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86) (186/268)

186. 현하빈이 학교 가면 집은 누가 지키나 (1)

“어젠 분명 사이비 털러 간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채지석의 질문에 하빈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 대화를 들은 지세의 눈이 커졌다.

“사이비? 하빈이 너 사이비 털러 갔었어?”

아마 하루밖에 안 지난 내용이라 지석에게 관련 내용을 못 들은 모양. 뒤늦게 하빈이의 종말교 접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지석을 추궁했다.

“지석이 넌 그런 중요한 이야길 들었으면서 왜 나한테 전달을 안 하고?”

“들은 지 하루밖에 안 됐다니까? 게다가 하루도 안 돼서 컨티뉴 기사가 나는데 거기에 신경이 팔릴 수밖에 없었지!”

말을 하던 지석이 다시 하빈을 돌아보았다.

“아, 그래. 사이비 턴다던 애가 어쩌다 컨티뉴를 털고 왔냐?”

“음?”

하빈이 푸딩을 떠먹던 숟가락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녀는 지세가 가져온 밀크 푸딩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쫀득한 푸딩을 한 스푼 더 뜬 하빈이 입을 열었다.

“그냥 둘 다 턴 건데. 사이비 털고 오는 길에 컨티뉴에서 사람이 와서 따라갔다가…… 어쩌다 보니.”

“뭐?!”

그럼 사이비도 털고 컨티뉴도 털었다는 말이잖아?

“종말교에서 내부 고발자가 나와 뒤집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설마 그것마저 네 짓이었을 줄이야…….”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매번 뭘 털 때마다 하루 컷으로 털고 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하더니, 진짜로 하루 안에 두 개나 털고 오면 어쩌냐는 눈빛으로 당신을 쳐다봅니다.]

“나 성좌님이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봐.”

채지석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하빈을 쳐다보았다. 맨날 ‘50층 하루 컷하면 되겠지, 뭐.’, ‘사이비도 하루 컷하지, 뭐.’ 따위의 말로 넘어가던 현하빈이 진짜로 하루 만에 다 털고 왔다.

아니, 하루 만에 턴 것도 아니다. 듣자 하니 사이비는 아점 먹고 오후에 잠깐 시간 내 털었고, 돌아오자마자 저녁 식사를 하면서 컨티뉴 연합을 턴 모양.

‘쟤는 저러다 나중에 세계정복도 하루 컷으로 하는 거 아냐?’

혹시 몰라. 나중에 SPES도 단칼에 털어버리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라고 퉁칠지도.

‘……그래도 설마 피데스 님을 하루 만에 털어버리진 않겠지?’

채지석이 홀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둘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하빈이 척척 인벤토리에서 물건을 꺼냈다.

“아, 맞아! 다들 이거 봐봐. 내가 종말교 지하에서 이걸 주워왔어!”

마치 전리품을 자랑하듯 마이너 패치의 비밀 장부를 척척 바닥에 던지는 현하빈. 그걸 슬쩍 훑은 채지세의 눈이 커졌다.

“뭐? 이걸 주워……왔다고?”

이거, 아무리 봐도 마이너 패치 측 기밀 자료 같은데?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범죄 조직의 기밀 자료를 ‘주워’오다니. 그 말을 들은 지석도 뒤늦게 황당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너…… 종말교를 털었다며? 아무리 종말교와 마이너 패치가 엮였다 해도 이걸 어떻게…… 주워올 수 있어?”

마이너 패치라면 보통 방비를 해둔 게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비밀 지하실에 수많은 방호 장치가 있어서 벽을 뚫는다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 시선에도 불구하고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쉽게 들어가지던데. 걔네가 얼마나 마이너 패치랑 더럽게 엮였길래 이런 것까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꾸껠울라칸 종말교의 지하는 최첨단 방호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웬만한 SSS급 헌터도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견고한 벽. 그러나 하빈은 달걀 껍데기 깨듯 부수었기 때문에 딱히 체감하지 못한 것이었다.

“뭐야, 이거 그렇게 대단한 거야?”

“당연하지.”

채지세도 놀라는 걸 보니 이게 보통 내용은 아닌 모양. 지석 역시 어느새 하빈을 추궁하던 것을 잊고 흥미롭단 표정으로 장부를 들어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와, 그동안 SPES에서도 수사 난항을 겪었던 마약 조직에 대한 기밀들이 여기 다 있네……. 이거 익명으로 SPES에 찌르기만 해도 밀매자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겠어.”

“마약만 있는 게 아냐. 저건 비밀 실험 일지 같고 그 옆에 있는 저건 다른 비밀 지부 장소 같은데…… ”

“흠, 뭐야? 착복해 놓은 재산 같은 건 없어?”

당시 가져올 때는 빠르게 챙기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하빈. 그녀는 이제 느긋하게 앉아 그녀가 가져온 것들이 뭔지 제대로 살폈다. 덩달아 쭈그려 앉아 서류를 살피게 된 채남매는 그 장부들을 보고 귀중한 자료라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뭐야, 착복한 재산 목록은 없잖아?”

스위스 차명 계좌라던가, 비밀스럽게 금괴나 다이아몬드 보관해 놓은 곳이라던가! 그런 귀중한 정보는 왜 없는데?

“이 녀석들, 털어 봐도 100억조차 안 나오는 쓸모없는 놈들이야? 후, 차라리 컨티뉴를 동시에 턴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그냥 이대로 컨티뉴 지분 꿀꺽해? 꿀꺽해 버려? 생각해 보겠다는 의견 정정하고 바로 컨티뉴 소속 하겠다고 답변해?

예상치 못한 금전적 수익에 하빈이 낯을 찡그릴 때였다.

팔락, 하고 거칠게 서류를 넘기는 하빈의 손에 따라 아래에 깔려 있던 몇 개의 종이가 투둑, 떨어졌다.

“이건 뭐지……?”

팔락팔락 떨어지는 종이에서 나는 묘한 빛. 거기에 시선이 끌린 채지세가 장부를 보던 것도 잊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낱장으로 구성된 세 장의 종이. 그것들은 다른 장부 종이들과는 다르게 기묘한 질감을 가진 종이였다. 반투명한 것 같기도 했고 반짝반짝 빛이 나기도 하는 듯한 소재. 만져도 종이보다는 견에 가까운 매끄럽고 질긴 촉감.

“……?”

하빈도 덩달아 떨어진 종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종이를 집어 들어 내용을 살폈지만, 거기 적힌 건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언어였다.

이해할 수 없는 특수 기호의 규칙적인 나열. 그 광경에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엥, 뭐야?”

통역이 안 되잖아?

지금 통역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

그 사실을 깨달은 건 하빈뿐만이 아닌지 지세 역시 예리한 눈빛으로 종이를 살피고 있었다.

통역 아이템은 단지 전 세계의 언어를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던전 안에서 만난 낯선 존재의 언어까지도 해석해 주는 만능 아이템.

그런데 그걸 사용하고도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은.

“언어가 아니거나, 아니면 통역 아이템도 모르는 새로운 언어의 영역이거나…… 암호문의 일종일지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빈의 앞에 알림창이 떴다.

아이템, ‘<별의 서>[0.01%]’를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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