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2살 현하빈 vs 현하빈 2명? (※사실 현시우에게는 선택권이 없다고 한다) (2)
“뭐? 술 마셨으면 곱게 자라?”
[지, 진정해라!]
“아. 놔봐, 좀!”
현시우의 대꾸에 잔뜩 기분이 상한 현하빈. 그녀가 팔짱을 끼며 인상을 썼다.
“그래서 가면마법사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놀란 기색 없이 술 먹으라고 하는 걸 보면 정말로 아닌 기색이다. 평소의 현시우와 다를 바 없어서 사람이 더 헷갈린다.
‘선배가 헛다리 짚었을 수도 있고 말이지.’
마신은 딱히 증거를 내놓지 않았다. 그저 현시우가 피데스인 것 같다고 언질만 줬을 뿐.
하긴 그때 상황에 증거 사진을 찍어온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물증 없는 글리치의 주장 하나뿐. 글리치 입장에서도 현하빈의 능력을 알고 있으니 직접 확인하라고 하는 게 속 편할 터.
“하, 맘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서 멱살 잡아야 하는데. 이 자식이 어딨는지 모르니 지금 당장 가서 추궁할 수도 없고 그러네!”
“누굴 추궁하는데?”
“……그게.”
가만히 듣고 있던 채지석의 물음에 하빈은 끄응,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마신이 현시우의 이중생활에 대해 나름의 힌트인지 추측일지 모를 정보를 던져주긴 했지만, 솔직히 이건 현시우와 현하빈 사이의 일이다.
마신도 그걸 알았으니 다른 이들 몰래 애써 성좌 메시지로 전달해 준 거였고.
‘꼰대가 의외로 눈치가 좀 있네.’
그들 남매를 배려하려던 거였을까. 하빈은 굳이 그 배려를 깰 생각은 없었다. 설사 정말 만에 하나 현시우가 피데스라고 해도, 그걸 많은 사람에게 알리지 않은 것엔 이유가 있을 터.
‘그러니 채씨랑 언니한테는 함부로 말하기 애매해.’
당장 현시우의 소재를 알아내 달라고 부탁할까도 싶었지만 지금 채지세는 비상 점검 알림 때문에 솔라리스로 돌아갔다.
‘꼰대 선배도 이것만 알려주고 바로 가버렸단 말이지.’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쏙 하고 사라진 글리치.
‘그럼 가면마법사라도 찾아가서 당장 가면을 벗겨 봐?’
문제는 지금 당장 가면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는 건데.
학교에 없는 건 확실하고. 어쩌면 비상 점검 모드 어쩌고 때문에 SPES 집무실에 있을지도.
그러나 SPES 역시 전 세계적으로 지부와 집무실이 있는 상황에다, 뉴스 속보에 따르면 피데스는 잠깐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고들 한다.
현시우가 하빈의 집에 방문하느라 핑계를 댄 것이었고 아직 SPES 복귀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이란 내막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하빈이 알 길이 없었다.
“비상 점검 모드 때문에 공식 석상에는 설 것 같은데. 그때를 노려야 하나.”
수많은 사람들과 인파를 뚫고 가면마법사를 공식 석상에서 공격하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클 텐데.
으으음.
제일 간편한 건 역시 현시우를 잡아 물어보는 거다. 사람들 이목을 끌 일도 없고 가장 정확할 테니까.
“……야, 무슨 생각을 하길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채지석이 물었다. 아마 가면마법사와 현시우를 잡아 족칠 생각을 하던 하빈의 고민이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크흠, 흠. 아무것도 아냐.”
레몬도 끼어들었다.
“하빈 님, 혹시 지금 들어가실 거예요? 아무래도 점검 기간이 언제 끝날지 미지수라 일찍 들어가는 게 나으실 수도 있어요.”
게다가 이번에는 정기 점검이 아닌 비상 점검. 통상적으로 진행되던 일주일 점검보다 더 이른 시간에 끝날지도 모른다.
“에휴.”
그러니 하빈 입장에서도 당장 어디 있는지도 모를 피데스를 족치러 가는 것보다는 97층 진입이 우선순위.
“좋아. 어차피 하루 더 있다 족치든 그전에 족치든 족쳐지는 건 똑같으니까!”
이번에도 97층 하루 컷 하자!
경쾌하게 외친 하빈이 오류를 쑤욱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가서 살펴보고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나 잡아 보자고.
* * *
“……넘어간 건가.”
별다른 반응 없는 현하빈의 카톡을 보며 현시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어때? 내가 보내라는 대로 잘 보냈어?”
그 시각, 전하빈은 현시우의 폰을 힐끔대고 있었다. 사실 ‘술 마셨으면 곱게 자라’라는 카톡은 전하빈의 아이디어였다. 전하빈이 설명을 덧붙였다.
“평소처럼 하는 게 오빠의 수명을 좀 더 연장해 줄걸? 나 분명 이거 보면 맞는지 아닌지 헷갈릴 듯.”
아무래도 본인이다 보니 본인의 심리를 더 잘 파악한 모양. 그러나 네아이바가 끼어들었다.
[근데 이렇게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더 혼나지 않겠느냐?]
“…….”
“……!”
자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걸 제 발로 걷어찬 건 아닌지?!
뒤늦게 그 생각이 든 현시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곁에 있던 전하빈이 걱정 말라는 듯 생긋 웃음을 지었다.
“에, 에헤이! 걱정 마. 어차피 100대 맞든 101대 맞든 비슷한 거 아냐?”
“비슷하긴 뭐가 비슷해!”
“포션 넉넉히 구비해 두고 있으면 돼. 죽이진 않겠지. 설마 죽이겠어?”
“왜 의문문인데? 너도 확신 못 하냐?”
“에엥. 원래 본인도 본인 마음을 잘 모르는 게 사람의 특성 아니야?”
현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가 해맑은 얼굴로 덧붙였다.
“어차피 이중생활을 하게 된 이상 들키면 죽음뿐인데, 이렇게라도 살아남을 시간을 좀 버는 게 낫지 않을까?”
전하빈 본인이 공인한 ‘들키면 죽음뿐’이라는 말에 현시우의 속은 타들어갔다.
“좀 도와줘라. 솔직히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아냐. 나 때문은 아니지. 누가 이중생활 하래? 난 네아이바 넘겨준 적 있어도 이중생활 하라고 권유한 적은 없는데?”
“…….”
생각해 보니 이중생활 하는 건 현시우의 독단적 선택이긴 했다.
[5년 동안 현하빈의 상황을 몰랐던 것도 말이지.]
‘뭐, 그 점은 나도 할 말 없지만.’
현시우가 앞으로의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끄응,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전하빈이 일어났다.
“아, 진짜. 괜찮을 거야. 내 말 못 믿어? 너무 걱정하지 마. 안 죽인다니까.”
“넌 항상 안 죽인다고 해놓고 죽음보다 더한 무언가를 선사하잖아.”
“……크흠. 흠!”
쓰윽 시선을 피한 하빈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큼, 크흠. 그럼 전해줄 정보는 웬만큼 전해줬고, 오랜만에 얼굴도 봤으니 나는 이만 가 볼게.”
“간다고? 어딜?”
“나도 뭐 자잘하게 처리해야 할 게 있어서. 남은 며칠의 시간 알차게 써야지.”
“잠깐만.”
“흠? 질문 더 있어? 나 시간 없다니까.”
“…….”
계속 붙잡는 현시우의 반응이 부담스러운지 툴툴거리던 하빈. 현시우는 그 모습을 보고 잠깐 침묵하다가,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아니, 질문할 건 아니고. 그냥 가는 길에 이거라도 챙기라고.”
휘익- 턱.
하빈은 갑자기 날아온 뭔가를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현시우가 던진 건 간편하게 먹기 좋게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헉, 이거 로디바 초콜릿이잖아!”
좋아하는 브랜드를 확인한 하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현시우가 덧붙였다.
“시간 없다며. 그동안 너 밥 먹을 시간도 없었을 것 같아서.”
고작 일주일, 168시간이다. 게이트 사태 이후 쪼개서 아껴 썼다지만 아마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겠지. 식사와 수면에 허비하기에는 그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질지도.
“너 여기 온 뒤로 잠들거나 뭔가 먹은 적 있어?”
“……나는 안 먹고 안 자도 괜찮은 거 알잖아? 뭘 새삼스럽게.”
그러면서도 얼른 초콜릿을 주머니에 주섬주섬 챙겨 넣는 전하빈. 현시우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쟤가 먹는 거 하나엔 정말 환장을 하던 앤데.’
로디바 초콜릿은 회귀 전의 하빈이 좋아했던 수많은 먹거리들 중 하나였다.
‘이거라도 집무실에 챙겨놓길 잘했어.’
옆에서 얻어먹다 보니 덩달아 좋아하게 된 초콜릿이었다. 그래서 회귀 후에도 사 먹곤 하던 현시우.
비록 당장 밥을 챙겨주고 싶어도 전하빈의 입장상 현실적으로 먹을 시간이 없다. 그러나 초콜릿이라면 전하빈이 이동하는 와중에도 까먹을 순 있을 것이다.
“크으, 이거 내가 정말 좋아하던 초콜릿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여기 딱 있는지 몰라? 역시 우리 오빠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을 흘린 하빈이 마지막으로 현시우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마침내 경쾌한 목소리로 외쳤다.
“초콜릿 고마워, 잘 먹을게! 그럼 잘 있어, 안녕!”
생긋 웃으며 손을 흔드는 현하빈. 수도 없이 겪었던 익숙한 작별 인사에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온다.
“그래, 너도 조심해서…….”
아.
현시우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마저 인사하려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말았다.
이번 하빈의 작별 인사에는 지난번과 달리 ‘다음에 또 보자’가 없었다.
* * *
[킬스크린 97층, ‘사라진 세계’에 진입했습니다!]
이곳은 첫 번째 세계, 그중에서도 가장 풍요롭고도 격동적이었던 시기의 잔재.
[97층 공략 조건 - ???]
“흠?”
공략 조건이 물음표로 뜨는 건 처음 본다.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왜 없어?”
“그러게?”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상당히 당황했을 상황이겠지만, 어차피 하빈은 마음대로 킬스크린을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래도 왜 안 뜨는지는 궁금하네. 아직 여기까지 제대로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거나 아직 패치 안 되었다거나, 그런 건가?”
원래라면 이제 겨우 27층을 공략하고 있어야 할 인류. 그러나 편법을 써서 97층부터 들어온 현하빈이었다.
“뭐, 좋아. 그럼 어디부터 볼까?”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부드러운 잔디가 깔린 언덕 위였다. 높은 곳이라 다행히 주변의 경치가 잘 보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마을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성과 아름다운 숲까지.
“호오.”
[호오…….]
그 광경을 한참 보던 하빈과 아헤자르.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여기 관광하기 딱 좋은 곳이네!”
[여기 내가 살던 세계와 묘하게 닮았다!]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이 와중에도 관광지 같다고 좋아하는 거냐며 고개를 절레 젓습니다.]
“흠흠. 어쨌든 당장 마계처럼 어그로 끌릴 일은 없으니 다행이야. 여긴 몬스터 천지는 아니네.”
저 멀리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몬스터가 주가 아닌, ‘스토리형’ 던전인 모양. 채지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어떻게 공략하지? 우린 시간이 없잖아?”
차라리 몬스터형 던전이었다면 현하빈이 싸악 쓸어버리고 ‘하루 컷!’ 할 수 있겠지만, 여긴 그러기엔 평화주의자 NPC, 그러니까 무해한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 그들에게 이유 없이 칼을 겨누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무력에 의지할 게 아니라 정보전과 전략을 써야 할지도.”
채지석이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하빈이 어이없단 얼굴로 채지석을 콕 찔렀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채씨? 무력에 의지할 게 아니라니. 이런 상황이면 오히려 더 쉽다고!”
“더 쉽다니?!”
설마 무력으로 모두를 꿇리고 협박할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차하면 말려볼 생각으로 지석이 꿀꺽.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겐 아-주 좋은 마법 스킬이 있잖아. 채씨, 그동안 마계에서 써먹고서도 몰라? 아직도 눈치를 못 챘어?”
“뭘 말인데?”
채지석의 반문에, 하빈이 씨익 웃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도 매관매직을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