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79) (179/268)

179. 사실 마신은 스킬이 너무 많아서 본인도 뭐 있었는지 가끔 잊어버림 (3)

사실 사이비를 턴 직후, 하빈과 글리치는 곧바로 집에 돌아가진 않았다. 이공간 내에서 사건 정리를 한 번은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선배, 그렇게 싫다더니 정작 교주 역할은 제일 잘하던걸?”

하빈이 다시 봤다는 듯 신난 목소리로 물었다. 곁에 있던 레몬도 거들었다.

“맞아요! 제가 여기서 지켜봤었는데 설교도 잘하시던데요? 뭐라고 하셨더라? ‘멸망은 운명의 데스티니!’라고…….”

“……닥쳐.”

글리치는 다급히 레몬의 말을 막았다. 아마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인 모양. 그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후배님의 금전 문제는 해결한 건가?”

“음, 원래는 헼께록한테 돈을 받으려고 했었는데 애가 기절을 하기도 했고, 더 쏠쏠한 것들이 보여서 그걸로 챙겼지.”

마이너 패치가 꼭꼭 숨겨 놓은 장부들과 기록 아이템들. 이것들을 파다 보면 뭐라도 나올 거라고 하빈은 예상했다.

‘별의 서인가 하는 것도 여기 섞여 있으려나?’

그때 편지에서 말했던 찜찜한 단서. 별의 서.

장부가 너무 많아서 다 살피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다시 돌아가서 좀 더 찾아볼 것이다.

“해보고 안 되면 다른 데 털면 되지!”

장부를 얻었으니 마이너 패치와 연관된 다른 조직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 조직을 털어서 100억을 내놓으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또 다른 조직을 털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100억 모을 듯!”

“…….”

“하, 하긴 사이비 종교도 하루도 안 되어 털고 나왔으니…….”

레몬이 조용히 혼잣말을 삼켰다. 하빈이 레몬을 칭찬하듯 등을 토닥였다.

“그래그래. 레몬이도 수고 많았어. 네 덕분에 늦지 않게 선배님이 교주로 등장할 수 있었다며? 상으로 다음엔 치킨이다. 기대하라구!”

“치킨……! 치킨이라면 그 바삭한 닭고기 요리요?”

지난번에 먹었던 치킨의 맛을 떠올린 레몬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느 소설에서든 이세계인들은 치킨을 먹으면 감탄을 하더라니까.’

로판, 사극, 판타지 가리지 않고 다른 세계 등장인물들은 치킨 먹으면 감동하던데 역시 치느님은 현실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인 모양이다. 하지만 글리치는 치킨이라는 단어에 설레는 레몬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치킨? 그거 맛있는 건가?”

“네! 엄청 맛있어요!”

“허, 선배도 치킨이 탐나? 사줄까?”

“…….”

글리치는 잠시간 갈등에 휩싸였다. 선뜻 그러라고 하기에는 하필 그 음식을 맛있다고 한 게 레몬이었다.

‘저 녀석, 독약맛 음식도 잘 먹던 체질이다.’

저번에 떡볶이를 먹고도 맛있다고 했던 레몬. 그의 혀를 믿어도 될지 미지수였다. 생각에 잠긴 글리치를 보며 하빈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어, 그래도 이번에 도와준 게 많으니 치킨 정도야 사줄 수 있어. 나도 치킨 먹은 지 좀 되었으니 집에 돌아가면 기념으로 치맥파티나 할까?”

“저번에 마왕들을 데리고 와서 했던 파티 말이죠?”

그땐 맥주 대신 환타와 콜라를 먹었지만 말이다. 이공간에 둘러앉아 치킨을 뜯던 일을 레몬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에 글리치가 고개를 들었다.

“마왕……들을 데려와서 여기서 파티를 했다고?”

다른 곳도 아닌 여기서?

글리치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동안 글리치가 파악한 이공간은 정말 보면 볼수록 경이로운 곳이었다.

오류들의 집합지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관리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최후의 공간일지도.’

이런 곳에 생명체가 드나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 ‘레몬’이라는 존재도 고위 성좌인가 본데, 성좌로서 가진 능력과 ‘레몬’만이 가진 공간을 다루는 특질 덕분에 겨우 이곳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일 테다.

그마저도 혼자서는 드나드는 문을 열지 못해 글리치와 협력을 해야 했었지.

그런데 이 후배는 벌써 마왕을 둘씩이나 여기 데려왔었다고? 그것도 별다른 이유가 아닌 단지 파티를 위해?

‘대체 이 인간의 기준은 종잡을 수가 없군.’

마계의 반지도 골칫덩이로 취급하고, 최후의 이공간조차 파티 장소로 쓰는 존재라니. 글리치가 생각에 잠긴 동안 하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뭐, 파티보단 소풍이지, 소풍!”

“……소풍이라.”

글리치는 일단 현하빈이 마왕 둘과 소풍을 할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것에 주목하기로 했다.

“후배님은 마왕들을 꽤 자주 만나는 모양이지?”

마계는 안 다스리겠다며 관심 없다는 듯 굴어도 다행히 마왕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며 교류를 이어나가는 모양이었다.

‘마계의 주인 자리는 부담스럽다고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마왕들을 부리는군.’

글리치로서는 퍽 기꺼운 일이었다.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우리 이프시네가 얼마나 착한데. 크릭샤도 정말 친절하고 말이야. 같이 있으면 참 즐겁다구.”

크릭샤가 알면 뒷목을 잡을 이야기었지만 하빈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흠, 그래?”

글리치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가 탐색하듯 질문을 던졌다.

“그럼 후배님, 그것도 알고 있나? 요즘 마계 정예군들이 나서서 여러 층을 통합하고 있다던데.”

“……응?”

여러 층을 통합하고 있다고?

그 말에 레몬이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네, 맞아요. 요즘 50층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죠. 여러 층을 통합한단 표현보다는…… 좀 온건하게, 다른 층과 교류하거나 연맹을 맺는 거지만요.”

각 층마다 거주하는 마물이나 종족들이 다르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진입할 수 없는 층이라도, 마물들이나 종족끼리는 어느 정도 오가는 방법이 있었다. 크릭샤가 26층과 50층을 오간 전적이 있었듯이.

물론 대부분의 경우 한번에 오가는 건 어렵고 한 층씩 정해져 있는 입구를 통해서만 겨우겨우 오갈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서로 던전의 설정이 이어져 있는 특수한 경우에는 한번에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종종 있기는 했다. 크릭샤도 그 방법으로 26층과 50층 사이를 오갔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런 여러 방법을 사용해서 50층 ‘마계’가 다른 층과 교류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저번에 이프시네의 계획이 그거였지.”

하빈과 지석, 지세, 그리고 크릭샤와 이프시네, 레몬이 둘러앉아 치킨을 먹었던 날. 이프시네는 신이 나서 그 계획들을 떠들었었다. 이미 진행 중인 것도 있다며 자랑을 했었고.

“이프시네도 참. 어쩜 그리 열심인지 몰라.”

마왕 자리 오르면 좀 쉬엄쉬엄해도 될 텐데. 항상 일을 열심히 한다.

“당 떨어질 일 많을 테니 다음에 간식거리라도 챙겨줘야겠네.”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투명한 창을 보고 있던 레몬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끼어들었다.

“아! 그런데, 아까 사이비 신도들에게 선동 걸어 놓은 거 저대로 놔두고 가도 괜찮아요? 제가 스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놔두면 알아서 풀릴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물론 선동이 풀린 후에도 사람들이 헼께록을 믿을 것 같지는 않다. 압도적인 불꽃을 보여 준 현하빈 때문에 사람들은 진짜 헼께록에 대한 신임을 잃어버렸으니.

마이너 패치가 구하러 오지 않는 이상, 헼께록은 계속 가짜로 취급되며 감금되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신도들에게 했던 만큼.

“그래도 ‘선동’ 그거 정말 편리한 능력이었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썼어야 할 거 아냐? 까먹었다니 말이 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후배님한테는 그 스킬이 없나?”

“엥.”

나 그런 거 있었나?

하빈이 뒤늦게 스킬창을 뒤져보기 위해 창을 켰다. 창백한 얼굴을 한 레몬이 홀로 중얼거렸다.

“결국 둘 다 스킬 많아서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까먹고 사신다는 거예요……?”

“에이, 스킬 정도야 까먹을 수 있지.”

“……난 아니다.”

뻔뻔한 태도의 하빈. 마찬가지로 본인이 제 입으로 선동 스킬 까먹었다고 했으면서 아니라고 둘러댄 글리치는 멋쩍은 듯 현하빈을 다그쳤다.

“큼, 어쨌든, 후배님도 스킬 좀 익혀 둬. 내가 준 스킬은 공격 마법만 있는 게 아니니까. 물건에 속성을 부여하는 보조 마법이라거나 유용한 저주들도 있지.”

이제라도 좀 알아보라며 급하게 몇 가지 스킬을 시범 보이는 글리치.

“자, 이게 바로 속성 부여 마법이고…… 저주 스킬은 어떻게 쓰냐면…….”

갑자기 시작된 재빠른 스킬 강좌에 하빈이 눈썹을 찡그렸다.

“선배, 이거 꼭 지금 해야 돼? 집에 좀 가자.”

“금방 끝나.”

‘집에 가면 내 말은 귓등으로 안 들을 테니 지금 말하는 게 낫지.’

벌써 현하빈을 파악한 글리치. 그는 한 치도 물러섬 없이 하빈에게 속성 마법 강좌를 끝냈다. 사실 하빈이 사이비를 너무 빨리 털어서 아직 저녁 먹을 시간도 안 되었다. 굳이 빨리 갈 이유도 없는 상황.

게다가 집에 빨리 가려면 글리치의 도움을 받는 게 제일 빠르기 때문에 하빈은 별수 없이 글리치의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에휴. 역시 저 선배는 꼰대 맞다니까.’

* * *

어쨌든 골치 아픈 사이비 털기에 이어, 글리치의 잔소리와 스킬 강의까지 억지로 듣고 온 현하빈. 덕분에 그녀는 지금 심기가 상당히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렇게 멋대로 끌고 오다니.’

하빈은 불만 어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결국 집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안내에 따라 새로운 숙소에 도착한 참이었다.

뮤즈레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 객실.

“현하빈 양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빈의 집 앞부터 여기까지 졸졸 따라붙던 경호원과 비서들. 그중 한 명이 설명을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빈 양을 모신 분들은 코니 님의 제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컨티뉴의 대주주 연합입니다.”

‘역시 컨티뉴와 관련이 있었나 보네.’

웬만한 곳에서 온 요청이었다면 하빈은 그냥 경찰을 부르며 뻗대고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따라온 이유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혹여나 하빈과 친한 코니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지장을 줄까 봐서.

그리고 두 번째는, 몰려온 리무진과 경호원들의 상태로 봤을 때, 상대가 꽤나 거물인 것 같아 안 가겠다고 뻗대면 괜히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다.

선량한 힘숨찐인 현하빈이 여기 인원들을 다 처리하고 튄다는 건 너무 이목을 많이 끈다. 주택가에 불법 주차까지 해가며 하빈을 모시러 왔던 사람들 때문에 옆 아파트 단지 사람들도 창문으로 힐끔힐끔 하빈과 경호원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고, 도심지라 CCTV와 블랙박스도 많았으니.

‘완전 범죄가 힘든 상황이었지.’

결국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 들어나 보자 하고 따라온 현하빈. 마침 그녀를 스위트룸의 응접실로 안내한 비서 너머로, 하빈을 부른 이들이 모이고 있었다.

‘컨티뉴 대주주 연합’이라 소개된, 코니의 예전 제자 모임. 그중 맨 뒤에 선 한 명은 하빈을 데려올 때도 ‘이런 사람을 후계자로 삼았다고? 역시 나는 인정 못 해.’라고 말했던 놈이었다.

그 녀석은 하빈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는 다행히 꽤 정중한 편이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가 바로 코니 님의 숨겨진 손녀라고 들었다.”

진짜 그것 때문에 데려온 거야? 하빈은 재깍 입을 열었다.

“그거 헛소문이라니까요.”

“헛소문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린 진상을 알고 싶다.”

“…….”

“코니 님은 원체 비밀이 많으신 분이시니까.”

하빈이 처음부터 아니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집요한 눈빛으로 하빈을 살피는 대주주 연합.

‘설마 이 사람들, 손녀설을 진짜로 믿는 건가?’

듣기로, 컨티뉴의 주식을 가진 사람은 코니에게 인정받은 초기 제자나 관계자들뿐이라고 한다. 코니는 그동안 가족 관계가 없는 것으로 추정되었으니 언젠가 코니가 후계자를 정하면 대주주 연합에 속한 사람들 중 한 명이 후계를 이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추측했다.

그런데 갑자기 코니의 손녀일지도 모른다는 존재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학교 측에서는 루머라며 일축했지만 대주주 연합의 사람들은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겠지. 게다가 어제 한국을 방문한 코니가 직접 현하빈을 별장에서 만나기까지 했으니.

그들로서는 현하빈에게 뭔가 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

하빈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잠시 침묵하던 하빈은 별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온다면야, 가장 확실하게 이 상황을 피하는 방법이 있지.

씨익. 뜻 모를 미소를 지은 하빈이 슬쩍 자신의 머리카락 위로 아헤자르의 검날을 갖다 대었다.

스륵.

그러자 하빈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왔다.

‘역시 이 방법밖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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