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75) (175/268)

175. 세상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도플갱어라는 존재가 세 명은 된다던데 (1)

“어? 뭐야! 헼께록 어디갔어?”

마이너 패치의 비밀 지하실을 탈탈 털고 나온 하빈. 그녀는 원래 있던 헼께록의 보물 저장고 지하실에 도착했다. 그러나 헼께록은 그곳에 없었다.

헼께록이 너무 만만했던지라 별 신경도 안 썼던 게 문제였다. 이렇게 빨리 기절에서 깨어날 줄이야.

“깨어나도 사람을 부를 줄 알았는데, 홀랑 도망을 쳤네?”

하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이아와 금을 챙길 새도 없이 줄행랑친 게 꽤 의아했다.

‘나름 이것들을 아끼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목숨이 소중했던 거 아니겠느냐?]

누구라도 하빈의 무력을 보면 당황하기 마련. 지금 다이아랑 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도망치는 게 시급하다 판단했을지 모른다.

“아앗, 그럼 사람들 부르러 갔나?”

하빈이 지하실 문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 * *

“……헉, 헉! 진짜 미친놈이었어!”

헼께록은 닫힌 지하실 문을 뒤로하고 재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소리가 나지 않게 살금살금 움직이느라 죽는 줄 알았다. 상대가 장부를 챙기느라 정신이 팔려 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그가 가진 호신 아티팩트는 A급 헌터를 단번에 기절시킬 수 있는 엄청난 아이템이라고 들었다. 그걸 역으로 튕겨내다니.

물론 헼께록이 전투 감각이 없는 편이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결론적으로 헼께록이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장부를 털린 게 문제다!’

헼께록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마이너 패치 측에서 이 사실을 알면 헼께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장부를 털고 가는데 그걸 가만히 놔뒀다는 이유로.

이러나저러나 죽은 목숨.

“이렇게 된 이상 상황 봐서 마이너 패치 뒤통수를 치던가 해야겠어.”

적이 자신을 죽이기 전에 먼저 친다.

그게 그나마 그의 생존율을 높일 것이다.

‘일단 이 일은 나 말고는 아직 아는 사람이 없어.’

현하빈은 지하실에 몰래 잠입했기 때문에 아직 헼께록의 측근들도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나중에 마이너 패치 측에서 확인하러 와야만 밝혀질 사실.

‘다음 감사까지는 2개월이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하면……!’

그때까지 재산을 적당히 빼돌린 다음, 아무도 모르는 장소로 망명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숨어 살다가 신분을 바꾸고 호화롭게 살면 되겠지.

“그러니 그때까지만 조용히 살면 돼!”

사건이 생기면 마이너 패치 측에서 바로 감사가 뜬다. 즉, 앞으로 2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벌어지기만 한다면, 몰래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거다!

헼께록은 그렇게 합리화하며 재빨리 예배실로 향했다. 다른 신도들에게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절대 알려서는 안 되었다. 그럼 예배에 늦지 않고 빨리 참석해야 하는데…….

헼께록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시간이 좀 지났는데 왜 아무도 안 왔지?’

헼께록이 늦으면 빨리 와달라고 보좌관과 경호원들이 찾아온다. 경호원은 헼께록의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도 헼께록에게 아무 일이 없는지 확인하러 왔었을 것이다.

헼께록은 시계를 보았다. 지금 벌써 예배가 시작된 지 10분이 넘은 시간인데도 교주실에 아무도 없다.

‘……!’

어쩐지 뒷목이 싸해지는 기분이 들어 헼께록은 급히 발을 놀렸다. 마침 예배실이 있는 쪽에서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우오오오오!’

“뭐지? 벌써 예배가 시작된 건가?”

열렬한 환호 소리가 평소 예배 못지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다른 신도가 대신 예배를 주관했나?”

교주 밑에도 부교주를 비롯한 많은 중간 직책이 있다. 어쩌면 그들 중 한 명이 오지 않는 헼께록을 대신해 예배를 주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게 헼께록으로서는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터.

헼께록은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길 바라며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예배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예배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 교주님……?”

입구에 선 경호원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헼께록이 알기로 그는 웬만한 일로는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더 조급해진 헼께록이 그에게 추궁했다.

“왜? 무슨 일이야?”

“그, 그게…….”

경호원은 예배실 문과 헼께록을 번갈아 보며 허둥지둥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황망한 표정이었다.

“방금 교주님이 저기 들어가셨는데 왜 또 여기에 계신 건……지.”

뭐? 헼께록이 이미 예배실에 들어갔다고?

자신은 들어간 적이 없는데?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헼께록이 다급히 문 너머를 살폈다. 바로 그 순간, 열린 예배당 문틈으로 보이는 건.

“우오오오!”

“종말! 종말!”

평소처럼 함성을 내지르는 신도들과.

“…….”

그걸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는, 헼께록과 똑같이 생긴 인물이었다.

“왜…….”

어째서 햌께록과 똑같은 인간이 또 나타난 거야?!

헼께록은 허망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 * *

“종말! 종말”

한편 예배실 안.

글리치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에 떡하니 걸린 건 ‘종말을 가져온다는 마신’의 초상화. 보기만 해도 기괴한 고어물과 같은 그림.

“…….”

후, 한숨을 내쉰 글리치. 그는 구겨진 설교문에서 손을 뗐다. 생각해 보니 굳이 여기 적힌 대로 장단을 맞춰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현하빈은 조용하게 넘어가는 걸 좋아하니, 글리치가 이런다는 걸 알면 꽤나 기분이 상하겠지만.

뭐 어떤가?

원래 마신이란, 하고 싶은 대로 막 나가는 족속인걸.

‘소란을 일으키면 분명 핵맵닭볶음면 정도로 넘어가지 않겠지.’

다시 떠올리니 조금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지만 글리치는 잠깐의 걱정 따위 날려 버렸다.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그래, 종말 말인데.”

“종말! 종말!”

“이대로면 종말이 오는 건 맞아.”

“우오오오오!”

글리치의 말에 신도들이 감명받은 듯 또 한 번 함성을 내질렀다. 글리치로서는 도무지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별로 한 말도 없는데 이들은 조건반사적으로 냅다 지르고 보는 건가? 글리치는 구겨진 설교문을 흘깃 바라보았다.

“여기 설교문 잠깐 읽어 보니까, 종말이 와도 종말교 믿으면 살 수 있다고 적혀 있던데.”

“오오오! 믿음만이 살길!”

“그걸 믿냐?”

“믿습니다!”

“종말! 종말…….”

비꼬는 질문으로 ‘그걸 믿냐?’라고 던진 건데, 사람들은 여전히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글리치는 대놓고 피식 비웃으며 덧붙였다.

“그걸 왜 믿지?”

“조, 종……말?”

반사적으로 종말을 외치려던 사람들 중 몇몇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평소의 교리나 설교와는 어딘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글리치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종말 오면 너넨 다 끝이야. 다 끝이라고. 애초에 종말을 일으킬 놈이 공들여서 사후 세계 같은 걸 남겨줄 리가 없잖아? 그럴 놈이면 처음부터 종말 자체를 안 일으켰겠지.”

“예……?”

멀뚱히 눈을 깜빡이는 신도들을 향해 글리치는 가차 없이 덧붙였다.

“너네, 이 종교 믿어도 답 없다고.”

“교, 교주님?”

“교주님, 왜 그러십니까?”

난데없는 말에 주변에 있던 보좌관과 다른 고위 직책 신도들이 당황해서 웅성거렸다.

사이비 종교의 특성상 교주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다. 그의 말 한마디가 가져오는 무게감은 다른 종교들과 궤를 달리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헼께록의 ‘선동’ 스킬에 오랫동안 당해 왔던지라 헼께록의 말이라면 콩을 팥이라 해도 믿고, 지금 죽어야 한다 해도 당장 목을 내놓을 사람이었다.

그런 헼께록이, 지금 ‘종말교는 노답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고?!

“왜, 왜 그러시는 겁니까?”

“원래 교리와 너무 다르잖습니까.”

주변 고위 신도들이 속닥속닥 글리치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당황을 내비쳤다. 그래도 그들은 대놓고 글리치를 제지하진 못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교주님이 괜히 저런 소리를 하실 리 없지. 큰 뜻이 있으실 거야.’라는 일말의 희망이 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헼께록이 이 교단에 끼치는 영향력은 컸다.

그리고 글리치는 그런 태클 따위 깡그리 무시하곤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리고 저기 그려진 마신 그림 말인데.”

“네, 네엡.”

빔 프로젝터를 관리하는 신도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리치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마신은 저렇게 안 생겼다.”

“네?”

“잘생겼어. 아주아주.”

“…….”

이어지는 정적에 글리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뻔뻔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떻게 생겼는지 솔직히 기억 안 나지만. 안 잘생겼을 리 없다. 아무튼 저렇게는 절대 안 생겼으니까 알아두도록.”

“……네?”

“너희 겁주려고 일부러 무서운 그림 그려서 현혹시킨 거다. 알겠나?”

“혀, 현혹이라뇨!”

주변에 있던 교인들이 다급한 얼굴로 대답했다.

“교, 교주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분명 교주님의 크나큰 뜻을 담은 설교인 건 알겠으나…… 저희의 머리로는 이게 다 무슨 의미인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계속되는 글리치의 설교 아닌 설교에 신도들이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다, 다들 멈추어라!”

“……?”

“……?”

갑자기 입구에서 들려온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신도들과 글리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저자는 가짜다! 모두를 현혹시키러 온 가짜! 내가 진짜다!”

“교주님……?”

“교주님이…… 두 명?”

입구에 서서 소리치는 이는 바로 헼께록!

진짜 헼께록이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단상에 선 글리치를 향해 외쳤다.

“물러나라! 이 마신의 하수인! 어둠과 악의가 보낸 자여!”

‘음……난 마신 하수인이 아니라 진짜 마신인데.’

글리치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헼께록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들 저 마귀에게 현혹되지 마라! 내가 바로 진짜이니!”

“교, 교주님!”

“어떻게 된 겁니까!”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헼께록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헼께록의 등장에 모두가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혼란에 빠진 분위기.

‘그래, 저놈에 비하면 내가 더 승산이 있다.’

헼께록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저 가짜 교주가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설교나 선동에는 재능이 없어 보인다. 하고 싶은 말만 아무렇게나 내뱉는 모양. 종말교에 대한 이해도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난 종말교에 대해 잘 안다. 내가 진짜니까!’

그에 비해, 그동안 교주로서 살아온 헼께록이라면 금방 신도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진짜다. 진짜임을 증명하겠다. 저쪽이 가짜다!”

헼께록이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순간이었다.

“……엥? 아닌데. 얘가 가짜야.”

“……?”

바로 그때, 헼께록에 뒤에서 들린 목소리. 불길한 느낌에 헼께록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멀리 도망 안 갔네?”

헤께록이!

‘허억…….’

세 번째 교주-현하빈이 변장한 교주-가 해맑은 얼굴로 헼께록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현하빈은 생긋 웃으며 진짜 교주인 헼께록을 가리켰다.

“자자! 다들 이 어둠의 다크에게 현혹되지 말자! 내가 진짜니까!”

그 말에 신도들은 죄다 뒤집어졌다.

“교, 교주님이 세 명!”

“아아아, 종말! 종말이 도래했다!”

“……말세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