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왜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공통적으로 용이 전설 속에 등장할까? 사실 진짜로 옛날에는 어딘가에 비스무리한 동물이 있었던 게 아닐까? (공룡: 저기요)
“매관매직? 이번엔 또 어떤 직종을 택할 건데?”
지석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동안 하빈의 특기 중 하나가 그쪽 소속인(?)으로 위장해서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 대상들이 비범해서 문제지.’
하필 사칭했던 게 마왕, 마신, 그리고 지석은 모르는 일이지만 사이비 교주까지. 아주 착실하게 해먹었던 현하빈.
“쉬이잇, 채씨. 조용히 하라구. 다 들리겠어.”
하빈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손가락을 쉿 올렸다. 마침 그들은 근처 도심지에 도착해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중이었다.
“네가 여기 오자며…….”
다짜고짜 식당으로 끌고 들어와 놓고 회의를 못 하게 하면 어떡하냐.
채지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하빈을 쳐다보았다. 하빈은 마침 주문한 빵을 야무지게 뜯고 있었다. 주욱 찢어지는 결을 따라 바삭한 빵 안에 숨겨졌던 쫄깃한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하빈이 감탄을 흘렸다.
“크으, 맛있겠다! 채씨도 얼른 먹어!”
“먹는 걸로 말 돌리지 말고.”
“쳇. 알았어! 그렇지만 원래 새로운 지역을 탐방할 때, 그 나라의 특색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빠른 방법이 바로!”
“바로?”
“그 나라의 식문화를 체험하는 것이지!”
“그냥 여기 음식이 먹어보고 싶었던 거 아니냐?”
“크흠, 흠!”
하빈이 헛기침을 하며 치즈가 들어간 양파 수프를 휘저었다.
“에이 참, 나 아직 점심 못 먹었단 말이야.”
“염단 돈가스 인벤토리에 있는데.”
“어허, 넣어 둬! 그건 귀한 거라서 아껴 먹어야 해!”
손을 휘저어 지석의 동작을 막은 하빈이 빵을 들어 양파 수프에 푹 찍었다. 캐러멜라이즈된 고소한 양파 국물이 빵 사이사이로 듬뿍 스며들었다.
“내가 또 이런 세계관 여행을 못 해봤잖아. 여긴 저번 마계랑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뭐랄까, 웹소 중에서도 평범한 중세 배경 느낌?”
[그렇다. 아주 익숙해서 마음에 든다!]
“호오, 역시 잘잘이는 중세 전문인가 봐!”
물론 건축 양식이나 식문화가 지구의 중세랑은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았지만 말이다. 그들이 살던 지구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건축 양식과 코끝을 스치는 미묘하게 다른 향신료의 향까지.
“아주 이국적이야. 여행 온 것 같고 너무 좋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제한만 없으면 아주 뽕을 뽑고 돌아가면 좋은데.
“아, 그런데 우리 계산은? 너 그새 공용 코인 아이템 챙겨왔어?”
“엇?”
채지석의 질문에 하빈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용 코인 아이템은 말 그대로 어느 던전에서든 사용할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이었다. 플레이어가 새로운 던전 세계관에서 경제활동을 할 때 이걸 사용하면 그 세계관의 화폐로 자동 처리된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금 대신 ‘공용 코인’만 금고에 모아놓는 재테크를 하자는 주장이 나왔었다.
그러나 정작 그동안 인류가 마주했던 맵은 97층과는 달리 무척 작고 쉬운 던전이 많아서 제대로 사용될 일이 적어 사장된 주장이었다.
“그럼 채씨는 갖고 왔어, 공용 코인?”
“나야 늘 구비해 다니지.”
언제 어느 던전에 떨어질지 모르니 공용 코인과 금을 모두 챙긴다. 세계관이 달라도 금이나 보석, 아이템들의 가치는 고가로 거래되는 경우가 잦았다.
“으윽, 나도 헼께록의 금반지나 벗겨올 걸 그랬나…… 아!”
하빈은 저번에 글리치에게서 받은 커다란 보석을 떠올리고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또 시무룩해졌다.
“그건 너무 커서 이런 데서는 못 쓰겠네.”
고가의 보석이라 수프와 빵값으로 내기에는 무리다. 하빈은 결국 채지석에게 현금을 대신 주기로 했다.
“코인 시세만큼 쳐서 원화로 줄게.”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사실 없다고 하면 그냥 내가 사려고 했는데.”
“김영란법!”
“다른 세계까지 와서 김영란법 타령하기냐?”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러는 너도 마계에서 김영란법 타령을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합니다!]
“엇, 채씨도 그랬다는데?”
“그건 너 대신 돌려 말하느라…… 아니다.”
툭탁대던 그들은 겨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주변을 살펴본 지석이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방음 장치까지 다 켰으니 말해 봐. 이번엔 어떤 사람으로 위장할 생각인 거야?”
현하빈이 말하는 투로 보아서는 이미 뭘로 위장할지 다 생각해 놓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흠흠! 그래. 난 다 생각해 놓은 게 있다구!”
자신 있게 팔짱을 낀 하빈이 처억,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성을 가리켰다.
“채씨, 여기 이 왕국 깃발 봤어?”
“깃발?”
꽤나 멀리 있는 성 꼭대기에 달린 깃발. 그러나 스탯과 스킬을 써서 집중하면 못 볼 것도 없었다.
“깃발 말고 성문 같은 데도 있어.”
“뭐가?”
“이 나라의 문양? 문장? 뭐 그런 거.”
문장.
그건 그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 같은 걸 말한다. 멀리 있는 성을 바라보던 채지석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너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일부러 이 나라를 골랐지?”
근처에 있는 마을에서 정보를 얻고, 높은 곳에서 각 방향의 나라를 살핀 끝에 그들은 가장 근방에 있는 나라 중 세 곳 중 하나를 선택해 도심으로 온 것이었다.
지금 그들이 도착한 나라의 이름은 체칼라다임. 깃발에는 위풍당당한 황금용이 자리잡고 있다. 그걸 가리킨 하빈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황금용이지. 역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판타지 세계관에는 자고로 말야, 어느 왕국이든 가문이든 꼭 어딘가에선 용을 상징으로 쓰더라니까?”
판소에 드래곤 나오는 건 국룰이라고!
“특히 중세풍에서는 끝판왕으로 통한단 말이지. ‘용’하면 다 끝난다고, 끝!”
“뭐가 끝난다는 건데?”
“후우, 이래서 웹소 덜 읽은 사람이란. 일단 내가 하는 거나 잘 봐.”
후후후, 어딘가 음흉한 웃음을 지은 하빈이 손을 휘저었다.
슈우욱, 소리와 함께 작고 하얀 용, 리베가 등장했다.
-삐악?
펫 공간 안에 있다가 갑자기 불려 나온 리베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빈이 리베에게 빵 조각을 건네며 상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귀여운 리베! 우쭈쭈, 위풍당당 황금용 연기도 잘할 수 있겠지? 언니는 너만 믿는다!”
-……삐?
“야, 잠깐! 잠깐만! 너 설마!”
그제야 하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지석이 기겁해서 반문했다.
“설마…… 지금 내가 예상하는 그 방법을 쓸 셈이야? 리베를…… 황금용으로 둔갑시켜서 성으로 데려가려고?”
지석의 말에 하빈이 손뼉을 딱 쳤다.
“오, 맞았어! 잘 아네! 역시 채씨는 눈치가 빨라! 안 그래도 여긴 국가 상징이 황금용이어서 그런지 다들 황금용을 경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더라고. 이 나라의 국교부터가 용신교라잖아? 지나가다가 신전 방문하는 사람들 말소리를 주워들었지.”
전설로만 내려오는 황금용에 대한 깊은 신앙심.
“그리고 내가 아까 화장실 간다고 하고 잠깐 자리 비웠잖아? 그때 슬쩍 물어봤는데 여기 건국 설화부터가 ‘용이 내려준 나라’래. 언젠가 용이 다시 찾아오면 돌려줘야 한다고 믿고 있다던데.”
-삐이?
리베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빵 부스러기를 묻힌 채 고개를 들었다. 하빈이 리베를 처억 가리키며 지석을 향해 씨익 웃었다.
“자 채씨, 잘 봐. 우리 리베. 자세히 보면 신화 속 위엄이 느껴지지 않아?”
“잠깐, 잠깐만. 일단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어. 이해했는데.”
채지석은 손을 내저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지금 하빈이 한 말의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건국 설화에 등장하는 ‘황금용’을 숭상하는 나라. 그리고 눈앞에 놓인 용 리베.
“리베가 용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좀 작지 않나?
-삐?
상황을 모르는 리베만 지석과 하빈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 * *
“작은 게 뭐가 문제야? 그건 입을 얼마나 잘 터냐에 달렸다고.”
“그건…….”
“걱정하지 마! 내게 다 생각이 있는걸! 어쨌든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냐.”
재빠르게 채지석의 의문을 차단한 하빈이 다시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지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지금 용의 크기가 중요한 거냐고, 이 사기극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 아니냐고 계약자를 지적합니다!]
대놓고 뻔뻔하게 사기극을 주장한 하빈의 태도. 그걸 너무 당연하게 여겨 버린 채지석. 그 모습이 ‘가장 가까운 빛’에겐 어이없게 느껴진 모양. 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 그게 현하빈이라면 당연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에…….’
그리고 원래 스토리형 던전을 깰 때는 이런 방식으로 ‘롤플레잉’ 전략을 사용하는 헌터들이 꽤 있었다. 그 세계관에 맞게 일부러 직업과 소속을 위장한다거나. 원래부터 그곳의 주민인 척한다거나.
현시우와 다른 헌터들 역시 50층 ‘마계’를 공략할 때 마족으로 위장했으니.
‘물론 현하빈 같이 극단적인 경우는 잘 없었긴 한데.’
마신이니 마왕이니 너무 스케일이 큰 것만 한다. 그러다 보니 채지석 역시 마왕의 오른팔, 마신의 오른팔인 척해야 했다.
‘이번에는 그럼 뭘 해야 하는 거지?’
채지석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채씨, 일단 날 따라와 봐! 빨리 저기로 가자고.”
하빈이 지석의 손을 덥석, 잡아끌고 총총 도심을 가로질렀다. 그래도 그들은 제법 중세인다운 복장으로 바꾼 지 오래였기에 다행히 시선과 이목을 끌 일은 적었다.
마침 하빈이 향한 곳은 신전이었다.
“일단 여기서 ‘황금용’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고 시작하자. 자고로 ‘적을 알아야 나를 안다.’ 라는 말이 있잖아?”
“……응?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 아니고?”
“쉿! 조용! 아무튼! 이곳 사람들이 용에 대해 어떻게 묘사했는지 제대로 알아야 딱 흉내 낼 수 있다구!”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넘어가는 채지석. 그가 조용히 감탄했다.
“꽤 섬세하고 치밀한걸?”
그냥 무작정 ‘전설 속 용이 나타났다!’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라 개연성과 고증을 지켜 등장하려는 모양.
“앗,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야! 우리 저걸 읽자!”
마침 그들의 시야에, 경전을 자리에 내려놓고 식사를 하러 나가는 신도의 모습이 보였다. 하빈은 들킬세라 엉금엉금 기어 경전으로 다가갔다.
하빈은 맨 뒷장부터 펼쳐가며 휘리릭 내용을 훑었다.
‘원래 종교 서적은 맨 마지막이 중요한 법이거든.’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내용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 그럼 그때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를 카피해서 벤치마킹하면 된다구.
하빈이 씨익 웃으며 경전을 읽었다. 마침 펼친 페이지에도 그와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황금용께서는 약조하셨다. 언젠가 금빛 눈과 금빛 머리를 가진 자와 함께 돌아올 것이며…….
“오! 좋아. 그럼 금빛 눈과 금빛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 위장해서…….”
하빈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침 금발에 금안인 사람이 저기 있잖아?
“흐으음…….”
“?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하빈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채지석은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