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사실 마신은 스킬이 너무 많아서 본인도 뭐 있었는지 가끔 잊어버림 (6)
“…….”
“…….”
“후배님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그, 그러게요.”
바로 그 시각. 레몬과 글리치는 이공간 안에서 하빈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잠깐 나갈 틈을 보려고 했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서 나갈 순 없을 것 같았다.
현하빈은 이목 끄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지금 이 상황에 나가면 큰일이라는 것쯤은 그들도 알았다. 글리치가 이공간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꼼짝없이 여기서 하룻밤을 묵어야겠군.”
“히익.”
레몬은 별로 좋아하는 반응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멋대로 마신을 데려다 놓다니.
다른 인간이라면 모를까 마신이다, 마신! 전설 속 마신이랑 엉겁결에 같이 지내게 되었다.
‘다른 분들이면 모를까, 이분은 좀 무섭단 말이에요…….’
하빈을 향한 원망의 말을 속으로 삼킨 레몬이 냠냠 소보로빵을 먹었다. 하빈이 격려의 의미로 두고 간 것이었다. 그나마 달달한 걸 먹으니 심신 안정은 되었다.
‘소보로빵에 넘어가면 안 되지만…….’
그래도 이런 걸 주고 간 걸 보니 도리는 아는 자일지도.
레몬이 달달 고소한 소보로빵의 풍미를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글리치는 화면을 보며 여전히 미심쩍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글리치가 보고 있는 장면은 하빈이 컨티뉴 대주주 연합에게 둘러싸인 모습이었다.
“언제는 후배님, 명문가 자제 아니라더니.”
그런 것치고 너무 자주 사람들이 따르는데? 또, 모셔 가는데?
글리치가 알기로 저런 일들을 겪는 건 대부분 명문가 자제들의 경우였다. 가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휘말리는 것 또한 귀족들의 일이었고.
상황을 파악하던 글리치는 대화 속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유전자 검사가 뭐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레몬과 글리치가 지구의 유전자 검사 시스템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손녀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검사라고 하니, 대충 어떤 건지 윤곽이 잡혔다.
‘이곳에도 친자 확인 방식이 있나 보군.’
그들의 세계에서도 간혹 몇몇 왕실의 경우 왕족 핏줄을 알아보기 위한 특수한 마법이 있다고 들었다.
‘여기도 그런 게 있나 본데…….’
사실 글리치 역시 결과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는 인내심을 발휘해서 창을 껐다. 레몬이 의아하단 목소리로 물었다.
“어, 더 안 보시고요?”
“여기부터는 후배님 사생활일 테니까.”
진짜로 명문가 자제인지 궁금하긴 했지만, 어차피 그 사실은 그에게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현하빈은 관리자가 두려워하는 오류 그 자체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계를 넘겨받은 후대 마신인데 명문가든 아니든 그게 뭐 중요한가? 해변에 모래 한 그릇을 붓느냐 마느냐 정도로 의미 없는 문제다.
“한동안 밖에 못 나간다는 것만 확인했군.”
글리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레몬에게 턱짓했다.
“그런데 남은 빵 더 있나?”
“……드실래요?”
‘더 먹고 싶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워낙 미친놈으로 유명하던 마신인데. 안 준다고 하면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모른다.
‘소문보단 좀 얌전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눈치를 보며 소심하게 스윽 소보로빵을 내미는 레몬.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 든 글리치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덩달아 눈치를 보며 한마디를 더 물었다.
“음…… 그런데 이거, 매운맛은 아니겠지?”
“넵? 아, 네.”
빠릿빠릿한 레몬의 대답. 그제야 글리치는 안도한 표정으로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 * *
한편, 그 시각.
SPES 본부.
현시우는 갑자기 날아온 속보에 귀를 의심했다.
“네? ……종말교가 털렸다고요?”
[다른 곳도 아닌 종말교가?!]
네아이바와 현시우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꾸껠울라칸 지부 종말교가 털렸다니.
문제가 있는 곳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적당한 명분도 없고 하필 꾸껠울라칸에 있는지라 쉽게 건드릴 수도 없어서 골치를 썩이던 곳.
차근차근 공략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혼자 알아서 털렸단다.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그런 현시우의 반응을 확인한 보좌관이 눈치를 보았다.
“네……. 혹시 피데스 님은 아는 게 없으십니까? 오늘 저녁부터 갑작스럽게 꾸껠울라칸 지부의 종말교 인원들이 내부 고발을 시작했다던데요.”
갑자기 종말교를 탈퇴한 인원들이 생겼다. 한술 더 떠, 그들 중 일부는 ‘종말교와 마이너 패치가 관련이 있다더라’며 폭로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대체 왜…….”
현시우는 낯을 굳혔다. 1회차 때는 신도들의 믿음이 굳건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라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보이던 종말교였다. 신도들이 아는 정보도 극히 적었고 말이다.
마이너 패치와 관련 있을 거란 심증은 있어도 물증과 증언이 없어 쉽사리 손대지 못한 곳이었는데.
“그들이…… 자진해서 그런 증언을 했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현시우의 반응에 보좌관은 재깍 대답했다.
“네! 덕분에 국제 수사기관들이 자진해서 수사 의향을 밝혀 줬다고 합니다. 다른 종말교 지파들도 꾸껠울라칸 지부와 등을 돌렸고요.”
신이 난 보좌관들이 앞을 다투어 의견을 덧붙였다.
“이건 기회입니다, 피데스 님!”
“맞습니다! 이번 기회라면 정치적이나 종교적 문제 없이 어느 정도는 수사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수사 협조문을 보내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허락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수사에는 찬성합니다만.”
물증도 명분도 없어서 털지 못했는데 이렇게 나와준다면야, 당연히 땡큐다. 하지만 현시우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내가 알던 미래대로 가지 않고…….’
역사가 바뀌었다. 다른 것도 아닌 종말교의 몰락이라니. 이건 한두 가지의 변수로는 성립이 안 된다. 그것도 내부 고발자까지 만들어내는 침투력과 치밀함은…….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현하빈이 있잖아?]
‘그렇지만 걔는 지금 컨티뉴 대주주 연합에게 붙잡혀 갔다는데요?’
굳이 꼽자면 현하빈이긴 하지만, 현시우는 곧바로 현하빈을 떠올리진 못했다. 왜냐하면 30분 전에 이미 정보원에게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저번에 말씀하신 표적, 현하빈이 컨티뉴의 후계자 싸움에 휘말렸다고 합니다! 역시 코니 님의 손녀가 분명합니다!’
“…….”
[…….]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후계자냐 아니냐 하면서 끌려가던 애가, 설마 그사이에 종말교를 털었을 리는 없겠지?
[그러게 말이다. 걔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아무래도 시간상으로 불가능하죠?’
비는 시간이 전혀 없다. 어제만 해도 마신을 집에 초대해서 놀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채지석이랑 아점 먹었다던데.
‘그럼 오늘 오후에 잠깐 나갔다 온 것밖에 없는데. 그게 되나?’
[그게 아니라면 예전부터 미리 차곡차곡 준비했다는 의미일 텐데.]
‘그런…… 낌새는 없었죠.’
오랜 기간 준비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꼬리가 밟히기 마련. 현하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현시우가 그 단서를 놓쳤을 리가 없다.
‘휴우, 그럼 일단 현하빈 쪽은 아닌 걸로 가정하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야겠군요.’
생각을 갈무리한 현시우는 보좌관들을 내보냈다. 꾸께울라칸에 대한 협조 요청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으니 아무리 빨라도 내일 방문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지금은 현하빈 쪽의 상황이나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현하빈이 컨티뉴의 후계자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어쩌다가 컨티뉴의 후계자 싸움에 현하빈이 나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뜩이나 회귀 전에는 코니와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현하빈이었으니.
마침 그의 의문을 잡아챈 정보원이 착실하게 대답했다.
“넵, 제가 좀 더 조사를 해봤는데 말이죠. 코니 님의 숨겨진 손녀라는 설이 컨티뉴 대주주 연합에서 돌고 있다고 합니다. 속보에 따르면 무려 유전자 검사까지 의뢰했다고……!”
“예?”
유전자 검사요? 코니 님이랑요?
현시우의 표정이 괴상해졌지만 정보원은 그치지 않고 신이 나서 떠들었다.
“유전자 검사를 할 정도면 역시 뭐가 있는 게 확실하지 않습니까! 제 반평생 정보원 경력을 걸고, 숨겨진 손녀가 맞는다고 봅니다.”
[? 진짜 손녀냐? 그럼 너랑은 관계가 어떻게 되는 거지?]
그 강렬한 확신에 네아이바도 놀란 모양이었다.
[만일 저 말이 맞는다면, 너와 코니의 관계 역시…….]
‘저랑 관계가 왜요?’
[그럼 너도 코니의 손자 아냐?!]
현하빈이 코니의 손녀면, 그 남매인 현시우 역시 코니의 손자일 가능성이 유력!
그러나 현시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게이트 사태 전엔 추석이랑 설날 때 꼬박꼬박 친가 외가 오가면서 저희 할머니들 뵈었었는데요? 그중에 코니 님 없었거든요?’
그러나 네아이바는 심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네가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을 수도 있지.]
‘……!’
잠깐 멈칫했던 현시우. 그러나 그는 이내 티벳여우처럼 짜게 식은 얼굴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진짜 아님.’
아무리 그래도 친할머니를 못 알아볼까. 그리고 똑 닮은 현시우와 현하빈은 아무리 봐도 친남매가 맞았다. 현하빈이 입양아일 가능성도 없는 상황.
유전자 검사 그거 해봤자 아니라고 나오겠지, 뭐. 현시우는 가볍게 생각하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 그러나 정보원의 말이 한발 빨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피데스 님.”
“네?”
“만일 현하빈이 진짜 손녀라고 해도 걸리는 점이 하나 있는데 말이죠.”
“……그게 뭡니까?”
혹시 정보원이 현시우가 놓친 점을 파악했는지도 모른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한껏 낮아진 목소리에 현시우는 귀를 기울였다. 정보원은 영업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듯 심각하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현하빈에게…… 현시우라는 오빠가 있더군요.”
“…….”
“그럼 그 오빠 역시 코니 님의 손자……! 거물이 분명합니다! 조사해야 할까요?”
“쿨럭.”
현시우는 그만 사레가 들려서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 * *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손녀 아니라고!”
“……커업.”
“역시 아니라고 떴죠?”
“그, 그게.”
그랬다. 결국 유전자 검사 결과 하빈은 코니의 손녀가 아니라고 나왔다!
막상 그 결과를 받게 된 대주주 연합은 하빈의 눈치를 살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손녀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 그 대화를 엿들은 하빈이 의기양양한 낯으로 끼어들어 쐐기를 박았다.
“네에! 아닙니다. 저 코니 님이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라고요. 애초에 척 보면 안 닮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유전자 검사지를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다시 살폈다. 사실 처음 하빈이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을 때만 해도 꼼꼼하게 검증을 하던 그들이었다.
‘이 정도만 주셔서는 어림없죠. 머리를 뿌리까지 뽑아서 주셔야 합니다.’
‘혹시 칫솔은 없으신가요?’
‘아예 피를 좀 뽑아 주시면…….’
‘아니, 이사람들이?! 저한테 유전자 맡겨 두셨어요? 원하시는 게 왜 이렇게 많아요?!’
하빈이 가짜 머리카락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설, 가짜 피를 만들어 줬을지 모른다는 설과 체액도 다른 물질로 위장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설.
‘에엥, 여긴 죄다 의심병 걸리신 분들만 모였나?’
수도 없이 많은 의심과 가설에 하빈은 골치가 아팠더랬다.
“해달라는 거 다 해드렸는데도 왜 이렇게 못 믿으실까, 흠흠.”
하빈이 불편하단 낯으로 팔짱을 끼었다. 그러나 컨티뉴 대주주 연합은 이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하빈을 더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보았다.
‘저 태연한 태도를 봐. 역시 우리의 반응까지 다 예상했다는 듯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유전자 검사에 장난을 친 걸까요?’
‘아니, 저게 진짜 검사 결과라 해도 상관없어.’
그들의 우두머리인 앨빈은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피가 섞여야만 손녀인 건 아니니.”
애초에 피가 섞인 손녀라 했어도 뛰어난 제작계 스킬을 가지지 않으면 공방을 물려받을 수 없을 테니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없이 데려온 수제자였을 가능성. 그걸 가장 우려했던 것이다.
제작계 스킬을 가진 실력자. 양손녀나 다름없이 아끼는 수제자.
그런 존재라면, 그게 더 큰 문제다. 앨빈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럼 딱 한 가지만 더 여쭤보고 보내주도록 하지.”
“뭐? 대체 언제까지…….”
인내심이 바닥난 하빈이 받아치려는 순간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그들 무리 중 한 사람이 먼저 소리쳤다. 대주주 연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이었다.
‘오, 저 사람은?’
하빈이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는 얼굴 중 하나였다. 처음 하빈을 데려올 때도 ‘이런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고? 역시 나는 인정 못 해’라며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던 사람.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잔뜩 불만이 어린 표정이었다.
“빌리, 마음은 알지만 진정하게.”
“아뇨, 저는 저 녀석 인정 못 합니다. 거기다 피도 안 섞였다면서요? 굳이 우리가 관심 둘 이유가 있습니까?”
“코니 님이 아끼신다지 않나.”
“코니 님이 잘못 보셨겠죠!”
“허?”
대놓고 코니를 비난하는 말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스쳤다. 하빈 역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빌리는 대놓고 하빈을 향해 손까지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 제작계 스킬은 갖고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야 할 거 아닌가요? 보니까 한국에서도 하나도 안 유명하던데 웬 어중이떠중이를 데리고 와서는……!”
“제작계 스킬은 있는데.”
“……!”
‘아차.’
실수를 깨달은 하빈은 뒤늦게 시선을 피했다.
‘앗, 어그로를 끌 생각은 없었는데, 저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네.’
[진짜 있느냐?]
‘음…….’
하빈은 마신이 가르쳐 준 스킬창을 보며 눈을 굴렸다.
‘있기는…… 있지.’
아직 한 번도 안 써봤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