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초대받지 않은 손님 (5)
종말교 꾸껠울라칸 지부의 교주 ‘헼께록 엨크잌크사나손’은 오늘도 투덜대고 있었다.
‘후……. 마이너 패치는 대체 날 언제까지 여기 처박아둘 셈인지.’
다른 종말교와 달리 헼께록이 교주로 있는 교단은 마이너 패치와 가장 연관이 깊었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마이너 패치 산하 종말교들. 그곳에서 착복한 돈이 모두 꾸껠울라칸에 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총 관리와 교주를 맡고 있는 헼께록의 지위상 쉽게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다.
‘이 짓도 지긋지긋해.’
물론 이 종말교 건물 안에서야 왕처럼 떠받들어진다지만 매일 반복되는 삶이 지겨울 만도 했다.
돈이 쌓여 가는 것도 즐겁긴 했지만 쓰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한 달에 몇 번씩만 해외 순교니 뭐니 하는 사유로 다른 나라에 방문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마이너 패치에게 자금과 정보를 갖다 바치느라 절반은 해외 출장이나 다름없는 업무.
게다가 평소에는 종말교의 엄숙한 교주를 연기하느라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른다. 어둠, 피, 종말 따위의 언어를 매일 입에 담는 것도 사람 할 짓이 아니다.
‘그나마 여기 놈들이 멍청해서 다행이야.’
이곳은 마이너 패치 산하 종말교의 본부.
그래서 이미 포교가 완료된 충실한 신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덕분에 설교를 온 힘들여 열심히 하지 않아도 알아서 좋답시고 ‘종말! 종말!’거리면서 신나게 호응을 해주었다.
헼께록 입장에서야 매번 설교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니 참 편했다. 게다가 교리 또한 단순해서 이것저것 가져다 붙이기 나름.
‘난 수금만 제대로 하면 되니까 말야.’
종말이 찾아올 텐데 이깟 돈이 무슨 소용이냐, 종말교에 바치고 나면 죽음 이후에도 행복한 삶이 약속되어 있다 따위의 논리로 신도들의 전 재산을 뽑아먹는 게 종말교의 방식.
거기다 마이너 패치에서 의뢰한 불법 실험이나 마약 유통 같은 것도 신과 교주의 뜻이라는 이유를 갖다 붙이며 행한다.
정 안 되면 스킬을 쓰는 방법도 있었다. 헼께록은 각성자 중에서도 꽤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바로 ‘선동’ 스킬.
그가 좀 어설프게 설교를 했다거나 실수를 저질러도 선동 스킬을 쓰면 대부분 무마가 되었다. 충실한 교인들을 더욱 부추기는 데도 도움이 되었고.
가히 사이비 교주로서 가지기에 최고의 스킬이었다. 그래서 에라타도, 별 볼 일 없던 헼께록을 이 자리에 임명한 것이고 말이다.
‘이 스킬 하나로 인생이 바뀌었지. 후후.’
희귀한 스킬이지만 레벨이 낮아 이런 용도로밖에 쓸 수 없다. 설상가상 무력에는 재능이 없어 각성하고도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던 헼께록.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여기까지 올려놓은 건 에라타의 역할이긴 했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헼께록이 주변인들을 물렸다.
“다들 나가 봐.”
“넵, 교주님.”
충성스러운 종말교도들이 재깍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차례차례 나갔다. 헼께록은 남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교주의 방은 꽤나 검소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주변 눈을 의식해 검소한 종교 지도자의 이미지를 위해 애써서 꾸며 놓은 것이었다.
종말교도들은 이 방에 들를 때마다 ‘역시 교주님, 종말을 대비하며 물욕을 버리셨군요.’라며 제멋대로 착각과 감동을 하곤 했다.
헼께록으로서는 코웃음 칠 일이었다.
“흐흐, 어디 보자, 내 이쁜이들이 어디 갔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가 가구 사이에 있는 버튼 몇 개를 삑삑 눌렀다. 그러자 스르륵 지하실이 열렸다.
지하실 계단을 엉금엉금 내려간 헼께록. 그가 다른 스위치를 누르자 지하실의 조명이 팡팡 켜졌다. 화려하게 금칠을 한 방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번쩍하게 꾸며 놓은 헼께록의 비밀 방.
그곳은 그의 수집품을 쾌적한 상태로 보관하기 위한 공기 관리 시스템이 24시간 내내 풀가동되고 있었다. 헼께록은 바로 곁에 있는 유리 전시장을 보며 눈을 빛냈다.
“후우, 새로 들어온 내 한정판 볼렉스 시계들. 너희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매일 설교하느라 사 놓고 제대로 차보지도 못하고.”
주르륵 명품관처럼 진열되어 있는 시계들과 가방, 지갑들은 물론, 내부에 있는 소파와 양탄자까지도 전부 명품으로 가득가득 채워 놓은 헼께록의 방. 헼께록은 소파에 털썩 드러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하지만 이걸 사면 뭐 해. 착용도 못 하고 자랑도 못 하는데.”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굵은 금반지와 다이아 반지를 주렁주렁 껴보며 한숨을 흘리는 헼께록. 그 옆에는 슈퍼카를 종류별로 본 딴 미니어처들도 진열되어 있었다. 모두 헼께록이 직접 사 모은 차들을 그대로 미니어처로 만들어 여기 진열해 둔 것이다.
탈 수 있는 진짜 차는 신도들에게 들킬까 봐 다른 지역에 숨겨놓았기 때문에 사진과 미니어처로만 마음을 달래는 게 헼께록의 스트레스 해소법.
“얼른 후임 구해서 은퇴한 다음, 펑펑 놀아야겠어.”
지금에야 마이너 패치와의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아 이렇게 잡혀 살지만, 돈도 꽤 많이 모았겠다, 계약 연장만 안 하면 굳이 이렇게까지 숨어서 플렉스를 즐길 필요는 없잖은가?
‘물론 마이너 패치가 안 놔주겠다고 붙잡을 수야 있겠지만…….’
한 번 마이너 패치에게 발을 들이면 벗어나는 건 정말 어렵다고 들었다. 배신은 죽음으로 갚는다는 마이너 패치.
‘그래도 적당히 돈 좀 찔러 주고 좋은 관계로 지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탈퇴는 안 하고 교주 행세만 그만두겠다고 한다면야 타협점은 있을 것이다.
“은퇴한 뒤에는 사고 싶은 거 마음껏 사고, 자랑하고 누리면서 살아야지.”
그가 희망 사항을 조용히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뭐어어, 은퇴? 나도 못 한 걸 네가 지금 하겠다고? 열 받네?”
“……?”
어디선가 들려오는 껄렁껄렁한 목소리에 헼께록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누, 누구냐?”
종말교의 본부는 상당한 보안 시스템을 자랑한다. 교주의 방, 그것도 그 안에 숨겨진 비밀 지하실까지 들어올 수 있는 자는 내부인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헼께록이 소리를 높였다.
“내가 나가라고 했는데 왜 들어온 거지? 당장 나가! 종말이 무섭지도 않느냐!”
이 건물 안에서 헼께록은 왕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신도들이든 종말교 관계자들이든 모두 껌뻑 죽고 벌벌 기었으니까.
그래서 오만하게 명령을 내리는 게 그에게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엥, 난 종말 안 무서운데.”
“넌……?”
마침내 상대를 발견한 헼께록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헼께록과 똑같은 얼굴을 한 작자였다.
“뭐, 뭐야? 내가 꿈을 꾸나? 어떻게 내, 내 모습을?!”
그러나 상대방은 헼께록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그의 수집품들을 신이 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왜냐면 그는 교주로 변장한 모습의 현하빈이었으니까. 하빈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 대박이다! 잘잘아 이거 봐. 이거 전부 다이아잖아? 옆에 있는 아이템들이랑 명품들도 다 팔면 값 좀 나가나?”
비록 헌터의 시대가 되었다지만 명품과 보석, 금의 값어치는 변함없었다. 희귀 광물인 다이아몬드는 아이템의 재료로도 쓸 수 있어 오히려 값어치가 올랐다.
게다가 헼께록의 컬렉션에는 값비싼 아이템들도 꽤 보였기에 하빈이 둘러보기에 이곳은 보물 창고 그 자체였다.
“다, 당장 나가! 나가지 않으면 경비를 부를 거다!”
“엥, 경비 부르면 어느 쪽 헼께록을 잡아갈까?”
하빈이 휙휙 헼께록과 하빈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너?”
헼께록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변신한 현하빈은 헼께록 본인이 보기에도 굉장히 똑같아 보였다. 경비 역시 헷갈려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교주가 갑자기 둘이 되었다는 정보가 신도들이나 마이너 패치에게 새어나가도 곤란했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헼께록이 입을 열었다.
“……무, 무슨 아이템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내 돈을 노리는 거지?”
“오, 이 친구는 계산이 좀 빠른 것 같아!”
“돈이라면 주겠다.”
“말도 잘 통하는데?”
하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짝다리를 짚었다. 헼께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돈을 노리는 범죄였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헼께록이 알기로 저 정도로 정교하게 상대방을 흉내 낼 수 있는 스킬과 아이템은 이제껏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사용 시간 같은 요소에 제약이 있거나 무언가 속임수가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시간을 오래 끌수록 저쪽도 불리할 거야.’
돈을 원한다면 적당히 쥐여 주고 돌려보내면 될 것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시간을 좀 끌었다가 저쪽인 방심한 틈에 호신 아이템을 써서 제압하거나, 변신 효과가 풀리는 대로 경비를 부르면 된다.
마침내 여유를 되찾은 헼께록이 하빈에게 물었다.
“얼마……를 원하지?”
저런 놈들이 불러봤자 얼마나 부르겠느냐마는.
고작해야 명품 몇 개 가지고 호들갑을 떠는 걸로 보아서 스케일도 작아 보였다. 무법지대 꾸껠울라칸에서 나고 자란 헼께록은 숱한 범죄자들을 겪어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척 하면 척이지.’
저 녀석은 악질 범죄자의 느낌은 아니었다. 어설프고 또 어설프다.
‘기껏해야 변신 능력 가지고 한탕 해보려 한 게 틀림없어.’
여기 있는 명품들을 다 가져가는 걸로 만족할 게 빤하다.
‘그러니 화려한 물건을 보여주면서 시간을 끌고 주의를 돌리는 게 최선이야.’
생각을 마친 헼께록이 다이아 반지를 주섬주섬 빼서 내려놓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갖고 싶은 거지?”
“엥.”
그러나 하빈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애걔? 겨우 이런 걸로 되겠어? 저 좁쌀만 한 다이아를 누구 코에 붙여?”
‘조, 좁쌀만 한 다이아? 이, 이건 2만 달러(2천만 원)짜리인데! 네깟 놈이 구경도 못 해봤을 크기란 말이다!’
물론 하빈은 글리치에게 베짱이 보일러와 네풀릭스를 제공한 대가로 주먹만 한 보석을 받은 지 하루가 꼬박 되지 않았다. 그러니 저런 반지에 올라간 다이아 같은 게 커 보일 리 없었다.
헼께록은 포기하지 않고 방 한구석에 놓인 반짝이는 조각상을 가리켰다.
“저, 저기 저 장식품은 그냥 장식품이 아냐. 무려 명품 브랜드 테를라니에서 VIP 한정 특별판으로 내놓은, 세상에 단 세 점밖에 없는 보석 조각품이지. 저건 꽤 값이 나갈 거다.”
‘이렇게 말하면 저 조각을 챙겨 나가겠지?’
사실 거짓말이었다. 저 조각상은 여기 방에 놓인 물건 중 가장 싼 물건으로 그냥 모조품이었다. 그냥 하빈의 주의를 끌고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을 뿐.
그러나 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저씨, 내가 이깟 쓸데없는 물건들 갖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난 쟤네 필요 없어.”
“뭐, 뭣?”
헼께록은 머리를 굴렸다.
‘하긴 저 녀석, 명품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
분명 상대는 돈을 원한다고 말했지 물건을 원한다고 한 적 없다. 또한 장물은 처리하기가 꽤 위험하니 섣불리 손대기가 싫을지도 모른다.
‘역시 현금인가.’
“그럼 얼마나…….”
돈을 원한다면 얼마를 원할까? 꾸껠울라칸의 물가는 한국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 기준으로 잡고 생각하자니.
‘십만 달러(약 1억가량)……?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칠십만 달러(7, 8억가량) 정도일지도.’
그가 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있을 때였다. 하빈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 천만 달러!(백 억원!)”
“뭐, 뭐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