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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88) (188/268)

188. De:b\_gging (1)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한편, 하빈의 기숙사 방. 하빈과 채남매는 ‘별의 서’의 낱장을 두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세가 입을 열었다.

“응, 스킬에 의존할 수 없다면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써야겠지.”

채지석의 ‘꿰뚫는 눈’으로 어렵다면 지구상의 모든 스킬을 동원해도 어렵다.

“하지만 인간은 스킬만 쓰는 동물이 아니잖아? 애초에 게이트 사태가 터지기 전에도 사람들은 열심히 암호해독을 했다고. 암호학 같은 학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패턴을 나름대로 분석하다 보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니! 그럼 우리 빨리 해석해 보자!”

신이 나서 채지세를 조르는 하빈. 그 모습에 지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해석해 주면, 우리 솔라리스 들어올래, 하빈아?”

“……에이, 너무하네.”

이 와중에 틈새 영업이라니. 하빈이 실망이란 눈빛을 할 때였다. 지세가 말을 이었다.

“후후, 장난이야. 그리고 사실 내가 해석한다고 말은 했지만, 솔직히 이 정도로는 모두 해석하긴 어렵지.”

표본의 양이 너무 적다. 물론 지세의 예지 스킬이라거나 가지고 있는 슈퍼컴퓨터, AI 등등 온갖 기술까지 더한다면 희망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한계는 있겠지만…….”

말끝을 흐린 채지세가 다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별 도움이 안 되는 정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태에서도 감이 오는 게 하나 있어.”

“오, 뭔데?”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뭔가 알아낸 게 있냐며 귀를 가져다 댑니다!]

“아,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성좌님. 제가 느낀 건……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언어’ 느낌이 아니라는 거예요.”

“일반적인 언어 느낌이 아니라니?”

지석이 반문했다. 물론 통역 아이템으로 해독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 종류는 아닐 듯하다.

“그렇지. 나도 통역 아이템이 안 먹히는 거랑 여기 표시된 일정한 기호들을 보고 느낀 건데, 이거 아마도…….”

인상을 찡그린 채지세가 마침내 두 단어를 덧붙였다.

“코딩 언어?”

“뭐?”

“코딩 언어 같은 느낌 들지 않아?”

“…….”

한때 법조계 꿈나무, 문과 출신 채지석과 현하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채지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

“뭐…… 하긴 누나가 컴공을 복전하긴 했지.”

전공자가 보기엔 그렇게 보이나? 확실히 코딩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보기엔 ‘언어’를 그런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너 패치는 왜 그런 걸 보관하고 있었던 거지?”

“음…… 마이너 패치 쪽 서버랑 관계된 건가?”

채남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은 이게 마이너 패치 측에서 나왔다는 점을 토대로 그쪽 서버나 그쪽 시스템을 먼저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하빈은.

‘겨우 그 정도 일이라면 편지에서 중요한 물건이라고 했을 리가 없는데…….’

그 편지를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일단 제쳐 두고 말이다.

하빈은 채지석이 살펴봤다던 아이템 설명을 떠올렸다.

‘구성된 법칙을 담은 기록.’

주어가 생략되어 있으니 아무거나 들어가도 말이 된다. 이를테면.

“……시스템이 구성된 법칙을 담은 기록?”

“……!”

갑자기 뱉어진 하빈의 말에 채남매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빈은 덤덤한 말투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니면. 세계가 구성된 법칙을 담은 기록?”

어느 쪽이든 말은 되네.

* * *

한편, 바로 그 시각.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차량 한 대가 있었으니.

“하빈 양이 다니는 학교가 여기인가.”

“네. 우선 학교의 모든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면 너무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하빈 양의 담임선생님에게만 방금 연락을 취했습니다.”

“수고했네.”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은 바로 컨티뉴의 수장 코니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기자들이 거의 없군요. 하빈 양이 이미 학교로 들어가 버려서 포기한 모양입니다.”

기숙사 제도가 마련된 울림국제고다. 하빈이 계속 기숙사 안에 죽치고 있다면 학교 밖으로 다시 나올 일이 없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사람을 몇 달이고 기다리는 건 무리라 판단했는지 오후가 되자 기자들은 꽤 많이 철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니는 나름의 방비를 했다. 눈에 띄지 않는 차량을 구매했고, 지금의 모습도 아이템을 사용해서 코니인 걸 알아보기 어렵게 위장을 한 상태.

별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도 뒤를 밟히지 않도록 극히 조심한 상황이었다.

“편지로 주고받는 것보다 하빈 양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낫겠지.”

코니가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쓸었다. 이틀 만에 이토록 많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하빈을 찾아온 은발의 남자부터, 순식간에 컨티뉴 대주주 연합의 인정을 받아버린 하빈까지.

‘그 의문의 남자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또 일이 터지다니.’

그녀가 보기에 하빈은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밝고 욕심 없는 해맑은 성품을 제외하고선.

“그래. 욕심 없는 성품이었던 아이니 컨티뉴 연합의 제안도 그 자리에서 바로 승낙하지 않았던 거겠지.”

코니의 사소한 이벤트-코니는 경호원들과 선물 공세를 보낸 것쯤은 작고 사소한 것이라 여겼다-조차도 부담스럽다고 거절했던 아이였으니.

“지금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코니는 뒤늦게 컨티뉴 연합 측에서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를 듣기보다 원망을 전해 들은 것에 가까웠지만.

‘코니 님! 어떻게 그런 천재를 혼자만 아시고 꼭꼭 숨겨 두실 수가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하시죠! 저희 몰래 하빈 양이랑 대단한 아이템을 단둘이서만 개발하시려고 그러셨던 거죠!’

‘너무하십니다! 그동안 저희를 믿는 줄 알았는데.’

코니로서는 정말 영문 모를 내용의 원망들. 컨티뉴 측에서는 당연히 제작계 천재 헌터인 현하빈을 코니가 먼저 알아보고 선점한 뒤 서로 기술을 공유하는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애가 대체 뭘 했다고 그러는가?’

‘이제 와 발뺌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다 봤습니다! 하빈 양이 제조한 독이 무려 코니 님의 특수 공병을 녹여 버리는 것을요!’

‘……!’

코니로서는 기함할 내용이었다.

‘그 공병을 녹였다고?’

오랜 시간 공들여 제조한 것도 아니다. 그저 즉석에서 스킬로 독 제조를 했을 뿐인데 그걸로 특수 공병을 녹여?

“대체 어떻게…….”

처음에는 컨티뉴 연합에서 거짓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연합의 전원이 입을 맞춰 짰을 리는 더더욱 없었고.

혹여나 공병이 바꿔치기 되었거나 하는 가능성까지도 고려했으나 그런 것이었다면 연합 측에서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만일 그게 진실이라면…….”

코니의 낯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동안은 하빈 양에게 손님과 제작자로서, 그리고 펜팔로서 부담을 주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리고 현하빈이 부담스러운 제안을 몹시 싫어하는 성정인 걸 알고 있지만.

“혹시, 이제 와 후계자 자리 제안하면…… 안 받아주겠지?”

“안 받아주실 것 같은데요.”

당연한 걸 묻는 거 아니냐는 듯 비서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 * *

“‘피데스’ 맞잖아.”

“…….”

현시우와 글리치의 대치. 시우의 대답이 없자 글리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혹시 이름이 틀렸나? 다들 그렇게 불렀는데 기억이 안 나서. 후배님은 ‘가면마법사’라고 부르던데.”

‘…….’

[야, 야야, 어떡해? 이번엔 찐인데? 진짜로 들켰다, 들켰나 보다!]

현시우는 천천히 네아이바를 내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글리치가 뒤이은 공격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침착하자.’

그는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눈앞에 뜨는 알림창.

[경고. 세계의 비밀과 연관된 정보, 혹은 관리자가 찾고 있는 정보를 발설할 위험이 있습니다. 전달 시 관리자에게 패널티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번엔 웬일로 알림창이 꽤나 상세한 정보를 주고 있었다. 게다가 현시우에게 꽤 도움이 되는 내용.

‘시스템은 무조건 관리자 편만 들 줄 알았는데.’

‘관리자에게 패널티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표현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편도 아닌, 그저 정해진 값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걸지도.

하긴 관리자가 세상의 모든 시스템 알림을 다 확인할 수 있는 존재였으면 이미 그들도 벌써 끝장났을 것이다.

어쨌든 현시우는 상념을 뒤로하고 알림창을 해석해 보았다.

‘세계의 비밀과 연관된 정보’는 아마 ‘회귀’와 관련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관리자가 찾고 있는 정보’가 바로 현시우의 정체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로 알림을 띄우는 걸 보아하니 관리자가 그동안 현시우에게 당한 게 워낙 많았던 모양.

현시우의 정체를 알면, 마이너 패치에게 알려줄 요량으로 현시우를 찾고 있는 걸지도.

“왜 대답이 없지?”

인내심이 바닥난 듯 글리치가 현시우를 추궁했다. 현시우는 글리치의 기색을 살폈다. 저건 떠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확정을 한 상태로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거기에 맞춰 줄 필요는 없다.

“저야말로 궁금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허, 이 와중에도 발뺌하겠다는 건가?”

“게다가 다짜고짜 공격은 왜 하신 겁니까?”

현시우가 만약 피데스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다. 약간의 원망을 담아 노려보는 눈빛에 글리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공격 전까지는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은 했는데, 공격해 보니까 확실해져서.”

“제가 평범한 비각성자였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텐데도요?”

아니, 각성자였다 해도 피데스가 아니었으면 죽었다.

[현하빈도 있지.]

‘걔는 원래 논외잖아요?’

마침 글리치가 대답했다.

“어쨌든 맞았으니 된 거 아닌가?”

“…….”

현시우는 글리치의 반응을 살폈지만 정확한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저쪽은 어쩌면 정말로, 현시우가 죽든 말든 상관없이 확인을 위해 공격했을지 모른다. 마신에게 그 정도 위험 감수는 위험도 아닌 모양이지.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이 공격을 받아낸 것부터가 현시우 스스로 피데스임을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피데스의 시그니처인 네아이바까지 꺼낸 마당에 물러설 곳은 없었다.

[잠깐, 진짜 말하게? 정말 말할 거야?]

‘다 들킨 걸 어떡합니까? 어차피 이참에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결정을 내린 현시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확신하신 그 내용이 맞습니다. 사실 제가 ‘피데스’입니다.”

바로 그 순간.

현시우에게 보이던 알림창의 내용이 바뀌었다.

[! 경고! 관리자의 관심정보 누출 징조 발견! 관리자의 탐색이 시작됩니다……정보 전달 대상 파악…….]

[!!오류 발생! 정보 입수자의 신원 ㅇdddhdkdrbf ㅇdkf tn dᅟᅡᆯ 수 없ㄴsmᅟᅳᆫ w존재 개입 확_ㅇ…….]

[관리자가 문제 파악을 위해 접속합니다.]

[De:b\_gging……ERROER!E!]

[오류를 파악하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 뒤로는 잠깐의 정적.

‘끝났나?’

현시우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다 알려진 차에 누군가에게 직접 정보를 전달하면 어느 정도의 패널티를 받는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확인해 보려 했던 건데 예상외로 잠잠했다.

‘정보 입수자의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오류라서?’

마신은 관리자도 신원 파악이 힘든 존재인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지지직거리던 알림창이 격렬하게 깜빡였다.

[지금부터 관리자가 ‘비상 점검 모드’를 발동시킵니다.]

[시스템 전체가 비상 점검 모드로 돌입합니다.]

불길할 정도의 검붉은 알림창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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