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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80) (180/268)

180. 사실 마신은 스킬이 너무 많아서 본인도 뭐 있었는지 가끔 잊어버림 (4)

검집에서 아헤자르를 뽑아 든 현하빈. 그녀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 그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야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유전자 검사 해보세요!”

“네……?”

“뭐? 무슨…….”

예상하지 못한 듯 사람들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하빈은 재촉하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자자, 드릴 때 빨리 받으세요. 제 소중한 머리카락, 원래 아무한테나 안 주는데.”

하빈은 툴툴거리며 옆에 선 비서의 손에 착 하고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그랬다.

백문이 불여일견. 여기서 아무리 손녀니 아니니 떠들어 봤자 현대 과학의 힘을 빌리면 간단히 끝나는 문제 아닌가?

‘쉽게 끝날 일을 가지고 왜 이렇게 어렵게 돌아가는지 몰라?’

모름지기 유전자 검사는 아주 간편한 스킬이었다.

‘특히 한국 드라마에서는 필수 스킬이지.’

수틀리면 무조건 유전자 검사부터 하고 보는 게 장땡이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 ‘설마 쟤가……?’라고 생각하면 백 퍼센트 혈연이다. 출생이 불명확한 여주가 나오면 백 퍼센트 재벌집 자제다. 그 사실을 모르고 질질 끌다가 마지막에 유전자 검사를 해서 갈등이 해결되는 게 국룰.

현대 과학은 역시 최고다. 유전자 검사 없었으면 그 수많은 드라마는 성립 불가능했을지도.

드라마 덕후 하빈은 어디 한번 빨리 해보라는 듯 사람들을 여유롭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건 드라마일 뿐이고. 이건 현실이지.’

그러니 하빈과 코니가 진짜 혈육이란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단 말씀. 하빈은 자리를 탈탈 털며 일어섰다.

“그럼 이제 됐죠? 유전자 검사는 알아서 하고 결과 보시면 될 테고, 그럼 전 이제 그만 가봐도 되겠죠?”

“그, 그건…….”

하빈의 당당한 태도에 우두머리에 선 사람이 움찔할 때였다. 다른 후계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뭐, 뭐야?”

“머리카락을 준 건가?”

“진짜 머리카락 맞아?”

“바꿔치기를 했을 수도…….”

“가, 가발, 가발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순순히 머리카락을…….”

‘아니 이 사람들이?’

그 말을 듣던 하빈이 와락 인상을 찡그릴 뻔한 걸 참았다.

아니, 머리카락까지 줬는데 믿지를 않네? 대체 얼마나 의심이 많은 거야? 이 정도면 그냥 보내 줄 거라 판단했는데 하빈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내 소중한 머리카락을 주고서도 빠져나오지 못하다니!’

하빈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손꼽히는 제작계 헌터로서 수많은 아이템 감정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너무 아는 게 많다 보니 오히려 의심이 많아졌다.

‘머리카락이랑 똑같은 소재를 만들 수도 있지 않나?’

‘맞아. 난 예전에 가짜 머리카락 아이템을 제작해 본 적이 있지.’

‘이렇게 순순히 주는 걸 보니 위장용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인간들은 제작계 헌터인 동시에 각자 사업가로 이름을 떨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회사 조직 내 혈연간 암투나 사업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수많은 술수에도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업가이자 장사꾼의 면모를 가진 그들로서는 하빈의 의도를 순수하게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수군대며 혼란에 빠진 코니의 제자들을 둘러보며, 하빈은 한숨을 삼켰다.

‘에휴, 꼰대 선배를 이공간에 내버려 두고 오길 다행이다, 정말.’

다행히 글리치는 하빈이 집으로 향할 때부터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여기서 잘까 하는데.’

‘엥? 여기서? 레몬이랑 같이?’

‘그래. 이곳이 꽤 흥미로워서.’

이공간이 신기하다며 좀 더 머물러 있겠다고 해서 거기 놔두고 왔다.

‘덕분에 이 사람들에게 글리치에 대해 설명하지 않아서 편하네.’

마신의 모습을 여기저기 비추고 다녀서 좋을 게 없으니까. 혹여라도 의심을 살 수도 있고.

‘맞아. 꼰대는 성좌라서 주민등록증도 없다니까.’

불법 체류 이세계인을 감당하는 건 꽤 힘든 일이란 말이지.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알바도 못 하는 신분, 아니. 당장 맥주 한 캔도 못 사 올 거다, 분명.

[나와 별다를 게 없군!]

역시 카카페 캐시를 벌지 못해 문화상품권을 얻어 다녔던 아헤자르. 그가 동질감인지 우월감인지 모를 감탄을 흘렸다. 하빈은 재빨리 그의 판단을 정정했다.

‘아냐! 그래도 잘잘이보단 훨씬 나아! 꼰대는 네풀릭스 시청료를 줬잖아?’

하빈은 인벤토리 어딘가에 박혀 있는 보석을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만에 하나 돈이 급히 필요해지면 글리치에게 뜯어내는 게 제일 가성비가 좋을지도?

‘그나저나 코니 할머니는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나?’

분명 할머니라면 현하빈이 손녀 아니라고 이 사람들에게 말을 해줬을 분인데. 어떻게 된 거지?

* * *

“뭐? 컨티뉴의 대주주 연합? 그들이 현하빈을 데려갔다고?”

“네.”

한편, 당연히 코니 역시 지금 상황에 대해 막 전달받고 놀라던 차였다.

“……쉽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아닌데.”

컨티뉴의 주식을 보유한 대주주 연합.

최대주주는 당연히 공방의 책임자인 코니였지만 주식을 가지고 있는 게 코니만은 아니다.

그동안 컨티뉴가 성장하기까지 협력과 도움을 주었던 투자자들과 헌터들, 초창기의 제자들에게 스톡옵션을 주었기 때문이다.

코니의 지분이 70%를 넘기에 의사결정권은 모두 코니에게 있었지만, 나머지 주주들간의 연합은 존재했다. 물론 그 주주들도 대부분 코니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코니의 의견을 무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현하빈에게 찾아갔다고?

“대체 상의도 없이 그게 무슨 짓인지!”

상황을 파악한 코니가 드물게 화난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비서가 덧붙였다.

“아무래도 그들의 수장 앨빈의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가 아닐까요. 게다가 코니 님의 혈육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안 때문에…….”

앨빈은 역대 제자 중에서도 본인이 수제자라는 자부심이 강한 이였다. 언젠가 코니가 컨티뉴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그가 뒤를 계승할 거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코니도 딱히 부인한 적은 없고 말이다.

그만큼 앨빈은 훌륭한 실력을 가진 제작계 헌터였고, 과거 코니의 제자로 활동하며 보여 준 역량이 있었기에 코니 역시 그를 후계자 후보로 점찍어 두긴 했던 것이다.

“그런데 현하빈 님이 갑자기 새로운 후계자라거나 코니 님의 손녀라는 소문이 도니까 궁금해진 모양입니다.”

“내가 현하빈 양이 손녀는 아니라고 분명 이야기를 했을 텐데?”

코니 역시 주주들에게는 사실을 밝혔다. 그들에겐 몇 번이고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믿지 않았나 보군.”

“워낙 꼼꼼하고 의심이 많으신 분이셨으니까요.”

“…….”

의심.

제작계 헌터로서는 좋은 역량이다. 어떤 제작 방식이 최선인지, 더 좋은 재료는 없는지, 지금 사용하려는 재료가 정말로 합당한지.

수천 번의 검증과 의심을 거쳐 최고의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근성.

그러나.

“그 집요함이 이번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군.”

“네, 그래서 검증해 보려는 건지도 모릅니다. 현하빈 아가씨가 진짜 후계자인지, 그렇다면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지.”

“흠…….”

코니는 천천히 찻잔을 들었다.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꽤 차가 많이 식어 있었다. 코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쪽이라면 오히려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왜죠?”

의외의 반응에 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걱정하던 뉘앙스였는데. 지금은 안도에 가까운 분위기.

“내 제자들이 그리 거친 녀석들은 아니니까.”

분명 정중한 태도로 모셔갔을 것이다. 털끝 하나 상하게 했다간 코니의 분노를 살 것도 알았을 테고. 그러니 선을 지켰을 것이다.

“네, 맞습니다. 목격담에 따르면 아가씨를 극진히 모셔갔다고들 합니다.”

하빈이 들었다면 ‘극진은 무슨 극진! 그냥 집에 보내줘!’라며 어이없어 할 발언이었지만.

그 말에 코니 역시 안도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래. 그리고 아마 내 손녀가 아니라는 걸 알면 순순히 물러날 걸세.”

“……그럴까요?”

“난 내 제자들을 잘 알지.”

제작계 헌터가 가지는 집요함이란, 그 대상이 원석인지 아닌지 가려내는 목적. 그러니 원석이 아님을 파악하게 되면 알아서 물러날 것이다.

“애초에 이번 일도, 현하빈이 자신을 뛰어넘을 제작계 헌터일까 봐 걱정이 되어 달려온 것이었을 테지. 자신의 후계 자리를 위협하는 후계자일까 봐.”

코니는 혈육이라는 이유로 쉽게 회사를 넘겨줄 인물이 아니다. 그녀 못지않은 제작계 헌터여야만 컨티뉴의 명맥을 이어나갈 수 있을 테니.

그런 이유로 현하빈이 제작계 헌터만 아니라면 아무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걸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헌터로서도, 현하빈이 얼마나 뛰어난지 궁금했을 것이다. 코니는 그 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현하빈이 제작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안다면 내가 했던 말을 믿고 이제 관심을 끌 것이야.”

“그렇겠군요.”

코니의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비서는 무언가 걸린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의문을 던졌다.

“……그, 하지만 코니 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뭐지?”

“현하빈에게 제작계 스킬이 없는 건 확실합니까?”

“…….”

그랬다. 이건 모두 현하빈이 제작계와 전혀 관련 없을 거라는 걸 전제로 내린 추측.

현하빈이 제작계와 관련이 없으니 다른 제작계 헌터들이 경쟁심을 알아서 누그러뜨릴 거라는 명제다.

그건 애초에 ‘하빈이 제작계 스킬이 뛰어나지 않다’라는 전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코니는 뭐가 문제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네. 내가 알기로 하빈 양은 제작계 스킬이 없어. 듣기로 마검사 클래스라던데.”

“하긴, 그렇죠?”

마검사 클래스가 뛰어난 제작 능력을 가질 확률은 낮다.

“게다가 만약 그런 스킬이 있었다면 내게 맡기기보다 스스로 제작 스킬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스킬과 연계해서 아이템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겠나?”

간혹 제작계 헌터가 컨티뉴에 물건을 맡기는 일도 있었다. 그 경우에는 코니에게 요청하는 주문의 성향이 여타 헌터들과는 결이 다르다.

뛰어난 제작계 헌터의 경우 온전히 코니에게 맡기기보다 일부 작업은 본인이 맡기도 하고, 때로는 코니의 가르침을 원하거나 까다로운 요청을 하기도 한다.

설사 코니에게 제작 과정을 전부 맡기더라도, 제작계 헌터로서 알고 있는 지식이 많기 때문에 은연중에 대화에서 실력자임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하빈은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

제작에 대해서는 아예 모르는 듯한 초심자의 태도. 이쪽 바닥에 잔뼈가 굵은 코니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 그 애는 제작계와는 관련이 전혀 없어 보였어.”

그러니 앨빈도 곧 관심을 끄고 물러날 테지.

“……그. 그렇겠죠?”

코니의 결론에 비서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몰래 흘깃 현하빈에 대해 적힌 서류를 보았다.

‘코니 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진짜로 관련 없는 분 맞겠지?’

비록 코니를 전적으로 믿고 있지만, 그리고 코니의 안목에 대해 의심한 적은 없지만.

‘현하빈이라는 이 인물은 파면 팔수록 새로운 행보를 보여줬었는데…….’

강태서와의 의외의 친분, 거기다 코니와도 펜팔 관계를 이루어내기까지 한 예측 불가의 인물.

“음…….”

비서는 다시 서류를 옆으로 젖혔다. 비록 현하빈은 그들이 알지 못한 새로운 면을 계속 보여주는 인물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제작계 스킬이 있을 리가 없지.

비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마저 끄덕였다.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걸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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