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한편 그 시각. 코니의 별장.
코니는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한 김에 한국 길드들과 관련된 재료 수급과 VIP 고객 관리 등의 잡무를 끝냈다. 그리고 비서를 불렀다.
“코니 님, 부르셨습니까?”
“……어제, 하빈 양과 같이 있던 그 은발의 남자 말인데.”
늦은 시간인 데다 진짜 친할머니도 아니니 괜한 오지랖을 부릴 수는 없었다.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해도 하빈이 극구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더 말리겠는가.
게다가 백 억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도움을 청하지 않는 그 강인함에 뭐라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그저 너무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만 남겨두었을 뿐.
‘한 번 컨티뉴의 VIP는 영원한 VIP이지요.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요.’
“그렇다고 해도 진짜로 연락을 남길 아이는 아니지.”
힘든 일을 겪어도 아이템에 대한 예술적 가치를 존중한다며 끝까지 팔지 않았던 게 현하빈이다. 거기다 매번 특급 서비스와 선물을 보내도 부담스러워하며 거절하던 청렴하고 바른 아이. 코니가 보기에 현하빈은 그런 아이였다.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세상이란 게 참 험난한데, 그걸 모를까 봐 걱정이군.”
“역시 코니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저렇게 아무나 함부로 도와주는 건 위험한데…….”
비록 하빈은 은발의 남자를 본인의 지인이라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니가 느끼기에 그 남자는 걸리는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글리치는 들어오는 동안 별장의 경보 장치에도 걸리지 않았고, 코니가 확보한 위험인물 리스트에도 없었다. 그러나.
삼자대면을 했을 때.
‘어딘가 윗사람의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였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사람의 본성과 습관은 드러나기 마련. 사업을 하는 코니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익숙했다. 앉아 있는 태도, 말을 할 때의 어조, 습관, 시선 처리에서도 그 사람이 인생이 묻어나온다. 그리고 글리치는…….
‘어딘가의 고위 관료나 유력가 자제라고 해도 믿을 아우라가 있었어.’
얼핏 스치는 눈빛만 보아도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집도 돈도 없다고 재워 달라 부탁했다고?
‘그동안 현하빈은 묘할 정도로 주변에 거물이 많이 모여들었지.’
이번에도 은발의 선배는 보통 존재가 아닐 것 같다. 코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에 걸리는 점이 많아서…… 그 사람에 대해 조사를 할 수 있겠나?”
“알겠습니다.”
비서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 *
“……너무 심했나?”
현시우는 카톡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보고 있는 건 하빈에게 답장했던 마지막 메시지.
‘손님은 내 침대가 아니라 네 침대에 재워야지.’
이렇게 말하면 보통은 반격을 하거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거나 하는 게 하빈의 스타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뭔가 정보를 들어볼까 싶어서 일부러 거절의 의사를 표명했을 뿐이었는데.
이번의 현하빈은 읽고 그대로 씹었다.
[진짜로 현하빈의 침대에 재운 거 아니냐?!]
“흠, 그럴 애는 아닌데.”
아마 현시우의 대답을 무시하고 말없이 그의 침대에 마신을 재웠거나 거실에 이불 깔아 재웠거나 했을 터. 현시우는 찜찜한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읽씹 할 줄 알았다면 그냥 내 침대에 재우라고 말해줄 걸 그랬나? 마신을 내 방에 들인다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현하빈은 그동안 현시우의 정체를 눈치 못 챘다. 하지만 마신의 눈썰미는 다르다. 혹시라도 마신이 현시우의 방에서 ‘현시우=피데스’인 증거를 잡아낸다면 무척 곤란해진다.
‘특히 마신은 50층에서 마주친 적이 있으니까요.’
은발의 시종으로 나타났던 마신. 현시우는 그와 제대로 눈을 마주친 적이 있다. 잠깐이었지만 소름이 돋는 눈빛, 본질을 간파하는 듯한 시선. 만약 피데스를 봤던 마신이 현시우의 방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그걸 현하빈에게 전달한다면…….
“안 되는데.”
그래서 현시우의 방에 안 들어가길 바란 것도 있었다. 당장 현시우가 마신을 상대하러 가는 게 어렵기도 하고.
[그런데 현하빈과 마신 단둘이 있는 건 걱정이 안 되냐?]
뒤늦게 덧붙인 네아이바의 질문에 현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이요?”
어떤 부분에 대한 걱정을 말하는 거지?
“아, 혹시 마신을 걱정해야 하는 겁니까?”
[…….]
현시우는 짐짓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해 보니 마신이 좀 걱정되는군요.”
현하빈과 마신이 싸운다? 그럼 마신이 질 듯!
[그, 그건 그렇지.]
그들이 기억하는 마신의 마지막 장면은 현하빈에게 멱살 잡혀 핵맵닭볶음 고문을 당하던 안타까운 모습. 전혀 하빈이 질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게다가 그동안 현시우는 1회차의 하빈이 겪었던 일들을 안다. 수없는 적대 파벌의 공격과 모함, 암살이 밀어닥쳐도 현하빈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다 제대로 처리해 버렸다. 그 점은 마신이라 해도 예외가 없을 터.
“물론 은발이라는 점이랑 갑자기 현하빈의 옆에 나타났다는 점만 가지고 그가 마신이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되지만요.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찾아보고 만일의 사태에 방비해야겠습니다.”
아무리 현하빈이 강하다 한들 그녀가 언제나 무사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백 억을 털린 것처럼 금전적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그녀가 지켜낸 소중한 집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시우는 여전히 하빈의 상황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당장 집에 가는 건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별일 없어야 할 텐데…….”
끊임없이 밀려들어 오는 업무 연락 알림을 보며 현시우가 끄응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나면 마이너 패치와 마신이 없는 틈을 타 진짜 집에 방문해 보는 게 좋겠다.
* * *
한편 하빈의 집에서는.
“자, 이제 내 완벽한 계획을 들었지? 그러니까 채씨는 곱게 집에 돌아가면 돼.”
“그게 뭐가 완벽…….”
“그리고 언니한테는 전부 비밀이야, 알겠지? 쉿!”
하빈은 채지석에게 사이비를 털 계획을 비밀에 부쳐달라며 부탁을 가장한 협박을 하고 있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입이 근질근질하다며 입술을 씰룩거립니다.]
“반짝이 너도 비밀로 하도록 해! 우리 언니가 알면 걱정할 거란 말이야.”
하빈이 처연하게 눈썹을 내려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도 무리해서 차도 구해주고 해킹도 해주고 SPES에 백리다를 넘기는 것까지 도와준 채지세.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지!’
그리고 솔라리스는 채남매가 함께 운영하는 길드다. 채지석이 학교와 솔라리스 업무를 내팽개치고 함께 사이비를 털었다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럼 솔라리스 이미지에 너무 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내버려 두고 빨리 솔라리스로 돌아가, 채씨. 걱정하지 말라구! 사이비도 하루 컷으로 털어올게!”
“그걸 어떻게 하루 컷…….”
반박하려던 채지석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50층은 하루 컷 하면 되지!’라고 외쳤던 현하빈. 그녀는 진짜로 하루 만에 마왕성을 평정하고 마신을 울렸으며 반지까지 챙겨왔다. 하빈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하루 안에 못 돌아오면 그때 걱정하라구.”
[그래, 하루 안에 못 돌아오면 사이비 종교를 걱정해 주도록 해라. 너무 많이 부숴서 뒷정리하느라 연락이 늦어진 걸 수도 있으니.]
“…….”
왜 진짜로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그래도 솔직하게 말해준 게 어디냐.’
채지석은 찜찜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하빈의 제안에 수긍했다. 지난번 백리다를 잡아 SPES에 넘겨줬던 건 국제적 범죄자임이 확실한 데다 솔라리스 입장에서도 뒤탈이 없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먼 이국의 사이비 종교를 터는 건 솔라리스가 끼어들 명분이 없다. 후폭풍도 엄청날 테고. 결론적으로 하빈의 제안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슨 일 생기거나 하면 연락해.”
“음? 그래. 뭐 굳이 그런다면야.”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아! 오는 길에 유리버셜 스튜디오도 들를까? 혹시 그렇게 되면 채씨랑 언니도 부를게! 시간 남으면 놀고 오자.”
“…….”
정말 어디 놀러 다녀오는 듯한 긴장감 없는 태도에 채지석은 더 이상 말리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 * *
“와, 진짜 마신 개꿀이네. 비행기 표를 안 끊어도 되잖아? 입국 절차도 없고.”
채지석을 어렵사리 돌려보낸 후, 글리치의 순간이동 기술 덕분에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 휙 꾸껠울라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한국의 도로와 달리, 꾸껠울라칸의 도로 곁으론 이곳저곳 깨진 보도블록과 허름한 건물의 광경이 보였다.
“이쪽이야!”
낯선 나라에 적응할 틈도 없이, 하빈은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글리치를 잡아끌었다.
꾸껠울라칸은 무법지대로 유명한 나라다. 길거리에서 강도나 사기꾼에게 붙들려 곤란한 일을 겪을 수 있는 곳. 물론 하빈과 글리치가 그들에게 질 리는 없겠지만, 괜히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는 건 사양이었다.
실수로 싸움 났다가 상대를 소멸시켜 버린다면? 혹은 도와주겠답시고 대사관 관계자가 그들에게 접근하기라도 하면 불법 밀입국인 게 걸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지.
“지금부터는 눈에 안 띄게 잠입해야 하니까 여기로 들어가자구.”
하빈이 손을 뻗어 에러메이커 스킬로 오류를 생성했다. 쑤욱 오류를 비집어 공간을 여는 하빈을 보며 글리치가 고개를 기울였다.
“오, 이게 후배님이 쓰는 차원 간섭 방식인가?”
오류를 뚫고 이공간에 진입한 그들. 무지갯빛 이공간을 처음 본 글리치는 흥미롭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선배는 이거 몰라?”
“나도 차원을 넘나드는 방식은 가지고 있지만…….”
이쪽이 더 직관적이고 능숙하다.
게다가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이 인간은 극한의 허무를 단번에 극복해 내었지.’
같은 속성이라도 경지가 이 정도나 차이가 난다는 건가.
‘정말 지독한 오류인가 보군. 관리자가 안다면 속이 많이 썩겠는데?’
어쩌면 세계의 근간을 흔들 급의 오류일지도. 글리치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하빈은 어느새 저 멀리 뛰어가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레몬아! 반가워.”
“히익.”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 레몬. 하빈은 그 모습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짜잔, 오늘은 내가 누굴 데려왔게?”
레몬은 하빈의 뒤에 있는 글리치를 흘끔댔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낯선 남자.
‘저번에 본 마왕이나 영웅들과는 또 다른 얼굴인데.’
대체 얼마나 많이 데려올 수 있는 거야, 이 인간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이 공간에 이렇게 많은 존재들이 들락거린 날이 있었던가. 레몬조차 그의 속성과 특성,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 찾아냈던 최후의 안식처. 이곳이 점점 모임의 장으로 변해가는 희한한 상황에 레몬은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누군데요?”
일단 하빈이 물었으니 레몬은 힘없이 장단을 맞추었다. 하빈은 신이 나서 대답했다.
“저번에 네가 마신을 계속 찾았잖아?”
“안 찾았는데요…….”
그냥 현하빈의 정체가 마신이 아니냐고 계속 물어봤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아니, 그래도 내가 특별히 레몬이를 생각해서 진짜 마신을 데려왔어!”
“진짜…… 마신이요?”
“짜잔!”
하빈이 두 손을 쫙 펼치며 글리치를 가리켰다.
“이쪽은 본투비 마신! 오리지널 마신! 찐 마신 글리치!”
“네. 네에엑?!”
비틀.
“어이쿠, 조심해야지!”
기절할 듯 비틀거리는 레몬을 하빈은 상냥하게 붙잡아 주었다.
“마, 말도 안 돼…….”
물론 레몬의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