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91) (191/268)

191. ㅣ0n_g t!me l№_ sℯe

비상 점검 기간이니 지금 들어가면 관리자의 눈을 피해 다녀올 수 있다!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레몬. 자신감 넘치던 그의 표정이 굳은 건 다음 순간이었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점검 기간은 몹시 짧은 편이에요. 그 짧은 시간 안에 97층을 공략할 수 있을지…….”

“얼마인데?”

하빈의 물음에 레몬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제 기억상…… 평균 일주일이었어요.”

“그럼 일주일 안에 97층을 탐방해야 한다는 거야?”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채지석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일주일이라니. 아래층도 웬만한 팀을 이루지 않고서야 한 달은 잡고 공략 시도를 하는데.”

다른 층도 아닌 97층이다. 층마다 테마가 달라서 꼭 고층이란 이유로 무조건 어려운 난이도의 세계관이 등장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동안의 경향을 살펴보면 높은 층일수록 훨씬 더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맵이 나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주일은 너무 촉박해.’

채지석은 그렇게 생각했고.

현하빈은 이렇게 외쳤다.

“뭐야? 널널한데? 97층도 하루 컷 가능!”

“……야!”

뭔 맨날 하루 컷이래?

얼척이 없어진 채지석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래, 안 그래도 네가 그 말 왜 안 하나 했다.”

뭐가 나오기만 하면 ‘하루 컷하자!’라고 외친 뒤 진짜로 하루 컷을 하고 나오는 현하빈.

그런데 자꾸 듣다 보니 이번에도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착각에 휩쓸린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석.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왠지 쟤라면 97층도 일주일 안에 널널하게 털고 있을 것 같다며 덩달아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제 성좌님도 인정한 거냐고…….’

그들과 달리 지세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빈아 진짜 97층 다녀오게? 괜찮겠어?”

50층에 갈 때만 해도 바리바리 아이템들을 챙겼던 채남매다.

“우리가 뭐라도 좀 챙겨줄까? 아이템이라도…….”

“엇, 진짜 챙겨 줄 거야? 마침 나 97층 가려면 필요한 거 있어!”

“뭔데?”

97층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벌써 챙겨갈 물건부터 생각했다니. 의외의 준비성에 채남매가 고개를 돌렸다. 하빈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염단 돈가스! 그거 줄 서서 구해야 해서 좀 많이 힘들더라. 채씨는 대체 그걸 어떻게 매번 구해 오는지 몰라?”

“…….”

“…….”

그러니까 지금 97층에 가서 돈가스 까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다는 거지, 지금?

‘역시. 현하빈이라면 그럴 줄 알았어.’

저번에 50층 다녀올 때 이미 경험했던 일이라 채지석은 재빠르게 평정을 찾았다.

그러나 지세는 하빈의 이런 사고방식을 처음 경험하는 거라 여전히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지세가 세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음, 하빈아. 정말 그거 말고는 필요한 거 없을까? 내가 마음이 쓰여서 그래. 마음 같아서는 바로 따라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지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옆에 뜬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관리자가 ‘비상 점검 모드’를 발동시킵니다.]

[시스템 전체가 비상 점검 모드로 돌입합니다.]

이 창이 뜬 이상 채지세도 얼른 솔라리스에 가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중재할 의무가 있다.

‘비상 점검 모드가 어떤 건지도 알아봐야 하고.’

전 인류에게 처음으로 닥친 ‘시스템 점검’.

그게 불러올 파장은 꽤나 클 것이다. 지세가 투자했던 주식들과 사업체들에게도 지장을 줄 수 있는 사건. 지금 당장 그 일을 해결하기에도 벅차다.

당장 솔라리스에 달려가지 않고 여기서 느긋하게 장부를 해석하고 있었던 건, 이공간에서 꺼내줄 수 있는 존재가 현하빈뿐이었기 때문이리라.

“아하. 언니는 바로 가봐야 하겠구나?”

설명을 듣고 상황을 이해한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괜찮아. 다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97층이 뭐 별건가?”

그 와중에 이렇게 신경 쓴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걸. 생각에 빠졌던 하빈이 덧붙였다.

“바쁘면 염단 돈가스는 그냥 내가 구해서 가도 되고.”

“크흠.”

그 순간이었다. 둘의 상황을 살피던 채지석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뭐, 누나는 못 따라가지만 난 따라갈 수 있는데.”

지세는 솔라리스의 대표인 이상 빠지면 빈자리가 몹시 크다. 그러나 지석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었다.

“무슨 문제가 생긴다 해도 던전 내에서 업무를 볼 수 있는 와이파이가 생겼잖아. 누구 덕에 말야.”

그랬다. 정말 급한 일의 경우 던전 내 와이파이가 있기 때문에 연락이나 업무를 걱정할 일은 없었다.

‘현하빈 혼자 보내는 건 걸리니까, 그리고 성공만 한다면 인류 최초 97층 탐방이야.’

하빈을 챙겨줄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미지의 영역을 가장 먼저 디딜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그 사실을 눈치챈 지세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석이랑 같이 가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이 녀석, 킬스크린에 대한 정보는 꽤 많이 알고 있기도 하고. 의외의 부분에서 아이디어도 잘 내거든.”

“오? 그래?”

혹여나 하빈이 너무 강해서 지석이 오히려 짐이 되거나 위험해진다면, 하빈의 에러 메이커 스킬이 있으니 채지석만 중간에 귀환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빈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 그에 그치지 않고 채지석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 지금 인벤토리에 염단 돈가스 있다. 세 개.”

“헉?!”

그 말 한마디에 하빈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녀가 덥석 채지석의 팔목을 붙잡으며 외쳤다.

“채씨! 그 이야기는 진작에 했었어야지! 당장 나랑 같이 가자, 97층! 채씨 같은 인재를 놓칠 수 없어! 함께 가 줘서 고마워!”

‘진짜 나를 필요로 하는 거냐, 아님 내 인벤토리를 필요로 하는 거냐?’

왠지 후자인 것 같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채지석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하빈을 쳐다보는 동안 레몬이 말을 보탰다.

“어? 진짜 지금 바로 들어가시게요? 학교는 어쩌시고요?”

“비상 점검 모드 뜬 김에 휴교 내렸대! 이건 당장 97층 가라는 계시라니까? 휴교 끝나기 전에 가야 해!”

이래 봬도 하빈은 성실하게 출결 관리를 하는 학생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급을 하지 않는 결석 일수를 계산해서 딱 유급당하지 않을 정도로 출석을 챙기는 하빈.

“지금 딱 휴교 타이밍이니까 그거랑 주말까지 끼워서 결석하면 딱 맞는다구. 크으.”

“이 와중에 결석이 중요한…… 아니다.”

“어어, 채씨. 그러기야? 그러는 채씨야말로 연수원 다닐 때 나 결석하지 말라고 아침마다 챙겼잖아!”

“그거야 내가 네 담당 멘토인 데다 재연수받을 게 빤히 보이니 도와준 거지!”

“흠흠, 아무튼 지금이 딱 적기라고. 97층을 털 수 있는 기회!”

당장이라도 오류를 열어버릴 태세로 반짝이는 점을 향해 손을 내미는 하빈. 그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주변에서 지켜보는 와중이었다.

“……잠깐.”

“……!”

“다들 지금 어딜 간다는 거지?”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하빈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반쯤 열리다 만 오류의 입구가 있었다.

하빈의 집으로 연결된 오류.

그 틈새로 글리치가 빼꼼 눈을 갖다 대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일단 이것 좀 마저 열어 봐. 지금 후배님이 알아야 할 정보가 있어.”

* * *

“뭐야 선배, 이거 못 열어?”

쑤욱 이공간 구멍을 열어 글리치를 들여보내 준 현하빈. 그녀의 물음에 글리치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나는 후배님이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여는지 궁금한데. 정확히 무슨 스킬을 쓴 건지 감이 안 잡히는군.”

아무래도 마신은 동류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스킬 숙달이 덜 된 모양.

“……조금만 더 연습하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이공간도 처음 와봤다는 것치고 상당히 빠른 적응력이긴 했다. 사실 하빈이 직접 가르쳐주면 도움이 되겠지만, 현하빈의 반응은.

“음? 나는 그냥 하니까 되던데?”

“…….”

선배에게서 배운 스킬은 많으면서 정작 본인은 스킬 전수를 못 해주는 불량 후배였다.

“뭐,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들어야 할 정보가 뭔데?”

하빈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방금 글리치가 나타날 때 ‘들어야 할 정보가 있다’고 한 말을 잊지 않은 모양.

“그건…….”

말을 하다 말고 글리치는 하빈 옆에서 덩달아 귀를 기울이고 있는 존재들을 흘깃 쳐다보았다. 레몬과 채남매, 그리고,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턱을 받친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듣는 귀가 너무 많군.’

현하빈 혼자만 있으면 모를까 그 외의 존재가 넷이나 된다. 글리치는 일단 다른 문제부터 말을 꺼내기로 했다.

“나는 당분간 마계에 가 있을 생각이다. 관리자가 간만에 점검 모드를 띄웠으니 이 틈을 타 몇 가지 일 처리를 해야 해서.”

점검 모드가 관리자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점. 그걸 글리치 역시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도록 하지.”

“뭐야, 그 정보 알려주려고 부른 거였어?”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분위기를 잡더니 사실 별거 아니었던 결과에 하빈이 조금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그 이야기를 듣고 경계를 푼 기색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성좌, ‘마신 글리치’가 현시우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냐고 몰래 묻습니다.]

‘성좌 메시지?’

그것도 몰래 묻는다고?

다른 이들이 듣지 않게 전달하려는 모양. 하빈은 곁눈질로 메시지를 살폈다.

‘현시우의 비밀?’

뭘 말하는 거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의 하빈. 그걸 본 글리치가 바로 그 다음 메시지를 띄웠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자신이 보기에 현시우가 ‘가면마법사’로 이중생활 하는 것 같다고 덧붙입니다.]

“……!”

* * *

까똑. 까똑.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카톡 알림.

현시우는 한숨을 쉬며 화면을 확인했다.

도른자

?

혹시

가면

마법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