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사실 마신은 스킬이 너무 많아서 본인도 뭐 있었는지 가끔 잊어버림 (5)
한편. 현하빈에 의해 탈탈 털려 버린 종말교 건물. 그중에서도 에라타는 밤이 되어서야 그곳에 도착했다.
“……뭐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부랴부랴 도착한 에라타는 황망한 낯으로 건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제나 철창과 담장으로 꽁꽁 둘러싸여 아무도 못 나가게 했던 종말교가 지금은 활짝 열린 채 신도들을 내보내고 있다.
에라타가 이렇게 급하게 찾아온 것 또한 종말교에서 갑자기 우루루 신도들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온 것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헼께록이 배신이라도 했나 싶었다.
‘교주님이 직접 나가라고 하셨는데요?’
나오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교주에게 허락을 받았느니 뭐니 교주가 교리를 바꾸었다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해서 정말로 헼께록이 직접 미친 짓을 했나 싶었지.
하지만.
“으, 으르트, 느! 쁘르, 슬르……즈스으…….(에, 에라타 님! 빨리 살려 주세요)”
“허?”
감금실에 감금되어 처박혀 있는 헼께록. 그 모습을 확인한 에라타의 낯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원래라면 에라타가 직접 움직이는 일은 드물었다. 범죄 조직 마이너 패치의 수장. 거의 모든 국가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그녀로서는 아무 곳으로든 쉽게 이동할 수는 없으니.
그러나 이번에 직접 찾아온 건 꾸껠울라칸의 종말교 건물이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이너 패치의 중요한 정보들이 담긴 아이템들이 이 건물 지하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니 평소에도 에라타는 언제나 이 지부를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직접 와서 관리했고.
그런데. 이번에 무려 시키지도 않았는데 종말교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서 누구보다 빠르게, 재빠르게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만에 하나 헼께록이 변절하거나 딴마음을 품어 지하실의 비밀이 유출되었기라도 하면 상당히 곤란해지기에.
그리고 이곳에 직접 왕림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곳이 무법지이기 때문이지.’
꾸껠울라칸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범죄에 손을 놓고 있었다. 아니, 손을 놓은 정도가 아니다. 꾸껠울라칸의 정부는 몰래몰래 마이너 패치와 손을 잡고 꽤 많은 돈을 꿀꺽했다. 에라타는 이곳에서 활동해도 쉽게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놓고 이곳에 나타날 마음을 먹은 것이었다.
‘설사 내가 나타난 걸 알아도 SPES에서 쫓아오면 한발 늦을걸.’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SPES는 꾸껠울라칸의 일이라면 빠른 대응을 할 수 없다. 아무리 전 세계에서 지지하는 조직이라 해도, 이 나라 정부가 허가해 주지 않는 수사를 감행한다면 국제적인 문제가 되니까.
‘……그러니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SPES가 도착하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해.’
SPES가 국제적인 공조를 요청하기 전에, 꾸껠울라칸 정부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에라타가 먼저 이곳에 와서 증거물을 챙겨야 한다.
“일단 저놈 입부터 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라 해.”
다급히 떨어진 에라타의 명령에 그녀를 따른 조직원들이 헼께록에게 다가가 재갈과 수갑을 풀었다. 헼께록은 창백한 낯으로 소리쳤다.
“저, 저는 당했어요!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변명 필요 없으니 설명이나 하라고.”
에라타가 살벌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에라타 역시 오는 길에 이야기를 들었다. 교주가 여러 명이어서 가짜 교주를 가둬 놨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설치해 둔 카메라와 기록 아이템을 살폈지만 제대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에라타 님, 건물 내에 있는 CCTV 회로가 모두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하. 일단 메모리 추출해서 세 번째에게 보내.’
그 녀석은 손상된 파일도 모두 복구해 낼 수 있는 스킬을 가졌으니까.
전자기기나 인터넷과 관련된 기술에 특화된 게 세 번째였다.
‘어쨌든 그 녀석이 알아내기 전까지는 진상을 파악할 방법이 이 녀석밖에 없어.’
에라타는 눈앞의 헼께록을 보고 재차 물었다.
“교주가 여러 명이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놈들이 저로 위장을 해서 신도들을 선동했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
푹 고개를 수그린 헼께록. 당당했던 교주로서의 모습은 어디 가고, 헼께록은 창백한 낯으로 떨고 있었다.
‘큰일 났다.’
이렇게 된 이상 지하실이 털렸다는 걸 에라타가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
원래 교주 짓 하면서 한탕 하고 마이너 패치랑 잘 끝내려고 했던 헼께록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헼께록은 이렇게 된 이상 마이너 패치의 탓을 하기로 했다.
“솔직히! 이건 그쪽 문제입니다! 정화의 불! 그 아이템이 문제였던 거라고요!”
“……정화의 불?”
에라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화의 불은 마이너 패치 측에서도 특별히 투자한 아이템이다.
오직 ‘헼께록’만이 불을 붙일 수 있는 화로.
“정화의 불이 왜…… 아!”
에라타는 곧 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았다. 헼께록은 분명 교주를 사칭한 놈들이 잠입해서 일을 이렇게 만들었다 했다.
“그렇네? 정화의 불이 있었다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정화의 불에 불을 피우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짜 교주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에라타의 눈빛이 날카롭게 헼께록을 찔렀다.
“네가 무능하단 걸 한 번 더 설명하는 건가? 대체 그게 있었는데도 왜 당한 거야?”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요! 정화의 불이 오작동했단 말입니다!”
“오작동……? 그럴 리가.”
“나 말고 가짜 교주한테 더 큰 불을 피웠다고!”
“거짓말로 넘어가 보려는 심산인가 본데 그런 건 안 통…….”
“아! 진짜라고!”
헼께록이 속이 터진단 표정으로 가슴을 쾅쾅 쳤다. 그는 비굴하게 존대를 하던 것도 잊고 소리쳤다.
“다른 놈들 붙잡고 물어보던가! 가짜 교주가 더 큰 불 피워서 그쪽으로 홀랑 넘어간 거니까!”
더 큰 불?
그 말에 차가웠던 에라타의 표정도 조금 당황한 듯 풀렸다.
“더 큰 불이라니? 네 말은, 너도 그 녀석도 둘 다 불을 피웠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 당신들이 잘못 만든 거라니까!”
“…….”
그 말에 에라타의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수가 없는데…….”
책임을 회피하려고 뱉은 소리가 아니었다. ‘정화의 불’은 다른 아이템과 달랐으니까.
무려 관리자의 치트를 써서 만든 물건. 문제가 생겼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코드를 잘못 짜서 오류가 생긴 거거나.
혹은.
‘상대가 오류 그 자체거나!’
잔잔한 충격을 받은 듯 굳어 있던 에라타.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심복을 돌아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거, 거기 너! 빨리 정화의 불을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에라타는 심복이 건네준 정화의 불을 천천히 살폈다. 혹여나 다른 아이템으로 바꿔치기 당했거나 아이템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아이템에는…… 문제가 없어.’
그럼 결론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가늘게 눈을 뜬 에라타가 헼께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너, 다시 말해봐. 널 사칭한 놈들이 어땠다고? 너랑 구별 안 될 정도로 완전히 똑같았단 말이지?”
“……네! 거울로 비춘 듯 흠잡을 데 없는 스킬이었죠.”
“그럼…….”
에라타는 여전히 굳은 낯으로 정화의 불을 쓸었다. 그녀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상대방을 완벽하게 베낄 수 있는 능력, 거기다 아이템의 설정 자체를 무시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에라타가 중얼거렸다.
“……찾았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에라타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다.
‘관리자가 그토록 찾던 ‘기만의 수호자’!’
“이렇게 제 발로 나타나 종말교를 휘젓고 갈 줄이야.”
에라타는 흥분한 목소리로 심복에게 외쳤다.
“당장 세 번째에게 연락해서 데이터 다 복구하라고 해. 다른 업무들보다 우선순위로!”
“저, 안 그래도 일이 많으실 텐데, 우선순위로요?”
“그래.”
드디어 찾은 단서다. 관리자와 사도들이 그토록 찾아 헤맨 기만의 수호자. 남겨진 데이터를 싹 다 긁어내어서라도 찾아야만 한다. 에라타의 입가에 천천히 비뚤어진 미소가 걸렸다.
* * *
“저기요, 혹시 여기 호텔 네풀릭스 돼요?”
“…….”
그 시각. 현하빈은 컨티뉴 대주주 연합이 제공해 준 스위트룸에서 한창 웹소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오로지 폰 화면에만 시선 고정.
그 모습을 보고 컨티뉴의 대주주 연합과 주변 비서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도 태연한 태도라니. 역시 코니 님의 손녀,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이 확실하다!’
지금 모여든 사람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제작계 랭커들. 물론 그들의 소개를 듣고서도 하빈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엥? 그럼 저 집엔 언제 갈 수 있어요? 이제 보내줘도 되잖아요.”
“당장 집에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나?”
‘저렇게 바쁘게 굴다니. 찔리는 점이나 숨겨진 업무라도 맡고 있나?’
얼마나 어렵게 모셔온 분인데 이렇게 보낼 순 없었다. 유전자 검사하라며 머리카락만 던져주고 쏙 내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빈의 이유는 뜻밖이었다.
“당연하죠. 저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요?”
“……네?”
“학교……요?”
떨떠름한 반응에 하빈은 인상을 구겼다.
“아니, 이분들이? 지금 한국에서 고등학생을 학교에 못 가게 하는 게 얼마나 큰 실례인 건지 아세요?!”
“그, 그건…….”
“수능 날 되면 비행기도 못 뜨는 게 이 나라야!”
“지, 진정하시죠.”
“알겠습니다. 일단 내일 아침엔 학교까지 모셔다드릴 테니…….”
비로소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아헤자르가 조용히 지적했다.
[그런데 넌 원래 학교를 안 가지 않았느냐? 애초에 현장학습 확인서까지 받아 가며 꾸껠울라칸에 다녀온 거…….]
‘쉿, 잘잘아. 원래 학교란 곳은 가라고 하면 가기 싫고 가지 말라고 하면 가고 싶은 곳이란다!’
그것도 울림국제고처럼 급식도 잘 나오고 교양 수업도 꿀잼인 곳은 말이지.
지각을 하더라도 슬렁슬렁 학교 가서 급식 맛있게 먹고, 심어 놓은 사과나무 점검하고, 해먹에 누워서 소설 보며 낮잠 자고.
‘벌써부터 학교가 그리워지는걸?’
“꽤……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시나 봅니다.”
그런 하빈의 반응에 컨티뉴의 사람들은 감탄을 흘렸다.
성실성은 제작계 헌터의 필수사항이다.
물론 이게 빨리 돌아가기 위한 하빈의 변명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진심이다.’
진짜로 학교 가야 하니 빨리 보내달라고 하는 건가.
‘저 정도 위치면 학교 정도야 빠져도 아무 지장이 없을 텐데, 꽤 열심이군.’
‘저런 면모 때문에 코니 님이 좋아하셨나 봅니다.’
제멋대로 수군거리는 사람들. 그 사이로 하빈은 해맑게 손을 들었다.
“앗, 그리고 여기 룸서비스 더 시켜주실 수 있죠? 제가 밤이 되면 야식 없이는 못 견뎌서요!”
“그, 그렇군요. 일단 데려온 건 저희니 원하시는 만큼 주문 주세요.”
“우와, 그럼 사양 않고 시키겠습니다!”
‘오, 이게 웬 떡이야? 이참에 맛있는 거나 잔뜩 먹어야지!’
하빈은 신이 난 얼굴로 호텔 룸서비스 메뉴를 쭉 훑었다.
“토시살 스테이크랑, 대게찜이랑…… 맥주 하나 하구요, 어? 이건 뭐지? 여기 파스타도 돼요?”
“다, 다 드실 수 있으십니까?”
“물론이죠!”
‘다 먹어보고 남은 건 인벤토리 담아 가야지! 헤헤.’
여기까지 데려온 건 괘씸하지만 맛있는 거 준다고 하니까 좀 이득인 것 같기도?
어느새 풀어진 표정으로 이것저것 메뉴를 고르는 현하빈. 그 모습은 주변인들에게 색다르게 비쳤다.
‘이런 와중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음식을 시키다니.’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태도입니다.’
‘역시 이런 상황에 꽤 익숙하신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모셔가는 거라던가, 고급 스위트룸에서의 태도라던가, 오자마자 제집 안방처럼 편안하게 앉아서 자연스럽게 룸서비스와 네풀릭스 찾는 여유로움까지.
사실 사람들이 모시러 오는 건 코니 할머니 때문에 단련된 거였고, 스위트룸 사용하는 건 채지세 덕분에 단련된 거였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사람들의 착각은 계속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저, 이사님.”
바로 그때, 비서 중 한 명이 종종거리며 대주주 연합의 우두머리 앨빈에게 다가왔다. 소리를 낮춘 비서가 조용히 속삭였다.
“유전자 검사 결과…… 나왔다고 합니다.”
“벌써?”
과학뿐만이 아닌 아이템을 사용해서 빠른 시간 안에 유전자 검사를 끝낼 수 있는 시스템. 덕분에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앨빈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나왔지?”
“그게…….”
비서는 곤란한 낯으로 천천히 검사 결과지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