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70) (170/268)

170. 초대받지 않은 손님 (4)

“엥, 이렇게까지 즉답할 필요는 없었잖아? 다시 잘 생각해 봐, 선배님.”

“이럴 때만 선배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지?”

마신이 어이없다는 듯 볼멘소리로 지적했지만 하빈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말을 이었다.

“응, 다시 생각해! 쟤네한테 복수할 기회라니까? 가암히 선배 얼굴을 저렇게 끔찍하게 그리고, 명예훼손을 시키고 있는 나쁜 놈들!”

하빈이 화면을 가리켰다. 마침 교주는 빔 프로젝터로 마신의 모습을 띄워 놓고 있었다.

“요즘 종교는 참 현대적이야. 헐, 저것 봐. 빔 프로젝터 나보다 더 좋은 거 쓰네? 저거 화질 대박인데.”

저렇게 비싼 도구를 쓰는 거 보니 진짜 돈이 많나 봐!

스크린에 띄워진 ‘종말교가 생각하는 마신의 그림’은 그때 하빈이 보여줬던 그림보다 더더욱 기괴하고 끔찍한 몰골이었다. 아마 화질이 더 좋아서 디테일함이 살아난 덕분에 그럴 거라며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외침이 이어졌다.

-이렇게 삿되고 악한 존재가! 언제든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오오오…….

끔찍한 그림의 몰골을 본 사람들은 못 볼 꼴을 본 듯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돌렸다. 모두들 두려움과 경멸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교주가 말을 이었다.

-시스템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기 위해 상태창을 내리셨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마신의 손에 이 세계에는 멸망이 도래할 운명이니! 오직 우리 종말교를 믿는 자만이 종말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종말! 종말!

“아니, 대체 어떻게 저런 허접한 교리에 다들 넘어가는 건데?”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하빈. 그녀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뭐 일단 게이트 사태가 터진 것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일 테니, 다른 어떤 허무맹랑한 소리도 일어날 가능성이 0%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리고 사실 멸망은 진짜지 않느냐…….]

여기 또 종말론을 주장하는 성좌가 또 있는 데다.

“흥미롭군. 개소리를 개소리처럼 늘어놓는데 왜 다들 호응을 하고 있지?”

옆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마신도 실존하고 있잖아?

뭐, 이렇게 따지면 다른 사이비보단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종교가 종말교일지도.

하빈은 다시 본론을 꺼냈다.

“아 그래서 교주 역할 나 싫다고. 선배가 하자.”

“나도 싫다.”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팽팽한 입장 차이!

“지금 저렇게 선배를 모함하고 있는데! 그걸 그대로 둘 거야?”

하빈이 다시 화면을 탕탕 치며 회유를 시도해 보았지만 글리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흠, 교주 역할을 안 하고 그냥 다 폭파시키면 될 텐데. 굳이 교주 역할을 할 필요가 있나?”

“교주 역할을 해야 해! 왜냐면 그래야……!”

그래야 교주 자격으로 비밀 장부를 보고 착복해 놓은 재산을 빼돌리지!

‘……라고 대답할 수가 없잖아?’

끄응. 하빈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 아쉬운 건 현하빈이다. 백 억을 빼돌려야 하는 현하빈의 입장과 달리 글리치는 굳이 그렇게까지 나서서 종말교를 없앨 이유는 없다. 애초에 글리치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다 죽여야 하는 거였다면 진작 인간계든 마계든 벌집 쑤시듯 쑤시고 다녔겠지.

지금 따라온 것도 그냥 하빈이 가자고 하니까, 그리고 재밌어 보여서 따라온 게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이왕 할 거면 내가 하는 게 낫긴 해.’

아직 현대 지구에 대해 잘 모르는 글리치가 하빈만큼 교주 역할을 잘할지는 미지수. 게다가 하빈의 목적은 이쪽의 비리를 탈탈 털어내는 게 목적이다. 비리를 터는 김에 겸사겸사 돈도 털고.

그런 정교한 일을 제대로 하려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 한다고, 하빈이 직접 하는 게 훨씬 맘이 편하다.

하빈이 교주로 변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상황을 분석하던 때였다. 글리치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후배님은 집에서 출발할 때 제일 좋은 마법이 매관매직이라고 했었지.”

“그렇지?”

“그것 덕분에 가면마법사보다 한 수 위라고 했고.”

“음, 그런 말을 했던가?”

[했었다!]

“했었어.”

그의 말을 흘려넘기려던 하빈을 단칼에 잘라낸 글리치가 물었다.

“네가 말하는 가면마법사는 어떤 인간이지? 그때 금발 인간과 떠드는 걸로 보아서는 이쪽에서 꽤 알아주는 마법사인 모양인데.”

“……음.”

피데스에 대해 궁금한 건가.

평소 하빈이라면 ‘그냥 학교 교장인데.’ 혹은 ‘가면 쓰고 다니는 마법사인데.’ 따위의 대답을 했겠지만 아무래도 글리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가 무언가 떠올린 듯 씨익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아, 역시 그때 마왕성에서 봤던 녀석인가?”

다른 놈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혼자 마신인 그를 제대로 알아보고 중얼거리던 인간. 그 녀석도 마침 가면을 쓰고 있었지. 글리치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동안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랬나? 둘이 마주친 적 있었어?”

당시 헌터들이 위장해서 마왕성에 잠입했고, 그중에 채지세와 피데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피데스와 글리치가 마주쳤는지는 하빈이 알 길이 없다.

하빈의 불분명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글리치는 말을 이었다.

“그때 인간들이 아주 그 녀석을 최고의 마법사라도 되는 듯 치켜세우던데.”

“그건 맞아. 가면마법사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클래스로 평가받고 있거든.”

세계 최강의 마법사 피데스.

이건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 없는 문장이다. 하빈은 덤덤하게 그 사실을 읊었다. 그러나 글리치는 꽤나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설마 그 녀석이 아직도 최강으로 불리나?”

“응? 그런데?”

“왜지?”

그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후배님이 더 강한데 왜?”

“그야 나는 선량한 힘숨찐이니까?”

“힘숨찐?”

“힘 숨기고 산다고.”

“왜지?”

“엥, 왜 자꾸 ‘왜지?’라고 물어? 갑자기 사람 배고프게? 혹시 웨지감자세요?”

“…….”

하빈의 어처구니없는 전개에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문 글리치. 그 틈을 타 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몇 번을 말해? 난 조용히 살 거라니까. 그런 자리 오르면 곤란해지잖아. 그리고 나 마법사 클래스도 아닌데.”

하빈의 말을 들은 글리치가 낯을 굳혔다.

“그래도 마법을 쓰잖아?”

“안 써.”

“왜……!”

이번에도 ‘왜지?’라고 물을 뻔한 글리치가 말을 갈무리하고 다시 물었다.

“반지도 얻었고, 계약도 했으니 이제 내 마법도 어느 정도 쓸 수 있을 텐데?”

마신 글리치가 두 번째 성좌로 등록된 덕에 하빈은 이런 특성을 얻었다.

특성: 마신의 경이(글리치가 가진 마법 계열 스킬을 불러와 사용할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