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세상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라는 존재가 세 명은 된다던데 (2)
“오호, 저것 봐라?”
세 명의 헼께록이 마주치기 전.
이공간에 도착한 다음 레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현하빈. 그녀는 레몬의 증언 덕분에 지금 글리치가 교주 변장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현하빈은 이공간에 편안하게 누워 글리치와 헼께록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다.
“하빈 님, 도우러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와작, 새우땅을 씹는 하빈을 보며 레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마침 하빈은 레몬이 띄워준 두 개의 창을 감상 중이었다. 한쪽에서는 글리치가 교주 행세를 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다급하게 복도를 뛰는 헼께록이 보였다.
“헼께록이, 벌써 정신을 차렸을 줄이야.”
이 와중에 살겠다고 바로 떠날 줄 알았는데, 헼께록의 행보를 보아하니 그는 입구가 아닌 예배실을 향해 뛰고 있었다.
“오, 이 와중에도 신도들을 저버리지 않는단 건가? 예배에 진심인가 봐.”
생각보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지도?
사실 헼께록으로서는 지하실 침입 사건을 덮으려고 평소처럼 예배하는 걸 선택한 것이었지만 하빈이 그걸 알 길은 없었다. 곁에 있던 레몬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이러다간 헼께록이 마신님이랑 마주치겠는데요?”
“그러게. 지금 꺼내줘야 하나?”
하빈이 고민된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지금 글리치를 이공간으로 쑥 빼낸다면 뒤늦게 도착한 헼께록과 교단 관계자들이 조금 당황하는 것 외에는 어찌어찌 수습이 될지도 모른다. 신도들은 그냥 교주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입구에서 나타났다며, 기적이 일어났다고 오히려 신기해할지도.
“그래. 난 조용히 살고 싶은 힘숨찐! 빨리 꼰대 선배를 잡아 오자구.”
일이 커지는 건 사양이다. 신도들의 시선이 팔린 사이에 카메라 사각지대를 이용해서 쑥 빼 오면 되겠지.;
‘순순히 끌려오느냐가 문제긴 한데…….’
기숙사에서 질질 안 끌려가려고 버티던 글리치의 모습을 떠올리던 하빈이 화면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글리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마신은 저렇게 안 생겼다.
“…….”
“…….”
순도 백 퍼센트의 진심이 담긴 한마디. 레몬이 안타깝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쌓인 게 많으셨던 모양이에요.”
레몬이 보기에도 종말교의 그림은 너무할 정도로 끔찍했던 모양. 이해가 안 가는 표정을 짓는 레몬을 보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냥 저 해명 정도는 좀 하게 놔둘까?”
선배 누명 풀어주겠다고 속여서(?) 비행기 대신 이용했던 글리치. 그렇게 써먹은 이력이 있으니 이 정도 원한은 풀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빈이 오류를 열려던 손을 거두자 글리치는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잘생겼어, 아주아주.
-어떻게 생겼는지 솔직히 기억 안 나지만. 안 잘생겼을 리 없다. 아무튼 저렇게는 절대 안 생겼으니까 알아두도록.
“뭐 얼마나 쌓인 거야?”
“…….”
[그…… 예전에도 당한 게 많았다던데, 그것까지 생각난 게 아닐까 싶다.]
과거부터 언제나 악신으로 혐오받던 이력이 있었던 글리치. 언제나 고고한 성좌인 것처럼 행동해도 사실 쌓인 게 좀 많았던 모양.
‘심지어 본인 어떻게 생겼는지도 기억 안 난다면서? 생각 안 나는 김에 일단 잘생겼다 우겨 놓는 건가?’
하빈이 짜게 식은 표정으로 화면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예배실의 문이 열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들 멈추어라!
-저자는 가짜다!
진짜 헼께록이 문을 열고 난입한 것이다.
“오.”
“오…….”
하빈과 레몬이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한마디를 흘렸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하곤 생긋 웃었다.
“와, 개판이네.”
이렇게 된 이상 조용히 넘어가기엔 역시 조금 늦은 것 같다. 하빈이 해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개판 수습하러 다녀올게!”
* * *
그렇게 바로 지금. 글리치-헼께록-현하빈의 3교주 삼자대면.
[개판을 수습하겠다고 하더니 더 난장판을 만들면 어쩌자는 것이냐?!]
‘하, 잘잘아. 두고 보라구. 내가 헼께록보다 더 찐교주인 척할 자신 있다니까?’
하빈은 더 당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가 진짜 교주다!”
그러고는 옆에 바짝 얼어 있는 헼께록의 뒷목을 닭목 잡듯이 꽉 잡았다. 그녀가 상냥하게 헼께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께록아, 지금 100억도 안 주고 튈 생각을 했니? 어둠의 다크 이름으로 운명의 데스티니를 맞아볼래?”
“우, 운명의 데스티니?”
“네가 회까닥하게 되는 운명 말이다.”
“…….”
헼께록은 힐끔, 하빈이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는 야구방망이를 곁눈질로 보았다.;
‘특별한 아이템 같지는 않은데…….’
좋은 아이템은 겉으로도 티가 난다. 아무리 그래도 저런 허접한 야구 배트 모양의 아이템이 굉장한 위력을 가지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개 공격을 가볍게 쳐내고 헼께록을 기절시킨 걸 보면.
‘실력자겠지.’
헼께록은 꿀꺽 침을 삼켰다. 방금 지하실에서도 겪었지만 이 인간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존재였다. 지금 교주를 사칭하러 왔으면서 손에 저런 야구 배트를 들고 온 게 말이나 되는가? 차라리 경전을 들고 와서 본인이 진짜라 주장을 했어야지.
아마 지금 헼께록의 목을 붙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력으로 협박해서 대충 넘어갈 심산인 모양이다. 헼께록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단상 쪽에 있는 글리치를 쳐다보았다.
‘저기 있는 저자와도 한패겠지?’
헼께록과 완벽히 똑같게 분장한 능력, 그리고 현하빈이 글리치의 편을 들어 준다는 점까지. 모두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둘은 분명 같은 편이다.
마침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글리치가 입을 열었다.
“그래. 저놈은 확실히 가짜다.”
그가 헼께록을 척 가리키며 말했다.
이로서 2대 1이 된 상황!
‘하, 멍청이들…….’
비록 닭목 잡히듯 붙잡혀 있는 신세였지만 헼께록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대놓고 두 명이서 편을 먹어버리면 남은 사람이 진짜일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걸 모르는 건가?
헼께록이 자신의 보좌관들과 경호원에게 재빨리 눈짓을 했다. 그들도 이미 사태를 파악한 듯 단상 위에 있는 교주 글리치와 새로 등장한 교주 현하빈을 향해 경계 태세를 취했다. 헼께록은 가짜 교주들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너희는 지금 실수한 거다.’
차라리 바로 도망을 쳤어야지, 이렇게 떡하니 제 발로 불리한 상황 안에 들어오다니.
여긴 헼께록의 본거지.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
‘아무리 날고 기는 랭커라 해도 일대 다수는 상대하지 못하겠지.’
지하실이 털린 이상 이 가짜들을 잡아넣으면 만회할 가능성이 있었다. 마이너 패치에게 야구 배트를 든 가짜 헼께록을 넘겨주면 알아서들 하겠지.
계산을 끝낸 헼께록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헼께록이 진짜 교주라는 것만 증명하면 이 모든 사람들이 헼께록 편으로 돌아설 것이고, 그럼 이 가짜 교주 두 명은 바로 처단될 것이다. 헼께록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바로 알 수 있다. 당장 ‘정화의 불’을 가져와!”
그 말을 알아들은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의 불.
그건 종말교에서 신성시되는 아이템이었다. 교주인 헼께록만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로. 다른 아이템과 달리 오로지 교주 헼께록만이 불을 피울 수 있었기 때문에 교주의 신성함을 증명할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다.
실상은 신성함과 관계없이 헼께록만 불을 피울 수 있게 마이너 패치에서 특별 제작해 준 아이템이지만.
‘어쨌든 나밖에 피울 수 없는 불이라는 거다!’
마침 보좌관이 정화의 불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건 작은 화로였다. 혹시나 불길이 크게 번질까 싶어 투명한 유리 기둥으로 감싸놓은 화로. 헼께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현하빈을 돌아보았다.
“일단, 너도 교주라고 하니까 이게 뭔지 알겠지?”
“물론!”
사실 현하빈은 그게 뭔지 모른다. 그러나 주변의 신도들이 떠드는 걸 들어보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정화의 불!’
‘정화의 불을 가져오시다니…….’
‘그렇군, 저건 교주님만 불을 붙일 수 있는 거니까 저기 불을 붙이시는 분이 진짜일 거야.’
현하빈은 물끄러미 정화의 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템 설명이 떴다.
[정화의 불]
종말을 넘어서는 불꽃의 플레임. 선택받은 자만이 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