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68) (168/268)

168.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마신이 여긴 어쩐 일로…….”

여전히 충격을 받은 레몬. 그를 달래기 위해 하빈은 막대 사탕을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레몬맛 사탕을 문 레몬에게 하빈이 입을 열었다.

“엥, 레몬이 왜 그래? 그전까진 마신이어야 들어올 수 있네 없네 뭐네 하면서 계속 마신을 찾더니.”

“그건 이론상 여긴 마신급이어야 들어올 수 있는 거라 하……빈님이 마신이냐고 물어본 것뿐이라고요!”

다른 이들이 ‘하빈아’라고 부르던 걸 들어두었던 레몬. 그는 현하빈의 이름을 슬쩍 불러보았다. 별 반응이 없는 걸 보아서는 불러도 되는 모양.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레몬에게 다음 말이 들려왔다.

“어쨌든 내가 아니라 이쪽이 마신이야. 네가 찾던 그 마신 말이지!”

하빈이 싱글거리며 글리치를 가리켰다. 글리치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이제 후배님도 마신이잖아.”

하빈이 홱 글리치를 돌아보았다.

“뭐야, 나 마신이야? 왜?”

“반지를 차지했으니까.”

글리치가 까닥까닥 하빈의 손을 가리켰다.

“이제 후배님이 마계의 주인이지. 그걸 좀 기억해 줬으면 하는데.”

“뭐?”

하빈이 와작 인상을 찡그렸다.

“이봐 꼰대, 내가 계속 선배라고 불러주니까 감 잃은 거야? 긴장 안 하지? 내가 마신 그거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반지 이거 도로 가져가라고!”

안 한다고 뻗대도 억지로 반지 준 것 때문에 화났던 현하빈. 그 분이 풀리지 않았기에 처음엔 글리치를 소환해서 핵맵닭볶음면만 한 달 내내 먹여 볼까 생각까지 했었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반지를 빙글 돌리는 그녀를 향해 레몬이 외쳤다.

“그럼 역시 하빈 님 마신 맞았잖아요!”

주민등록증이니 뭐니 해서 괜히 헷갈렸네!

주민등록증까지 보여주면서 마신 같은 거 아니라며 우겼던 현하빈. 그녀는 팔짱을 끼며 받아쳤다.

“흥, 마신이고 뭐고 은퇴할 거야. 내가 거절했다니까? 결국 어쨌든 마신 아니라고. 난 평범한 백수…… 아아니, 학생이지.”

일단 고등학교에 학적을 등록했으니 하빈은 어엿한 학생이다. 나라에 강제 동원되지 않는, 보호받는 위치! 레몬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알겠어요. 그럼 마신 때려치운 학생님. 오늘은 어쩌다 여기에 온 거죠?”

‘설마 마신 소개해 주러 왔던 건가?’

레몬을 생각해서 마신 소개해 주려고 이공간에 온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현하빈은 기상천외한 행적을 보여왔으니까. 레몬과 달리 하빈은 이공간 진입에 제약이 없는 모양이니 심심해서 들락거렸다 해도 말이 된다.

그러나 하빈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응? 아냐. 마신은 여기 온 김에 겸사겸사 레몬이에게 얼굴 보여준 것뿐이고 우리가 찾는 건 따로 있어.”

그래서 레몬을 부른 것도 있다. 레몬이 개입하면 이공간 안에서도 바깥을 살펴볼 수 있다는 좋은 점이 있으니. 저번에 하빈에게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 레몬. 그걸 떠올렸는지 레몬의 표정이 퍽 진지해졌다.

“찾고 있다고요? 뭘 찾으시는데요?”

“사이비. 여기 근처에 사이비 교단이 있을 거거든!”

“사이비요?”

하빈이 주변의 오류를 휙휙 둘러보았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오류가 이어져 있다 해도 이공간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의 오류만 제대로 보인다. 그래서 굳이 꾸껠울라칸까지 공간이동을 한 것이기도 했다. 사이비가 있는 주소지로 도착해야, 그나마 근처 오류를 찾을 수 있을 거 아닌가?

사이비 교단 중에서도 강경파나 경계심이 많은 곳들은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가거나 기웃거리지 못하게 건물을 폐쇄적으로 짓는다. 창문에 철창을 달아놓기도 부지기수.

‘게다가 교주의 방이나 금고같이 중요한 공간일수록 훨씬 더 신경을 쓰겠지?’

물론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이비 교단을 누가 지키고 있든 무력으로 쓸어버리면 깔끔히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이번엔 던전이 아닌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도 조직적으로 무리 지은 사람들. 종말교의 교주에 속아서 모여든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건 도의적으로도 어려운 일이었고, 관심도 너무 많이 끈다.

‘나랑 선배 단둘이 쓸어버렸다는 걸 언론이 알게 되면 해외 뉴스 토픽감이잖아?’

떠들썩하게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건 정말이지 사양이었다. 모름지기 몰래 들어가서 몰래 털고 나오는 게 최고지.

‘이왕 들어가려면 누구도 생각 못 한 방법으로 침입해야 한다고.’

하빈은 레몬에게 팔락팔락 사이비와 관련된 서류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종말교의 본부 사진도 있었다.

“레몬아, 사이비 교단은 이렇-게 생긴 곳인데. 혹시 어느 오류로 들어가야 여기가 나오는지 아니?”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레몬.

“아뇨……. 제가 이쪽 나라는 잘 몰라서 좀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빨리 찾아보자!”

“넵…….”

레몬은 반짝이는 오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짓 하나에 별처럼 반짝이던 오류들이 주르륵 그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곤 레몬의 눈앞에서 얼핏얼핏 바깥의 모습을 반투명하게 드러냈다.

건물의 모습, 도로의 모습, 학교의 모습들이 차례대로 비쳤다. 모두 꾸껠울칸의 도심지를 비춘 광경이었다.

“좀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얼마만큼?”

“하, 한 시간……?”

“흐음.”

뭐 좋아.

한 시간쯤 기다리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심심하면 여기서 네풀릭스 봐도 되니까. 하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글리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른 오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틈을 타 레몬이 하빈에게 슬쩍 물었다.

“네. 그럼 열심히 해볼게요, 그리고…….”

레몬의 시선은 멀리 있는 글리치를 흘끔대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여전히 믿기진 않지만…… 저쪽이 진짜로 전설 속의 마신인 거죠? 어쩐지 하빈 님과 느낌은 꽤 비슷하네요.”

“뭐? 대체 어디가 비슷해?”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이질적인 기운이라고 해야 할까요.”

“흠?”

하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래도 둘 다 시스템이 판단하기에 오류인 존재. 그래서 그래 보이는 건가. 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레몬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빈 님보다 저쪽이 더 약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인지…….”

“누가 누구보다 약하다고?”

“헙.”

글리치의 말에 레몬은 다시 오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빠, 빨리 찾을게요!”

“좋아, 레몬아. 수고해!”

하빈이 흡족한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냈다. 과자와 사탕, 초콜릿 등의 군것질거리였다.

“찾다가 당 떨어지면 이것도 먹으면서 하고.”

“감사…합니다.”

“봐, 내가 이렇게 복지를 잘 챙겨주는 좋은 사장…… 아아니, 학생이라니까?”

하빈이 흡족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동안 물끄러미 간식을 쳐다보는 레몬. 레몬은 꽤 간식들이 마음에 든 표정이었다. 다시 작업에 집중하는 레몬과 여전히 오류들을 힐긋거리는 글리치를 내버려 두고, 하빈은 인벤토리 안에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럼 나도 오랜만에 이걸 좀 봐야겠다.”

하빈이 꺼낸 건 오래전에 인벤토리 안에 구겨 던져넣은 물건. 남색의 종이에 휘갈겨진 메시지.

바로, ‘존재할 수 없는 편지’였다.

* * *

하빈은 이리저리 편지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디보자…….”

-삐익?

오랜만에 보는 편지 아이템에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아니, 그 편지는! 저번에 네가 구겨 넣었던, 내용이 안 읽히던 편지잖느냐. 마음에 안 들어서 인벤토리에 박아 둔 것 아니었느냐?]

“그랬지?”

[내용이 안 보일 텐데 왜 뚫어져라 보고 있느냐?]

“역시 잘잘이에겐 아직도 안 보이는 건가?”

[다 희뿌옇게만 보인다.]

리베를 처음 만났던 거울 던전에서 얻은 편지. ■■차의 ■■■이 남겼다고 적힌 편지는 ■로 표시된 필터링 때문에 내용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다.

“그래. 나도 그땐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서 몇 개밖에 해석하지 못했어.”

하빈은 손가락을 뻗어 지익 편지지를 훑었다. 필터링으로 가려져 있는 구간들이 하빈의 손을 스치는 순간 일렁, 움직였다.

파직-

찰나의 순간, 몇 가지 글자가 흐릿하게 드러났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잠겼다.

‘그래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웬만큼 있었지.’

리베를 키우는 방법이라거나, ‘별의 서’ 같은 단서 말이다.

필터링으로 가려져 있는 것도 세계의 법칙. 오류 그 자체인 하빈에게는 충분히 해결 가능한 문제였다. 물론, 그때 당시엔 불가능했지만.

‘바로 이렇게.’

스윽, 손끝이 스칠 때마다 파직파직 일렁이며 얼핏 드러나는 필터링 너머의 내용.

‘저번에 에러메이커 스킬을 얻고 난 뒤로 좀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하빈은 아직까지 편지의 내용에 대놓고 휘둘릴 생각은 없다. 왜냐면 이 편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하빈은 상념을 털어내며 글리치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 선배. 선배도 이거 봐봐. 어떻게 보여?”

“……?”

편지를 발견한 글리치의 낯이 굳었다. 밤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깊은 남색의 편지를 향해 손을 댄 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어디서 난 거지?”

“던전에서 주웠어!”

“…….”

아연하게 침묵하던 글리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짓말. 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던전에서 이런 걸 줍고 다닐 수 있는 거지?”

“허참, 진짜 주운 거 맞는데? 그리고 잘살고 있는 남의 삶에 대고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삐이, 삐삐.

리베가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 편지는 리베의 알과 함께 발견됐었지.

하빈이 리베를 쓰다듬는 동안 편지를 살펴보던 글리치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 오류가 너무 많은데. 작은 종이 하나에 이 정도로 많은 금기와 오류가 존재할 수 있나? 누가 보면 세계의 비밀이라도 담고 있는 문서라 해도 믿겠어.”

“……으음.”

하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반응에 글리치의 동작이 우뚝 멎었다.

“뭐야, 진짜인가?”

진짜 세계의 비밀이라도 담긴 문서인 건가?

“으음, 그거야 나도 모르지.”

시선을 피하는 하빈의 대답에 글리치는 다시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이 오류들로 뒤덮여 내용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게 편지의 형식이라는 건 알아볼 수 있었다.

‘느낌이 좀…… 비슷한데.’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편지의 필체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도, 그리고 편지를 이루고 있는 불가사의한 힘도.

‘이 인간 힘이랑 닮았어.’

글리치는 힐끔 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아니다.”

왜 쳐다보냐는 듯 묻는 하빈의 질문에 글리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게 이걸 보여줬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응, 아까도 물었잖아. 어떻게 보이냐고.”

거기에 내놓은 글리치의 답은 ‘세계의 비밀이라도 담긴 문서냐’라는 거였다. 그리고 글리치는 이내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걸 보니 다른 추측이 불쑥 고개를 든다. 게다가 현하빈이 이 편지에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이 편지에 담긴 힘이 기이할 정도로 현하빈과 유사하다는 것도.

그걸 조합하자, 말도 안 되는 가설이 고개를 들었다.

침묵하던 글리치는 천천히 편지지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현하빈이 그랬던 것처럼 필터링이 일렁이며 숨겨져 있던 내용이 드러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글리치는 흠칫 놀랐다.

그 일렁임의 첫 번째 문장부터가 이상했으니까.

[나,] 지금 이거 읽고 있나?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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