계에서도 ‘던전은 멸망한 다른 세계나 차원의 파편을 붙여서 만들어졌다’는 가설이 상당히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니까.
아헤자르가 살던 멸망한 세상, 아우라이던을 복원시킨 던전이 있을 법도 하지.
“하지만 픽셔 제국이랑 웹소설 닮은 게 왜? 우연일 수도 있지.”
특히 웹소설들은 서로 비슷비슷한 내용과 세계관을 가진 경우가 허다하다. 폭군과 친하게 지내게 된 여주라거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여주라거나.
‘그런 스토리는 현실에서도 역사적으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니 웹소설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해서 특별히 주목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 그런가? 하지만…….]
아헤자르가 그에 대해 반박을 하려던 타이밍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말은 거기서 막혔다.
“저, 전하께서 황금용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마침 그때, 한달음에 달려온 시종이 그들에게 아뢴 것이다.
“음?”
시종의 태도에 하빈은 팔짱을 턱, 끼며 고개를 삐딱하게 들었다.
“그래서?”
“예? 그, 그래서 알현실로 모시려고…….”
“뭐어? 알현실?”
알현실이라는 단어에 하빈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 들은 말이 정말이냐는 듯 커진 눈.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시종에게 반문했다.
“뭐?! 지금, 황금용더러 직접 왕을 만나러 오라, 그건가?”
“예?”
“감히 우리 황금용께 오라 가라 하다니! 어디 감히! 용신님께 기선제압이라도 하겠단 거야?”
하빈이 인상을 팍 썼다. 그러자 옆에 있던 리베도 따라서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삐이이!
작은 눈을 부라리며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는 리베!
그 모습을 본 시종이 기함했다.
“예에? 아, 아뇨! 아뇨,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는 시종. 그가 눈치를 살피며 하빈과 지석을 흘끔댔다.
‘어느 쪽의 비위를 맞춰야 하지?’
궁에 입궁할 때, 하빈은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쪽은 전설 속 황금용님! 우리의 용신님!’
리베야 뭐 말할 것도 없는 고귀한 황금용이셨고.
‘이쪽은 전설 속 안내자님! 황금용의 오른팔!’
금발 비주얼을 가진 채지석은 황금용의 오른팔 직함으로 소개했고.
‘그럼 지금 말씀하신 분은 어떤 역할을 맡고 계신지요?’
‘응? 중앙이랑 오른팔 자리 나갔으니 나는 당연히 왼팔이지.’
자신을 황금용의 왼팔이라 소개한 하빈. 그걸 기억하고 있는 시종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은 ‘중앙-오른팔-왼팔’의 순서로 권력이 높은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쪽은 보면 볼수록 왼팔이 실세 같지? 왼손잡이인가?
그러는 와중에도 하빈은 둘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우리 리베, 눈 부라리는 것도 할 줄 아는구나? 잘했어!’
-삐!
‘채씨, 이 와중에도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어떡해? 험악한 표정 안 지어 봤어? 엉?’
‘아니 애초에 전설 속 예언자나 선지자 같은 역할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면 안 될 것 같지 않냐?’
‘하, 그래그래. 채씨가 오른팔이고 주인공이라 그거지? 맘대로 할 거라 그거지?’
전설 속 선지자에 대해, 서로 캐릭터 해석이 엇갈리는 와중. 하빈은 일단 시종을 재촉했다.
“뭐야? 자네는 거기 계속 있을 텐가? 용신님을 꼭 만나고 싶으면 왕께서 직접 오시는 성의를 보이셔야지! 황금용에 대한 경의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이야? 이거 실망이군! 우리 다시 돌아가도 돼? 돌아가도 된다 이거지?”
“아, 아니. 그게 아니옵고……!”
“아이고, 용신님. 저희 돌아가야겠습니다! 이 나라는 벌써 용신님을 잊었나 봐요!”
-삐아아…….
하빈이 통탄을 금치 못한다는 듯 슬픈 목소리로 외치자 리베도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본 시종은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쳤다.
“헉, 이, 일단 제가 전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흠, 뭐,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용신님은 자비로우니까, 특별히 기다려 보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눈물도 한 방울 안 흘리고 슬픈 척 잘한다고 하빈의 연기에 감탄을 흘립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어째 약팔이 같다며 속닥거립니다.]
“크흠.”
‘가장 가까운 빛’의 평가에 지석이 조용히 헛기침을 했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하빈이 살벌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대고 속닥였다.
‘채씨. 방금 입꼬리 올라가는 거 다 봤어! 당장 표정 관리해, 표정! 반짝이 너도 쓸데없는 소리 할래? 어?’
덩달아 뻗대지 못하면 맞추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연기를 못 해서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나? 쓰읍!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딴청을 부리며 팝콘을 쏙 집어넣습니다.]
시종을 비롯한 궁의 사용인들이 헐레벌떡 돌아가고 난 뒤, 그들은 자신의 태도에 변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석이 먼저 질문했다.
“현하빈, 너는 왜 처음부터 그렇게 세게 나간 거야?”
따뜻한 태도로 왕실을 대할 수는 없었나?
그 질문에 하빈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하, 채씨. 그렇게 순진한 질문을 하다니. 원래 이럴 땐 무조건 세게 나가야 하는 거야!”
-삐아삐아!
리베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아앙, 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벌린 입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반짝, 빛났다. 아무래도 마계에서 센 척을 많이 못 했던 원을 여기서 다 푸는 모양.
“우쭈쭈, 우리 연기천재 리베, 잘했어!”
-삐!
만족스러워하는 리베를 쓰다듬으며 하빈이 설명을 이었다.
“우리는 이 왕국의 상황을 하나도 몰라. 권력 구도가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지.”
물론 미리 그 정보를 모두 입수하고 뛰어드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없어.”
점검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모른다. 무엇보다 하빈은-
‘빨리 여길 끝내고 현시우를 족치러 가야 하니까…… 흠흠.’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빈은 그 설명은 쏙 빼놓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한된 정보 상태로 왕궁에 뛰어드는 건 변수가 많지. 특히 누가 적군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아무리 전설로 숭상되는 황금용이라 해도 과연 왕실과 귀족들이 황금용의 등장을 반길까? 아니, 애초에 믿기는 했을지?”
아무리 나라의 국교라 해도 인간은 인간. 태생적으로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의심할 줄 아는 종족.
똑똑한 권력자가 순수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글쎄. 오랜 시간 등장하지 않는 전설 속 황금용을 진지하게 믿고 있을까?
그보단, 믿든 안 믿든 단지 그것을 이용하는 편에 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사람들의 믿음과 협동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용신교’가 이용되고 있었던 걸 수 있다고. 용은 정말로 이 나라의 상징일 뿐이었다면.”
그럼 진짜 용이 나타난다 해도 경외감보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가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상황인지 아닌지, 상대의 의중을 봐야지. 그걸 가장 빠르고 효율적이게 보면서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이렇게 나가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고!”
의외로 물 흐르듯 이어지는 하빈의 말에 채지석이 의외라는 낯을 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고?”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뭘 당연한 걸 물어? 웹소 클리셰가 대체적으로 그렇잖아?”
웹소에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클리셰가 신을 안 믿는 교황, 신을 안 믿는 성녀, 신전을 이용하려는 왕! 국교와 대립하는 왕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라면 다들 황금용의 등장에 자신의 손익 계산을 먼저 하려고 하겠지.”
게다가 리베는 아주 작고 앙증맞게 생겼다. 차라리 거대하게 생겨서 위엄이라도 보이면 모를까, 작은 황금용에, 용을 데려온 이들도 왕국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새의 이계인.
딱 봐도 어떻게든 이용해 먹고 싶어지는 조합들.
“웹소에서 왕실은 말야. 아아주 무서운 곳이라니까?”
[그렇다! 궁중 암투물이 넘치느니라!]
“그러니 처음부터 기선제압을 하면서 간을 봐야 한다고! 저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만약 왕실이 그들을 진심으로 경외하거나, 적어도 필요로 하고 있다면 하빈의 제안에도 별수 없이 친히 나와 줄 것이고.
견제하고 있다면 고민하겠지.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방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 * *
“……뭐? 직접 오라 전했다고?”
그 말을 들은 체칼라다임의 국왕, 호그누 체칼라다임은 으음, 하고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반응을 보아하니 저쪽도 보통이 아닌 모양이군.’
물론 대륙회담을 앞두고 황금용이라도 나타났으면, 하고 속없는 생각을 하긴 했다지만 진짜로 황금용이 나타나다니.
게다가 문지기와 시종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척 당당하고 거리낌 없는 태도에, 경전처럼 금발과 금안을 가진 선지자도 함께 나타났다고.
‘그래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사실 체칼라다임 입장에서도 용신님께서 나타났다며 조공을 내놓으라 설친 사기꾼이 하빈 이전에도 한둘이 아니었다.
‘모두 아니라고 밝혀져서 신성모독죄로 처형당했지만.’
대부분 용과 비슷하게 생긴 도마뱀에 가짜 날개를 달고 비싼 안료를 발라 사기를 치는 족속들이었다. 호그누는 비소를 지었다.
“그래. 만일 진짜로 용신님이 나타났다면 이보다도 좋은 소식이 없지. 내가 직접 가는 게 대수겠나? 오히려 네 발로 기고 무릎을 꿇어서라도 용신님의 마음을 얻어야 할 터. 하지만.”
……이번에도 사기꾼이라면?
애초에 신앙심이 깊지 않았던 호그누. 거기다 사기꾼까지 몇 걸러낸 그로서는 쉽사리 하빈 일행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체칼라다임 왕국 역시 용을 감별할 방법이 있다는 것. 그의 태도에서 의중을 눈치챘는지, 곁에 있던 대신이 말을 받았다.
“아닐 가능성을 생각하신다면…… 역시 신전에도 연락을 취해야 할까요?”
“아니, 신전 놈들은 아직 알아선 안 돼.”
모처럼 나타난 용신이 만에 하나 진짜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신전이 먼저 용신을 데려가 버리면 대륙회담에 용신님을 모셔갈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진짜 용신이라면, 모처럼의 용신이 왕실에 먼저 손을 뻗어 준 지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생각을 마친 호그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좋다. 내가 직접 만나러 가겠다.”
정체를 알기 전까지는 진짜 용신으로 간주하고 잔뜩 숙일 것이다. 그 정도야 일도 아니다.
‘혹여나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때 죄목을 가중해서 처형시키면 되니까.’
호그누는 굳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 * *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호그누.
‘엥? 진짜로 바로 달려왔네?’
그냥 달려온 정도가 아니었다. 호그누는 리베를 보자마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헉!’
‘전하께서 고개를 저리 숙이시다니!’
“전설 속 용신님을 뵙습니다.”
-삐아아!
어느새 삐딱하게 쿠션 위에 누워 까딱까딱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는 리베. 그 모습을 보며 지석은 속으로 갸우뚱했다.
‘저 태도는 어디서 배운 거지?’
설마 현하빈한테 배웠……나?
어린아이는 보호자의 모습을 참 빨리 배운다던데. 저런 거 배워도 되는지 몰라. 이걸 학습능력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그러는 와중에도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 호그누가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전설 속 용신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시다니, 이토록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삐아아!
“그럼 전설대로 성물에 축복을 내려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
호그누의 말에 순간적으로 하빈과 지석의 표정이 굳었다.
‘성물에 축복?’
‘축복?’
그런 거 없는데.
‘현하빈, 너 혹시 축복 관련 스킬 있어?’
‘응? 몰라. 맹독 제조는 있는데.’
‘…….’
애초에 아헤자르의 스킬에는 검술 계열뿐이고 마신의 스킬들도 마법과 저주, 독 계열이니.
[축복은 무슨, 사람 잡는 스킬만…….]
‘잘잘이, 너 뭐랬냐?’
[크흠, 아니다.]
그들이 침묵에 잠겨 있을 때였다. 호그누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어느새 미약한 의심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성스러운 용의 불꽃 말입니다.”
설마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죠?
무언의 압박에 하빈은 슬쩍 리베를 곁눈질했다.
용의 불꽃?
‘어, 어쩌지?’
우리 리베는 불 같은 거 못 뿜는 아기라고!
그동안 오랜 시간 함께 지냈지만 리베가 불을 뿜는 걸 본 적은 없었다.
‘그냥 파이어 같은 마법 써서 퉁쳐?’
하빈이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리베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삐악!
“……응?”
반짝거리는 눈, 자신감 넘치게 활짝 편 가슴, 의기양양한 표정까지!
-삐아, 삐악!
리베가 자신을 믿어보라는 듯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탕탕,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