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Role playing game (1)
“자, 이번 작전은 채씨가 주인공이야!”
“난 주인공 시켜달라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삐!
“그래그래! 리베가 주인공이지! 리베가 바로 그 전설 속 황금용이니까!”
-삐아아!
하빈은 리베에게 천천히 공을 들여 하나하나 작전을 설명해 주었다. 대충 리베가 여기서 짱이고 일단 짱인 것처럼 행동하라는 이야기였는데 아무래도 잘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리베를 데려온 전설 속의 예언가 ‘채(Chae)!’”
하빈이 짜잔 하고 채지석을 가리켰다. 졸지에 리베를 안아 들고 서 있던 채지석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름 너무 대충 짓는 거 아니냐?”
하긴, 아헤자르를 김잘잘이라 부르고 크릭샤를 김릭샤라 부르던 현하빈의 행보를 생각하면 이것도 꽤나 잘 쳐준 것일 터. 채지석은 이참에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럼 너는 무슨 이름을 할 생각이야?”
“응? 나야 당연히 ‘빈’이지.”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채와 빈, 그리고 리베가 과연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팝콘을 쥡니다!]
“뭐야? 반짝이 너, 팝콘 있어? 어디서 팝콘 먹는데? 혼자만 먹겠다, 그거야?”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눈을 피합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래서 어떻게 들어갈 셈이냐며 말을 돌립니다!]
하빈이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 나는 아주 당당한 빈. 그냥 정문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갈 거야. 지켜보라구!”
턱을 치켜든 하빈이 성큼성큼 성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지루하군.’
체칼라다임의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 여럿 중 한 명이 하품이 나올 뻔한 걸 삼켰다.
매일 이렇게 성문 앞에서 교대식을 올리고 나면 성문으로 접근하는 이는 몇 없었다. 가끔 왕족이나 귀족이 성을 방문할 때마다 신원을 확인하는 일뿐.
그나마도 왕국 사교계는 좁고도 좁아서 웬만한 얼굴은 다 외우고 있었기에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멀리서 화려한 마차만 보아도 저분은 곱게 모셔야 할 분이다, 아니다가 바로 보이니까.
그런데 오늘은 무려 마차도 없는 어중이떠중이 둘이 성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여기로 오는 건 아니겠지.’
왕성에 방문하는 귀족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차를 타고 온다. 하다못해 평민이 왕족의 부름을 받아 감히 왕성에 발을 디뎌보는 특혜를 누리게 되는 일이 생긴다 해도, 왕실에서 제공한 마차를 타고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왕실에 초대될 정도의 고위 귀족이 마차 하나 없을 리가 없고, 왕실의 정원은 넓어서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쉽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당하게 성문으로 돌진하는 이는 마차는커녕 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후드를 하나 푹 눌러쓴 채 성큼성큼 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문지기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박자 늦게 외쳤다.
“거기, 멈추어라!”
“저요?”
“그래. 너!”
후드를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뻔뻔하게 대답한 쪽은 여자애였다. 다른 한쪽은 역시 후드를 눌러쓰고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전혀 긴장감 없는 얼굴에 문지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장난을 쳐 보고 싶었나?’
가끔 겁 없는 평민 아이들이 왕성에 기웃대기도 한다. 하지만 호기심에 접근하려다 실수로 왕성침입죄나 왕족모독죄, 귀족모독죄 등의 죄를 살 수 있기에, 그럴 때면 문지기들은 뜯어말리는 편이었다.
‘역시 어려서 뭘 잘 모르고 접근한 것이군. 갓 수도로 올라온 촌뜨기일지도 모르겠어.’
왕실 규범에 대해 잘 모르는 평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문지기가 창을 들고 하빈의 앞을 막아섰다.
“돌아가라. 왕성의 초대를 받지 않은 이는 이 앞을 지나갈 수 없다.”
“오, 친절한 분이시잖아.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는지도 설명해 주시네?”
“…….”
문지기는 벙찐 표정으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돌아가라는 말이 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친절한 설명’으로 둔갑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강경한 방법을 써야겠군.’
한숨을 쉰 문지기가 다른 문지기들에게 눈짓하는 순간이었다. 하빈이 말을 이었다.
“그럼 왕성 초대는 어디서 받나요?”
“하, 네가 왕성 초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이번에 대답한 건 다른 쪽에 서 있는 문지기였다. 아까부터 그들의 대립을 쳐다보던 문지기2였다. 그가 다소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하빈을 밀어냈다.
“어차피 평민들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밟기 어려운 곳이 왕성이다.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잘 모르고 온 것 같은데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문지기1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래 봬도 이들은 왕성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평생 못 밟을 거라는 말은 조금 잔인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왕성에 대해 이들에게 따끔하게 설명을 해 주는 게 나을 터.
계산을 마친 문지기가 입을 열었다.
“그래. 곱게 돌아가라. 고위 귀족이나 왕족의 허락이 없이는 못 들어간다. 잘못하면 벌을 받을 수도 있어.”
이쯤이면 돌아가겠지?
하지만 하빈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태평한 표정으로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음, 그런 거라면, 저희는 이미 허락받은 것 같은데요?”
“허락을 받았다고?”
“하, 어떻게 허락을 받았단 말이냐?”
문지기2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창을 겨누었다.
‘그냥 봐도 거짓말이로군.’
다른 고위 귀족의 이름을 대면서 왕궁에 침입하려 시도한 이들도 간혹 있다. 왕실 시종인 척하거나 귀족가 하인인 척하는 방식.
그러나 이들의 옷차림과 태도는 그들과 백만 광년은 떨어진 행색이었다. 게다가 왕궁을 드나드는 사용인들은 애초에 정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서쪽에 있는 쪽문을 통해 드나들고, 이런 절차에 대해서도 환히 꿰고 있어서 시키지 않아도 척척 허가증을 꺼내놓기 마련.
‘그래도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줘 볼까.’
형식적인 확인 절차는 필요하니까 말이다. 문지기2는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먼저 허가증이라도 보여주면서 말했어야지. 너, 어느 가문 소속 하녀야?”
“응? 가문 소속은 아닌데요?”
“귀족가에서 보낸 건 아니라는 거로군. 그럼 궁에서 생활하는 사용인인가?”
“그것도 아니에요.”
“그럼 대체 누구한테 허락을 받았다는 거야?”
귀부인이 부른 재단사? 혹은 소식을 전하기 위한 전령?
“에이, 다 아니라고요.”
남은 가능성들도 모두 부정하는 하빈의 태도에 문지기가 속이 터진다는 말투로 추궁했다.
“뭐야? 장난해? 그 외에 네가 허락받을 방법이 어딨어? 누가 감히 왕성 방문을 허락한단 거야?”
“바로 이쪽이지요!”
하빈이 채지석의 두건을 확 걷었다. 그러자 지석의 품에 안겨 있던 리베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다.
-삐?
“뭐, 뭐야?”
“저, 저게 무슨!”
황금색으로 위장한 버전의 리베! 그 모습을 본 문지기들이 놀라서 주춤 물러섰다. 하빈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체칼라다임의 주인! 체칼라다임의 전설! 우리 황금용께서 들어가도 된답니다. 그렇죠, 용님?”
-삐아, 삐아!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는 리베.
“어, 어떻게 용님께서…….”
그 꼴을 본 문지기2는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털썩 쓰러졌다.
* * *
황금용을 믿는 신성 왕국 체칼라다임.
그곳의 국왕은 오늘도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곧 대륙회담이 코앞인데.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군.”
오랜 전쟁과 냉전 끝에 어찌저찌 마련된 협상 테이블. 그게 바로 이번 대륙회담이다.
아우라이던의 세타 대륙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중 가장 강대한 곳은 명실상부 헤자라토 제국. 전설 속 영웅을 추종하는 이들이 건국했다는 나라.
두 번째로 큰 곳은 픽셔 제국. 그다음이 지금 여기, 체칼라다임이다.
한때는 마계에 맞서 동맹을 맺고 싸운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리저리 갈라진 처지.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왕국들이 있었지만 이 세 나라의 세력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럼에도 체칼라다임의 국왕이 걱정에 빠진 이유는, 체칼라다임의 지위가 상당히 어정쩡하기 때문이었다.
헤자라토 제국과 픽셔 제국 사이 줄타기를 하며 독립된 제3세력으로 있기에는 약간 세력이 밀린다. 그렇다고 덥석 한쪽에 붙기에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래도 선택권이 별로 없다.’
체칼라다임은 내세울 수 있는 패가 이제 거의 없었다. 병력에서도 밀리고, 경제력에서도 밀린다. 그들에게 남은 건 황금용에 대한 믿음뿐.
그러나 그런 믿음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역시 이번 대륙회담에서 헤자라토 제국에게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조공을 바치겠다 해야 하나?
오히려 그랬다가 더 만만하게 보여 픽셔 제국이 침입해 온다거나 헤자라토 제국이 조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체칼라다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는다면?
골치 아픈 생각에 빠진 체칼라다임의 국왕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차라리 진짜 용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풀기 어려운 문제로다.”
그러나 황금용은 전설로 남아 있을 뿐, 몇 대를 거쳐도 나타나지 않으니 그 전설이 맞는지도 솔직히 의아했다. 신관이 안다면 어찌 전하께서 나서서 신성모독을 할 수 있냐며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생각이지만.
그러나.
시종이 창백한 얼굴로 소식을 전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저, 전하! 전하!”
“무슨 일이냐!”
퍽 다급해 보이는 움직임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 그걸 보며 국왕은 잠시나마 안 좋은 예감에 휩싸였다.
“설마 헤자라토 제국이나 픽셔 제국에서 침입해온 건……!”
“아, 아닙니다! 아닙니다! 다른 일이옵니다!”
침을 꿀꺽 삼킨 시종이 마침내 말을 맺었다.
“전설로 전해지던 황금용님께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 * *
“어때? 내 말이 맞지?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그 시각, 왕궁의 별채로 안내받은 하빈이 흐뭇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녀가 냠냠 접시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왕궁에서 마련해 놓은 과자와 간식들은 꽤나 맛있었다.
“이제 왕이 도착하면 이리저리 둘러댈 말을 생각…… 흠? 다들 거기서 뭐 해?”
하빈은 고개를 돌려 방 한편에 마련된 책장을 쳐다보았다. 채지석과 아헤자르 둘 다 책장에 있는 책을 뽑아 열심히 읽는 중이었다. 채지석이 대답했다.
“솔직히 우리, 너무 빨리 들어오느라 이쪽 세계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잖아. 상황에 대응하려면 미리 좀 알아둬야지.”
재빠르게 최신 소식들과 교양, 역사서를 훑던 채지석. 맞은편에 기대어 선 아헤자르도 팔락팔락 책을 넘기고 있었다.
“채씨는 그렇다 쳐도 잘잘이까지 덩달아 저럴 줄이야.”
책을 본 뒤로 말 한마디 없이 책에만 정신이 팔린 아헤자르. 저런 모습은 아헤자르가 웹소에 푹 빠졌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데.
하빈은 예의 삼아 아헤자르에게 물었다.
“오, 우리 잘잘이 꽤나 열심인데? 뭐 찾은 거라도 있어?”
[……있다.]
아헤자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진중하면서도 약간의 떨림과 흥분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 세계, 내가 살던 곳과 무척 닮았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같은 곳인 것 같은데!]
“진짜?”
사실 여기 떨어졌을 때부터 자기가 살던 곳과 비슷하다니 어쩌니 하던 아헤자르. 중세판 웹소 볼 때마다도 그 소리해서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했는데, 그게 진짜라고?
솔직히 별로 신빙성은 없었지만 하빈은 일단 아헤자르가 시무룩해지지 않도록 맞장구를 쳐주었다.
“와, 대단하다, 우리 잘잘이. 그럼 잘 알겠네? 지금이 어떤 시대고,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그게 기억이 너무 오래되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조금 당황한 듯 주춤거리던 아헤자르. 그는 촤라락 책을 펼치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단서가 있다! 여기, 아무리 봐도 내가 읽던 웹소와 배경이 너무 비슷하다! 특히 저쪽 옆 나라! 픽셔 제국 상황이……!]
“웹소?”
여기 와서도 웹소 타령인가? 하빈의 반응에 아헤자르가 속상한 목소리로 외쳤다.
[웹소 타령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그 소설, 세계관이 픽셔 제국이다! 지금 시대 픽셔 제국을 주제로 한 것 같다!]
“무슨 소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있잖느냐!]
답답하다는 듯 아헤자르가 폰 화면을 휙휙 넘겨 카카페 창을 보여주었다. 상단 표지 옆에 커다랗게 작품명이 적혀있었다.
<황제를 길들이다가 때려쳤습니다>
부제: 인간이 할 짓이 아님
[바로 이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