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초대받지 않은 손님 (6)
헼께록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 하빈은 글리치에게 당부해 뒀다.
“나 먼저 가서 살피고 올 테니까 레몬이랑 같이 여기서 기다려.”
“그러지.”
“네, 네에?”
이야기를 듣던 레몬이 창백한 낯이 되어 글리치와 하빈을 번갈아 보았다.
“저를 이분이랑 단둘이 남겨놓고 가시는 거예요?”
“응. 왜?”
“…….”
레몬은 글리치를 힐끔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신과 단둘이 있는 게 불안한 모양. 하빈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상냥한 목소리로 달랬다.
“괜찮아, 우리 선배님은 안 물어.”
그 말에 글리치가 발끈했다.
“지금 날 뭐로 취급한 거지? 문다니? 내가 말 못 하는 짐승으로 보이나?”
“어허, 짐승 아니라도 물 수 있지! 나도 수틀리면 물어!”
“……?”
그렇다. 누구든 물 수 있는 게 이 험난한 세상이다. 절대 방심하거나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법!
할 말을 잃은 글리치를 남겨두고 하빈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삐이, 삐삐!
그 순간 리베가 그들 사이로 고개를 쏙 빼고 외쳤다. 하빈이 그걸 해석해 주었다.
“우리 리베도 안 문대.”
“……진짜 알아듣고 해석하신 거 맞아요?”
“뭐어? 우리 리베랑 나는 척 하면 척이라고. 그렇지 리베야? 나 해석 잘했지?”
-삐!
어쨌든 리베까지 두고 가면 셋이 되니까 레몬도 마신과 단둘이 있는 것보다 덜 어색할 것이다. 하빈은 셋을 이공간에 두고 먼저 교주를 독대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독대할 건가?”
“음?”
지금의 하빈은 교주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였다.
“교주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교주 앞에 나타난다고?”
누군가 겪는다면 꿈인가 생신가 의심할 법한 기이한 상황. 하빈이 눈을 빛냈다.
“맞아! 교주도 그런 일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으니 무척 당황하겠지? 바로 그 순간을 노리는 거야.”
도플갱어를 만나면 둘 중 하난 죽는다는 미신이 있는데. 교주는 그걸 알고 있는지 몰라?
“게다가 만에 하나 교주가 갑자기 경호원이나 대기 인원을 부른다 해도 내가 교주 행세를 하면 손쉽게 해결이 되겠지. 저 안에 CCTV 같은 장치가 있었다면 교란도 될 것이고.”
하빈이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마침 화면 속 교주는 홀로 비밀 방에 들어가 명품들을 살피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하빈이 그 모습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야, 저것 봐! 저렇게 돈이 덕지덕지 묻은 인간 오랜만에 봐. 털어낼 게 정말 많아 보이는걸?”
보면 볼수록 수확의 기쁨을 기대하게 하는 인물이다. 하빈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헤께록이! 오늘 헤까닥하게 해줄게.”
[헼께록이다.]
“아, 젠장 발음 어렵네.”
몇 번 더 ‘헼께록’의 발음을 점검한 하빈이 마침내 이공간 너머로 발을 떼었다.
* * *
그렇게 대치하게 된 이 상황. 하빈은 교주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천만 딸라!”
“오, 오십만. 그 이상은 안 돼.”
“천만 딸라!”
“……치, 칠십만! 칠십만이라고! 원래 십만까지밖에 못 준다고 했는데 벌써 일곱 배다!”
“천만 딸라.”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천만 딸라를 외치는 하빈. 헼께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네놈! 천만 달러가 얼마인지 알기나 하고 부르는 거야?”
100억 원은 헼께록 기준에서도 꽤 큰돈이었다. 빼돌려놓은 재산의 3분의 1은 처분해야 마련할 수 있는 금액.
‘아니, 누구에게라도 큰돈이다. 저 녀석 지금 단위 헷갈린 거 아냐?’
원래 10억 원 부르려다 단위 착각해서 100억 달라고 설치는 걸지도.
‘분명 그런 걸 거야.’
그러나 하빈은 기분이 꽤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쫙 펼치며 외쳤다.
“뭐어? 내가 하는 말이 지금 장난으로 들려? 천만 달러! 공이 일곱 개!”
원으로 환산하면 공이 열 개!
“…….”
하빈의 기세에 눌려, 얼떨결에 덩달아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다가, 어이가 없는지 입을 다물어버린 헼께록. 하빈은 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 참! 이것도 깎아준 거란 말이야! 맘 같아서는 내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합쳐서 200억…… 아아니, 2천만 달러 내놓으라고 하고 싶은데.”
100억이 털렸을 때 느꼈던 그 허탈감과 충격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날! 어?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고!”
[그렇다! 맨날 먹는 것만 찾아다니던 녀석이 무려 짬뽕을 남겼다!]
하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흠, 당시 나 말고도 정신적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꽤 많았지. 그거 생각하면 역시 마이너 패치 자체를 탈탈 털어야 다 보상할 수 있겠어.”
이런 변방의 사이비 종교 정도로는 마이너 패치의 자본금 중 일부밖에 털 수 없나 보다. 하빈이 실망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100억은 있을 거 아냐? 여기 건물 보니까 금이랑 대리석으로 덕지덕지 발라 뒀던데…….”
지금 발에 채이는 것들도 다 명품이고 말이다. 하빈이 흐음 고개를 기울일 때였다. 헼께록이 기겁해서 소리쳤다.
“너, 너……!”
그가 기겁한 듯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었다.
“마이너 패치……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지?”
이곳의 종말교가 마이너 패치와 연루되었다는 사실은 기밀 사항. 그런데 이 작자는 이곳이 당연히 마이너 패치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을 하고 있었다.
‘기밀 정보를 알고 오다니…….’
헼께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빈을 살폈다. 이걸 아는 사람은 종말교 내에서도 극소수.
‘내부인인가? 아니, 아니면 마이너 패치에서 보낸 사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일부러 마이너 패치 측에서 사람을 보내 헼께록을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 치기엔 뭔가 좀…….’
뭔가 좀 많이 이상한데.
애초에 마이너 패치에서 시험하려고 보냈으면 다짜고짜 돈을 내놓으라고 할 게 아니라 기밀을 불라고 협박을 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헼께록이 정보를 순순히 부는지 안 부는지 지켜봤겠지.
그런데 이 침입자는 정말로 순수하게 돈만 달라 주장하고 있다!
‘진짜 어디서 보낸 거야, 저 인간?’
헼께록이 입을 열었다.
“……국제기구에서 보냈나? SPES?”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하빈이 팔짱을 꼈다. 순순히 아니라고 대답해 줄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알아서 다른 조직 침입이라 오해해 주는 게 하빈에게 더 간편했으니까. 하빈은 얄짤 없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데로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그래서 천만 딸라. 줄 수 있어, 없어? 내 인내심은 아주 짧아!”
“…….”
‘지, 진짜로 돈을 원하는 건가? 왜?’
설마 SPES에서 100억 부족하다고 사이비 종교를 털 리는 없는데.
‘뭔가 다른 목적이 분명 있을 거야.’
그게 대체 뭐지?
‘역시…… 마이너 패치의 아이템들을 노리는 건가?’
헼께록은 흘끔 주변을 살폈다.
사실 꾸껠울라칸 지부의 종말교는 다른 장소보다 훨씬 특별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지하에 비밀 실험 시설들과 마이너 패치의 중요 아이템 몇몇이 보관되어 있다는 점.
‘다행히 여긴 그 옆방이야.’
마침 지하실을 두 군데 만들어 두었다. 이쪽 지하실은 헼께록의 전용 명품 보관소, 저쪽 지하실은 마이너 패치의 비밀 보관소. 벽 하나를 두고 붙어 있는 공간이지만…….
‘그것만 안 들키면 돼.’
그러나 생각이 가면 시선도 가는 법. 비록 마이너 패치 소속이었지만 정식으로 스파이 교육을 받은 게 아닌 ‘교주’ 역할에 오래 머물렀던 헼께록. 그는 저도 모르게 힐끔힐끔 빈 벽을 바라보았다. 하빈이 그 모습을 보고 씩 미소를 지었다.
“호오, 헤께록이, 저쪽에 뭐 넣어 뒀냐?”
“아, 아니. 아무것도.”
“맞네, 맞네! 저기에 현금 넣어둔 거지?”
“아니야!”
진짜로 안 넣어뒀다. 저긴 현금 따위가 들어 있지 않았다. 더 중요한 기밀들이 보관되어 있을 뿐!
헼께록은 식은땀을 흘리며 벽 앞을 막아섰다.
“혀, 현금 입금할게. 어디로 주면 되지?”
‘젠장, 망했다.’
이렇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더 수상해 보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페이스에 휘말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이상 속진 않겠지?’
보통 이런 상황이 되면 돈은 필요 없고 등 뒤에 있는 거나 보자! 하면서 밀쳐지는 게 클리셰. 그러나 하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진짜 주는 거야? 천만 달러?”
“그, 그래!”
“흐음…… 어떻게 줄 건데?”
“그건…….”
“앗, 그러고 보니 나도 받을 방법을 생각 못 했네.”
생각해 보니 계좌이체나 카드결제 같은 방식으로 받기는 너무 큰 돈이다. 떡하니 하빈의 계좌를 알려줬다간 역으로 추적을 당할 테고.
‘이건 현시우가 돈 줬을 때랑 좀 다르잖아?’
현시우는 본인이 번 떳떳한 돈이었던 데다 세금도 처리해 줬으니 참 걸릴 게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은 다르다.
헼께록의 돈은 어디서 어떻게 번 건지도 불분명하며, 마이너 패치와 연루된 돈이라 사라졌다는 이야길 듣고 마이너 패치 측에서 역추적을 할 가능성이 높다. 수표나 현금 역시 발행자와 고유번호가 있으니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 차라리 금으로 받는 게 낫나? 어쩐다? 에이, 나 이런 거 잘 모르는데.”
그 고민을 듣고 있던 헼께록만 속이 터졌다.
‘그것도 생각 안 하고 와서 협박부터 한 거야?’
이럴 때 보면 완전히 초짜 좀도둑 그 자체인데.
그러나 여기까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조용히 진입한 실력이나 마이너 패치와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점, 거기다 수준급의 변장술을 쓴다는 점 모두 과할 정도로 실력자다.
‘대체 이자는 정체가 뭐야?’
하빈 몰래 이를 빠드득 갈던 헼께록. 그는 잠깐의 침묵을 틈타 생각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침착하자. 상대는 초짜다.’
돈을 어떻게 가져갈지도 생각하지 않은 초짜. 수준급의 변장을 하고 와서는 지금껏 무력을 보여준 적도 없이 협상과 겁박만 하고 있다.
‘그럼 상대적으로 무력이 약할지도 모르겠어.’
헼께록은 천천히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작은 반지를 돌렸다. 손가락에 낀 다른 반지들에 비해 반짝반짝 빛나지도, 화려한 장식과 보석도 없는 반지였지만 가장 비싼 반지.
바로 호신용 아이템이었다.
‘이걸 쓰면 상대에게 강력한 뇌전 마법 공격을 할 수 있지.’
헼께록이 하빈을 흘끔 보았다. 그가 얼핏 본 하빈은 상당히 방심한 듯 허술한 자세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이야앗!”
파지직!
아이템을 발동한 헼께록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반지에서 강력한 번개가 튀어나와 하빈에게 쏟아졌다.
“엇?”
하빈은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아헤자르를 휘둘렀다.
콰과광!
섬광과 함께 번개와 검기가 충돌했다.
* * *
“역시 잘잘이, 야구 배트 버전으로 들고 오길 잘했어!”
[나는 싫다!]
하빈이 든 아헤자르는 검의 모습이 아닌, 야구 배트로 변신한 버전이었다.
“처음부터 이 모습을 너무너무 해보고 싶었다구! 아니면 오함마 모습이라거나…….”
[오, 오함마라니! 그러면 장르가 바뀌잖느냐!]
“하, 잘잘아. 원래 사람의 인생이란 스릴러와 하드보일드의 연속인 거야.”
[…….]
“어디 보자……. 헼께록이 어떻게 됐을까? 죽진 않았겠지?”
힘 조절했다고.
방 안은 번개와 아헤자르가 부딪힌 여파로 먼지구름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하빈은 희뿌연 먼지구름 너머로 기절해 있는 헼께록을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아직 살아 있어.”
그럼 깨워서 돈 달라고 더 추궁할 수 있겠지!
헼께록이 알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하빈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벽에 난 구멍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어? 뭐야? 옆에 방이 또 있었네?”
방금의 충격으로 부서진 벽의 틈, 그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공간에 하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밀의 방이잖아?
“뭐야? 여기 돈 숨겨 놓은 거 아냐?! 이건 뭐 하는 방이지?”
하빈이 콕콕 아헤자르로 벽을 찔렀다. 그러자 달걀 껍데기 깨지듯 벽 너머의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