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De:b\_gging (3)
‘내 상황을 설명하는 건 아무런 득이 없어.’
현시우의 목숨 따위 어떻게 되든, 제 맘대로 그의 정체를 확인했던 마신이다. 그것도 고작 ‘현시우’가 ‘피데스’가 맞는지 자신의 궁금증을 확인하기 위한 용도로 현시우를 공격했다.
‘그러니 내 사정을 설명하는 걸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손해지.’
평범한 사람의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마신의 사고 과정이 보통 인간과 같을 리가. 그래서 현시우는 어쭙잖은 회유 방식을 버리기로 했다.
‘마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뭘까?’
[음…….]
자고로 협상과 설득에는 각자의 이득과 우선순위가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
현시우로서는 지금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건 곤란했다. 당장 마신에게 전달해도 이 모양인데, 현하빈한테까지 이 이야기가 흘러 들어간다면?
과연 관리자가 가만히 있을까? 더 길길이 날뛸지도.
[사실 관리자보다는 현하빈이 더 무섭지.]
그렇다.
사실 현시우가 두려움에 떠는 건 멍청한 관리자가 아닌 현하빈이다.
‘두고 보자, 가면마법사!’
언제나 피데스를 탐탁잖아 했던 현하빈. 거기다 말도 없이 집을 떠났던 게 피데스 활동 때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 그걸 5년 동안이나 비밀로 했고, 그동안 하빈이 고생하며 빚 갚는 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죽겠는데?’
[최소 사망 각.]
그리고 마신의 공격과 다르게 현하빈의 분노 실린 공격은 이길 자신이 아예 없다!
그나마 정상 참작이 되려면 회귀했다는 걸 밝혀야 하는데, 밝혔다간 관리자의 어마무시한 패널티도 받을 거고.
‘일단 지금은 안 돼요. 처리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마이너 패치를 상대하고 SPES를 이끄는 것만으로도 몸이 모자란데 현하빈의 공격과 관리자의 패널티를 둘 다 감당하기는 무리다.
‘그럼 어서 마신을 설득해야 해.’
그동안의 마신의 행보를 생각하면 자유분방함의 끝판왕이나 다름없었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마왕성에 나타나고, 제멋대로 ‘반지’를 넘겨주지 않나, 지금은 그들에 집에 놀러와 죽치고 앉아서 집을 지키고 있다.
자진해서 현하빈의 ‘선배’를 자처하기도 하고.
‘그럼, 마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현하빈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현하빈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맞는 듯하다. 인간계에 와서도 상당히 얌전하게 현하빈을 따라 집에 순순히 온 것도 그렇고, 현시우를 따라붙던 놈들을 시간 내어 처리한 것도 그렇고.
‘거기다 꼬박꼬박 후배님이라고 불러주고 있지.’
오만한 마족의 특성상 누군가를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상 저런 호칭을 붙여줄 리 없다.
현시우는 그 말투에서 현하빈을 향한 글리치의 호의를 읽었다. 게다가 ‘관리자가 신경을 쓴단 말이지?’라는 말에서는.
‘관리자를 적대하는 듯한 모양새였죠.’
[인정.]
마신은 관리자의 편이 아닌 현하빈의 편.
이 가정이 진짜라는 데 걸어볼 만했다.
생각을 마친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제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건 현하빈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 관리자의 비상 모드, 제 정체를 전달한 것 때문에 내려진 거잖아요?”
“나 때문이기도 하지.”
오류인 마신과 기밀을 알고 있는 현시우. 관리자의 주의 대상인 둘의 콜라보로 벌어진 비상 점검 모드.
“이걸 현하빈 앞에서 반복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당연히 관리자가 가만히 있지 않겠죠.”
비상 점검 모드만으로 끝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위험했다. 아직 현시우는 이 시스템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모든 게 미지수야.’
애초에 현시우가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 관리자가 무언가를 눈치채는 것도 특이하다. 분명 관리자만의 특별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키워드나 알고리즘으로 찾아내는 건가?’
키워드 알림이 가는 것처럼, 현시우가 자신의 정체나 회귀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자동으로 신호가 가는 건가. 혹은 세계의 구성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파악하게 되는 건가?
이게 무슨 볼X모트나 홍길동도 아니고. 피데스가 피데스다, 말을 왜 못하는지.
생각해 보니 세상에는 사칭하는 인간들도 상당히 많은데 현시우가 직접 전달할 때만 적용이 된다는 것도 특이하다.
‘분명 기준은 있는데…… 그게 뭔질 모르겠단 말이지.’
시스템도 관리자도 완벽하지 않다. 그러니 언젠가는 단서라도 잡을 수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미지의 영역. 조심하는 게 좋다.
‘게다가 패널티는…….’
회귀 전의 지식에 따르면 지금 이 상황에서 패널티를 받는 건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저 패널티는 늦게 받으면 늦게 받을수록 유리한 패널티니까.
“그럼 네 말은, 아직 후배님이 네 정체를 모르는 게 후배님에게 도움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관리자의 눈을 피해야 하니까?”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죠. 지금 관리자가 현하빈을 찾아 죽이라는 퀘스트를 내린 상황입니다. 만약 현하빈을 찾게 되면 정말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호오.”
‘기만의 수호자’ 처치 퀘스트. 그 정보를 들은 글리치가 굉장히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도 비슷한 수를 써 보려는 모양이군. 무슨 의미인지는 알겠다.”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먹힌 건가?’
이제 비밀을 지켜줄 마음이 좀 드는 건가? 현시우가 안도의 표정을 지으려는 순간이었다. 글리치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우리가 굳이 관리자의 눈을 피해야 하나? 왜? 후배님이 더 강할 텐데?”
‘아니구나.’
먹히긴 개뿔, X된 것 같다. 현시우는 암담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조용히 썩은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그 시각. 갑자기 뜬 알림창 때문에 코니는 서둘러 컨티뉴에 가보겠다고 양해를 구한 상황.
후계자로 들어오는 걸 좀 더 생각해 보라며 하빈의 손을 꼭 붙잡고 다독여 준 다음, 재빨리 뛰어나간 코니를 배웅하고, 하빈은 채남매가 있는 이공간으로 들어왔다.
“다들 잘 있었어?”
“하빈 님! 오셨군요!”
마침 그들 사이에 있던 레몬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반갑단 낯을 했다.
“갑자기 이분들을 던져놓고 가셔서 큰일이 생겼나 했다니까요.”
아마도 갑작스럽게 채남매가 등장하자 놀랐던 모양.
“확실히 큰일이 있긴 했지. 무려 기숙사 벌점을 받을 뻔했다고!”
“하하. 맞아요. 전해 들었어요. 벌점 안 받으려고 이분들을 재빨리 여기 숨기신 거라고.”
“그래도 레몬이는 예전에 봤던 얼굴이라 별로 놀라지 않았지. 오랜만에 인사 좀 했어.”
“맞아요. 얼굴 뵈어서 반가웠어요!”
레몬은 채남매에 대해서는 딱히 겁을 먹거나 경계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셋이서 화기애애하게 지내고 있었나 보네.’
“나가는 방법을 몰라서 조금 당황했지만 말이야.”
채지석이 반짝이는 오류들을 둘러보며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오고 나가는 건 현하빈을 통해서만 가능했지, 들어온 인간이 스스로 나가는 건 스킬이 없어서 힘든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선배님은 잘 들락거렸잖아?”
글리치는 여기 있다가 알아서 짠 하고 등장했던 것 같은데. 레몬이 그에 대해 설명했다.
“그분은 마신이었으니까요. 오류와 관련된 스킬이 있다 보니 저량 힘을 합쳐서 어찌저찌…….”
말을 하던 레몬은 채남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줄였다. 마침 채지세는 그들과 함께 떨어진 종말교의 장부들을 마저 살피던 중이었다.
“아, 하빈아! 이리 와서 이거 좀 볼래? 마침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좀 알아낸 게 있거든?”
“오? 더 알아낸 게 있어?”
하빈이 눈을 빛내며 총총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냥 코딩 관련된 내용 정도만 알아낸 줄 알았는데, 그것 외에도 얻어낸 정보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세가 말을 이었다.
“응.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이 아이템의 양이 너무 적어서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잖아? 그래서 나머지 아이템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봤지.”
“오, 좋은 생각인데?”
채지석의 추적 스킬과 채지세의 예지 스킬을 결합하면 이런 추적쯤이야 쉬울지도.
“다만.”
그때 채지석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는 조금 곤란하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디 있는지 대략적인 위치는 잡히는데, 거기가 좀 곤란한 곳이라.”
“곤란한 곳?”
“킬스크린이야.”
킬스크린?
“그게 왜 곤란한 곳인데?”
정말 모르겠단 얼굴로 묻는 현하빈.
‘하긴, 현하빈에겐 킬스크린은 별로 위험한 곳이 아닐지도.’
킬스크린 26층을 간단히 깨 버리고, 50층을 아무렇지 않게 평정한 현하빈이다. 차라리 동네 마트에서 먹고 싶은 거 딱 하나만 사 오라는 일을 훨씬 곤란스러워할 그녀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가혹한 짓을! 차라리 날 굶겨! 채씨는 내 혀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하고 길길이 날뛸 현하빈을 상상하며, 채지석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뭐야, 왜 갑자기 도리도리질이야, 채씨?”
“…….”
역시 괜한 걱정을 한 걸까.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낀 채지석. 그가 이어 말했다.
“아, 곤란한 곳이란 말은 취소. 하지만 이건 다른 킬스크린과는 다르게 무척 고층에 있거든.”
“고층?”
“응.”
곤란까진 아니더라도 까다로울 순 있다.
현하빈이 아무 오류나 들락거릴 수 있다지만 아직 이공간 진입의 스킬이 낮아서 고층으로 갈수록 관리자의 눈에 띌 가능성이 커진다. 스킬 설명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말이다.
“몇 층까지인데? 60층? 그 정도면 일도 아닌…….”
“아니, 그 정도가 아니야.”
“그럼? 한 70층? 그 정도도 괜찮은데.”
“……70층도 아냐.”
지석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97층이야.”
“……!”
[……!!]
97층.
예상하는 어떤 것보다도 더 높은 숫자였다. 들어간다면 확실하게 관리자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을 듯한!
“음, 정말 거기뿐이야? 다른 데도 좀 나누어져 있다거나. 조각조각 분산되어 있다거나. 그런 건 없어?”
“우리가 찾은 장소는 97층 한군데뿐이야. 어쩌면 이 ‘별의 서’란 아이템 자체가 97층에서 떨어져 나온 건지도 모르겠어. 자세한 건 직접 가 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렇구나.”
평소답지 않게 굳은 표정을 한 현하빈. 그 모습을 본 레몬이 물었다.
“뭐가 문제예요? 하빈 님은 어디든 가실 수 있던 게 아니었어요?”
“97층은 관리자가 눈에 불을 켜고 있대.”
분명 고층은 ‘진입 시 관리자가 이상을 감지합니다’라는 알림이 떴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 상황을 설명하자 레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표정의 레몬이 덧붙였다.
“저는 스킬이 하빈 님보다 더 낮은 것 같은데, 그래서 전 다른 오류를 지나다닐 때도 관리자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하거든요?”
관리자의 눈을 피해 겨우 들어왔다던 레몬. 그 또한 그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낀 전적이 있는 모양.
그러나 레몬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표정에 가까운 그가 말을 이었다.
“저, 그런데 만약 그게 문제라면 지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왜? 이왕 들킬 거 한 시라도 빨리 들키자고?”
레몬이 그렇게 안 봤는데 하빈을 골탕 먹여 보려는 건가?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자 레몬이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에, 에이. 제가 설마 하빈 님께 해가 될 말을 하겠어요? 지금이 딱 적기라서 그래요. 제가 눈치 봐서 가끔씩 밖으로 나간다고 했었죠?”
“그랬지?”
관리자의 감시를 피해서 가끔 주기적으로 이공간 밖에 나가 세상의 맛있는 것들도 좀 먹고 바깥의 삶을 경험한 다음 돌아오는 레몬.
“제가 관리자의 눈을 피하는 나름의 방법이 있어요. 바로 ‘시스템 점검’ 때 나가는 거예요.”
“……!”
“점검 기간에는 관리자가 거기 신경을 쓰느라 누가 오류를 들락거리는지 일일이 신경을 못 쓰는 것 같더라고요?”
“오! 그렇다면!”
하빈은 마침 그들 앞에 여전히 떠 있는 붉은 창을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관리자가 ‘비상 점검 모드’를 발동시킵니다.]
[시스템 전체가 비상 점검 모드로 돌입합니다.]
지금도, 비상 점검 모드가 발동된 상황.
“그럼 관리자도 여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겠네?”
“제 말이 그 말이죠!”
97층에 몰래 들어갔다 나오려면,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