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74) (174/268)

174. 현하빈과 비밀의 방 (2)

“진짜 어떻게 한 거지?”

하빈은 정말 궁금하단 얼굴로 꽃들을 노려보았다.

“나도 그 방법 알면 우리 애플이들 잘 키울 텐데!”

[그 부분이 문제인가?]

하빈은 학교에 두고 온 사과나무 묘목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운 한숨을 흘렸다.

“그럼그럼! 식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매일 정성을 다해 돌봐야, 어? 얘네도 농부의 마음을 알아서 쑥쑥! 자라주는 거라고. 근데 얘네는 아주 날로 먹네?”

척 보니 수분 공급 시설도 없고 온도 관리나 습도 관리 시설도 없다. 가장 중요한 빛과 창문도 없고, 그걸 대신할 햇빛 조명도 없고.

바닥의 흙은 영양이 있기는커녕 퍼석퍼석한 모래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이렇게 튼실하게 자란 마약 꽃이라니.

“진짜 핵 썼나 봐!”

[핵이 뭐냐?]

“으음…….”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막상 아헤자르한테 설명하려니 핵을 뭐라고 표현해야 적당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빈이 대충 설명했다.

“게임에서 쓰이는 말인데, 게임을 일부러 변형해서 유리하게…… 뭐라고 해야 하지? 조작하거나 치트를 한다거나 그런 거야.”

하빈이 홱 팔짱을 꼈다.

“어쨌든 핵은 안 되지!”

[너도 오류잖느냐?]

“어허, 오류라니!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난 어디까지나 선량한 힘숨찐!”

하빈이 야구 배트 버전 아헤자르를 휘두르며 외쳤다.

“게다가 잘잘이 너는 대체 누구 편이야? 나쁜 마이너 패치와 사이비를 함께 욕해야지! 자꾸 그러면 평생 야구 배트로 살게 한다?”

[마, 맞다. 깜빡했느니라. 핵은 안 되는 거다!]

“그래그래. 핵은 반칙이지……. 근데 진짜 어떻게 한 거람?”

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꽃을 돌아보았다.

해킹이나 치트 사용 플레이어라니.

하빈이야 존재 자체가 오류니 이것저것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을 들어가거나 막혀 있는 제한을 풀 수 있지만, 해킹은 또 다른 문제다.

버그로 뚫고 들어가는 것과, 정교하게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

후자의 사례는 이제껏 한 번도 발견된 적 없었다. 하빈으로서도 ‘핵 썼네!’ 같은 말은 막 뱉어본 가설이었을 뿐이다.

[그냥 이 녀석들이 새로운 품종을 발견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흐음,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놔도 막 자라는 체질의 꽃을 발견한 걸지도. 그걸 자기들끼리만 몰래 키운다 해도 말은 되었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그래. 그럴 수 있겠다. 난 그냥 이름이 쎄해서 그랬지.”

이름 없는 창조물.

꽃의 복제품.

아이템 설명에 이런 단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꽃의 색깔도 생생하기보다는 어딘가 거무죽죽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풍기는 게…… 어딘가 억지로 변형해 만든 실험체 같았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하빈도 맨 처음 ‘일부러 만들었거나 조작한 거 아냐?’라고 생각했던 거고.

“아냐,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템이 또 있을지 모르지.”

이제껏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변 장부를 슬쩍 챙겼다. 마약 불법 유통의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는데 내버려 두고 오긴 좀 아까우니까!

‘역시 나는 선량한 힘숨찐! 신고를 잘하는 소시민이지!’

하빈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약 유통과정과 전달책이 명기된 문서들을 챙겼다. 이 중 일부는 한국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으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광고에서도 신고하라고 그랬는걸.

“휴. 나 같은 모범 시민 또 없다, 진짜.”

한참 흐뭇한 미소를 짓던 하빈은 이제 다른 장부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흠, 이제 이거 말고 뭐 없을까?”

돈 될 만한 거. 금이라든가, 빼돌려 놓은 재산이라든가, 또 다른 비리나 폐해 같은 거!

“에이, 장부가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에라 모르겠다, 그냥 다 들고 간 다음 생각하지, 뭐.”

하빈은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다. 사실 하빈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지하실은 마이너 패치 측에서도 심혈을 기울여 만든 비밀 장소였다. 웬만한 아이템으로는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탐지조차도 되지 않는 곳.

헼께록조차도 이 공간의 존재만 알고 있을 뿐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지상에는 꾸껠울라칸의 법적 인가를 받은 합법 사이비 종교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기에 관련자 외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는 최고의 기밀 저장고였다.

중요한 물건을 숨길 땐 예상 못 한 곳에 숨기라 했던가. 하빈이 찾는 금괴나 재화들은 마이너 패치 본부나 은행에 차명 계좌로 넣어두었지만, 중요한 기밀들은 이곳에 보관해둔 것이다.

그러니 하빈이 지금 이런 것들을 인벤토리에 깡그리 집어넣고 있는 걸 알면 마이너 패치에서는 난리가 날 상황이었다.

하지만.

“에이, 뭐야! 진짜 금이 없잖아?”

장부를 다 넣고도 돈 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걸 발견한 현하빈. 그녀는 분통을 터뜨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헤께록 녀석의 금반지라도 그냥 가져갈 걸 그랬나? 그거 팔면 100만 원은 나오려나…….”

하빈이 툴툴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 * *

교주를 찾아온 사람들. 그들이 마침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교주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잠깐.”

잠깐이라고 대답한 이는 교주가 아니었다. 교주로 변신한 마신 글리치. 그는 속으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러면서도 그는 신속한 판단으로 지금 상황에서의 일 처리 우선순위를 파악했다. 재빠르게 지하실로 통하는 비밀 입구를 닫고, 소파에 교주가 앉아 있던 폼을 따라 엉거주춤 앉았다.

‘이제 됐군.’

방 안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깔끔해졌다. 그걸 확인한 글리치가 마저 입을 열었다.

“크흠,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경호원이 문을 열었다. 뒤이어 방 안에 들어온 신도들은 소파에 앉아 있는 글리치를 발견하고 움찔했다.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평소 보던 교주님보다 더 차갑고 위엄 있어 보이는 분위기. 똑같은 얼굴과 차림새를 하고 있어서 뭐가 달라졌다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설명할 수 없는 위압감에 신도들은 평소보다 더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음,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 말입니다.”

끄덕.

대답 없이 고개를 까닥인 글리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변장과 사칭을 해온 글리치.

그는 다른 사람으로 변장했을 땐 말을 아끼는 게 최고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말을 길게 하면 필연적으로 꼬투리를 잡히기 마련. 그러니 그 대신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말수를 줄이는 게 최선이다.

글리치가 일어서자 경호원도 신도들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안내했다. 이 건물의 구조와 길을 모르는 글리치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고개를 공손히 숙인 그들이 조심스럽게 글리치를 예배실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종말! 종말! 종말!”

“오오오! 헼께록 님께서 오셨다!”

“종말! 종말”

“…….”

글리치는 대꾸 없이 터벅터벅 맨 앞 단상에 섰다. 아마 이 상황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싸늘할 정도의 무표정에서 그가 이 상황을 위해 인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신도들은 그걸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헼께록은 언제나 진리와 빛을 전해주는 존재.

오히려 기대 어린 눈빛으로 글리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해주시려나.’

글리치를 여기까지 안내한 신도들도 모두 열광이 담긴 눈빛으로 글리치를 주시했다. 소리 지르며 우는 신도, 글리치가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종이에 메모할 준비를 한 신도까지.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신도들이 모두 곧 있을 글리치의 발언에 주목했다.

‘뭐라고 하더라?’

글리치는 곰곰이 그가 보았던 종말교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가 본 건 이공간에서 레몬이 보여준 몇 장면뿐이었는데.

-종말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이러고 있을 것입니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온 마음을 바쳐 어둠에 물들지 않도록……! 항상 믿음을 지켜야만 합니다!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 몇 번 외치는 게 전부였지.’

대충 아무거나 외쳐도 사람들 호응이 좋아 보였던 것 같다.

글리치는 눈앞에 놓인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아티팩트 같은데.’

그동안 종말교의 모습을 지켜본 결과, 여기에 대고 말하면 더 크게 울리는 모양이었다.

글리치는 톡톡 마이크를 두드렸다.

탁! 탁!

작은 톡톡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스피커로 크게 증폭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추측이 맞은 모양이었다. 글리치는 한숨을 내쉬는 게 들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첫 마디를 골랐다.

“……종말?”

“우어어!”

“종말! 종말!”

일단 한 단어 던졌을 뿐인데 사람들의 호응이 굉장했다.

“…….”

‘단어만 던질 생각은 아니었는데.’

원래 문장으로 말하려던 글리치였지만 신도들의 함성에 묻혀 글리치는 한마디도 못 했다.

‘이제 뭐라고 말하지?’

일단 현하빈이 나오기 전에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걸 글리치도 알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다 그의 앞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아무래도 설교할 때 참고하는 자료인 모양. 중간중간 헼께록이 직접 메모해 놓은 말들도 보였다.

‘이거라도 대충 읽을까?’

글리치가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다. 꾸껠울라칸의 언어로 적힌 글.

그에겐 통역 아이템이 없었지만 마신에게 통역 마법쯤은 일도 아니었다. 이제껏 지구와 이공간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한 것도 모두 훌륭한 통역 마법을 써온 결과였으니.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바로 해독되었다.

-종말은 운명의 데스티니. 결국에 다가올 어둠의 다크!

“…….”

이공간에서 봤던 것과 별다를 거 없는 참담한 설교문이었다.

‘이, 이걸…… 진짜 해야 한다고?’

내가? 이 글리치가?

이런 설교를 진짜 해야 해?

마족들 앞에서도 제대로 된 설교를 해본 적 없는 글리치. 글씨를 멍하니 바라보던 그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이젠 표정 관리를 할 최후의 인내심도 고갈된 글리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종말……은 운명의 데스티니.”

“우오오오!”

“종말! 종말”

“……하.”

다음에 와야 할 말은 ‘결국에 다가올 어둠의 다크’다. 글리치가 포기한 듯, 짜게 식은 눈으로 그 단어를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휘리릭.

그의 옆에 떠 있던 빔 프로젝터가 설교문에 맞추어 화면을 넘겼다. 종말 그림이 그려져 있던 스크린은 이제 다음 장, ‘어둠의 다크’를 표현하기 위해 기괴한 마신 초상화를 띄우고 있었다.

글리치가 보고 빡쳤던 바로 그 초상화!

“…….”

꿈틀.

마침 그걸 발견한 글리치의 얼굴 근육이 파들 떨렸다. 그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종이를 움켜쥐었다.

꽈지직.

설교문이 적힌 종이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