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66) (166/268)

166. 홈 스윗 홈 (5)

“현하빈!”

집의 초인종을 누른 건 바로 채지석이었다. 허겁지겁 달려온 그를 보고 하빈이 안도의 낯을 했다.

“뭐야, 채씨잖아? 괜히 긴장했네.”

“누군 줄 알았는데?”

“혹시 현시우인가 싶어서. 백 억 잃어버리고 마주치는 건 아직 꽤나 곤란하다고!”

그 말에 채지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네 오빠면 집 비번을 알지 않을까?”

“아…… 그런가?”

[거봐라. 아이큐 187은 무슨! 그 생각을 못 하다니.]

‘뭐? 지금 내 머리를 의심하는 거야? 현시우도 초인종 누를 수 있지. 오랜만에 오면 비번 기억 안 나거든?’

원래 비번은 몸이 기억하는 거다. 뚜껑 열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는 대로 입력하는 것이 비번의 국룰.

그 흐름이 깨지면 매일 집을 출입하던 사람도 ‘어? 비번이 뭐였지?’ 하며 멈칫하는 게 다반사. 머리로 기억하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현시우는 길게 5년, 짧게는 한 달 넘게 집을 비웠으니 오랜만에 집에 와서 비번이 기억 안 날 수도 있다. 암, 그렇고말고!

‘근데, 김잘잘 너, 아이큐가 뭔지도 아네?’

그건 또 언제 알았대?

아마 이번에도 요리조리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모양이다. 저번에 아이큐 187의 명탐정 하난 컨셉이 궁금했던 모양.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빈은 팔짱을 끼며 채지석에게 물었다.

“그래서 채씨는 무슨 일이야? 나 지금 엄청 바쁜데.”

“……바쁘다고? 네가?”

‘바쁘다’는 단어에 채지석의 눈썹이 치켜올라 갔다.

“왜 바쁜데? 네풀릭스? 뮤튜브 보느라? 아니면 맛집 찾으러?”

“아니…… 그 셋 다 아닌데.”

그 셋 다 아니라니. 그 말에 채지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현하빈, 바로 그게 가장 수상한 점이야!”

“그게 왜?”

“네 평소 패턴을 돌이켜 봐. 노는 것도 아닌 일로, 네가 대체 학교까지 결석해 가며 무슨 일을 할 셈인가. 제삼자가 보기에 무척 걱정이 되거든?”

그게 바로 이 채 선생의 가정방문 이유였다.

휴교에 대해 무척 아쉬워했던 현하빈. 그런 현하빈이 학교까지 빠지고 뭔가를 한다. 그것도 쉬는 것조차 아니다!

무슨 짓을 벌일지 당연히 수상하고말고.

‘몰래 킬스크린 26층도 클리어하고, 50층도 깨부수고. 저번엔 사이비 털면 돈 얼마 나올까 궁리를 하던 애였으니.’

이 패턴이라면 현하빈은 진짜 사이비를 털 거다. 그걸 잘 알았기에 바로 온 거다.

“내가 너 거짓말 하는 걸 한두 번 봐야 말이지.”

“크흠.”

하빈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마신을 데리고 사이비를 털어볼까 했던 일은 채남매에게 말하지 않은 참이었다. 사이비를 털어보겠다고 말은 했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터는지는 비밀.

‘왜냐면 채남매는 사이비랑 엮이면 곤란하니까.’

양지에서 활동하는 솔라리스. 빛 그 자체라고 불리는 그들이 괜히 사이비에게 보복을 당하는 일을 피하고 싶었다.

‘저번에 지세 언니가 많이 도와줬는데 그런 민폐까지 끼칠 수는 없다고.’

그러나 채지석은 바로 눈치채고 달려온 것이다.

“역시 너 사이비 털러 가는 거지? 그것도 그 옆에 있는…… 분이랑.”

채지석은 글리치를 힐끔 보며 조금 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이분, 사람……은 아니지?”

하빈이 재빨리 덧붙였다.

“이, 이분은! 김리치라고, 이 일대 최고 부자야!”

[김씨는 이제 더 이상 안 붙인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래도 김씨가 제일 찰떡인 걸 어떡해? 김(金)에다 리치(rich)라니. 최고 부자 맞잖아.”

슬쩍 돌멩이처럼 건네는 보석 하나조차도 몇천만 원에, 마계의 지배자였던 존재.

‘꼰대지만 부자 선배, 뭐 그런 거지.’

그래도 김잘잘의 항의가 있으니 좀 수정을 해보자.

“그럼 권씨? 권리치라고 할까?”

“현하빈.”

그 말을 듣던 채지석이 한숨과 함께 끼어들었다.

“이분, 마신이지?”

“……어?”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빈이 슬쩍 눈을 피했다. 그녀가 채지석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어이없단 낯을 했다.

“하, 하하, 채씨도 참. 뭔 소리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마신이라니?”

“…….”

하빈은 흘긋 글리치를 곁눈질했다. 지금 글리치는 마왕성에서 봤을 때랑은 모습을 조금 더 바꾼 버전이라 채지석이 바로 눈치챘을 리 없는데.

‘그리고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했잖아!’

50층이니 마신이니 하는 것들은 채남매와 하빈만 아는 극비 정보! 그런 걸 어떻게 다른 사람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 있냐는 하빈의 눈빛에 채지석은 일단 소리를 낮췄다.

“그렇지만 현하빈, 네가 둘러댄 말에는 오류가 있었는걸. 이 일대 최고 부자는 김리치라는 분이 아니셔.”

“그럼 누군데?”

“나랑 누나.”

“…….”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우리 계약자들이 이렇게 돈 많은 거 몰랐냐며 깐족댑니다!]

맞다, 솔라리스가 한국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꼽혔지.

하빈은 일단 이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아, 아니 내 말은, 어? 한국 단위가 아니라, 우리 구, 우리 동! 지역 유지! 지역 유지라는 거지.”

하빈이 처억 글리치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분은 마포구의 지역 유지!”

“하, 지역 유지……?”

이번에 한숨을 뱉은 건 글리치였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낯을 찡그렸다. 무려 마신이 서울의 지역 유지 취급을 받고 있으니 기분이 상한 모양.

‘그렇지만 여긴 마포구거든? 나름 상권 좋고 땅값 비싸다고!’

홍대 거리에 건물 몇 개만 들고 있어도 갓물주 인생인데! 마신이라 그런 걸 모르네! 이래가지고 서민은 서러워서 살겠나.

재벌과 마신 사이에 끼인 하빈이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 백 억을 되찾든가 해야지.’

그러니 당장 사이비 털러 가야 한다. 하빈이 채지석을 떨쳐내려 대충 둘러댈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잠잠하던 침묵 사이로 글리치가 폭탄을 던졌다.

“흠, 자세히 보니 저 인간, 저번에 마왕성에서 본 네 심복이군. 맞지?”

“…….”

“…….”

싸해진 분위기. 그러나 글리치는 그걸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 채지석을 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마왕성에서 봤을 때…… 딱 봐도 마족이 아니던데 다들 눈치를 못 채더군. 그래서 기억하고 있었지.”

당시 마왕성에서 채지석이 위장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

‘가면까지 썼는데 어떻게…….’

하빈의 낭패한 표정을 읽은 글리치가 뿌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알아보기 쉬웠다. 인간이랑 마족은 냄새, 신체적 특징, 태도가 모두 다르…… 읍, 읍읍!”

하빈이 뒤늦게 글리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 꼰대 선배가! 왜 그 사실을 여기서 말해? 내가 입단속 하라고 했잖아!’

전부터 글리치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던 하빈.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지석에게 대놓고 아는 척을 하고 마밍아웃까지 하다니.

이제 글리치가 마신이 아니라고 발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 하빈은 슬쩍 채지석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지석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현하빈. 나 진짜로 이미 다 알고 왔다니까. 내 능력 잊었어? 이번에도 비밀 꼭 지킬 테니 그냥 솔직하게 말해봐.”

어정쩡하게 글리치의 입을 막은 하빈을 향해 채지석이 물었다.

“사이비, 어떻게 털 생각인데?”

* * *

“크윽…….”

“자, 먹으려면 제대로 먹어야지, 선배님. 겨우 떡볶이 하나로 울면 쓰나?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그래도……!”

“자, 하나 더 먹자!”

“커헙!”

마신인 걸 채지석에게 떠벌렸다는 이유로 결국 하빈에게 붙잡혀 욥기떡볶이 떡을 입에 문 글리치.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빨간 국물을 노려보았다.

“이게…… 음식이라고? 거짓말이지?”

옆에 있던 채지석이 설명했다.

“음식 맞아요. 여기선 어린애들도 떡볶이를 먹습니다.”

모두 욥떡을 먹는 건 아니지만.

“그게 무슨…….”

글리치 역시 전혀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채지석은 신빙성을 더해주기 위해 어묵 하나를 스윽 집어먹으며 하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빈은 마침 돈가스 포장을 뜯고 있었다.

“채씨, 염단 돈가스를 가져왔으면 가져왔다고 바로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처음부터 환영해 줬을 텐데!”

그녀는 이미 거실에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어차피 채지석도 난입한 데다 글리치도 벌칙으로 욥기떡볶이를 먹여줘야 하고 겸사겸사 아점을 먹고 출발하기로 계획을 변경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채지석이 손에 염단 돈가스를 가져온 게 큰 이유긴 했다.

‘짠, 오는 김에 겸사겸사 염단 돈가스 사왔어.’

‘헉, 대박!’

이건 당연히 먹고 가야지.

신이 나서 돈가스와 떡볶이를 집어 먹는 현하빈. 덕분에 말을 붙일 여유가 된 채지석은 이리저리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있었다.

“진짜로 둘이 갈 생각이었어?”

“응?”

“사이비 터는 거.”

물론 마신과 현하빈의 전력이라면 전혀 걱정이 안 된다. 오히려 사이비 종교가 불쌍해질 지경.

‘실수로 힘 조절 잘못해서 지구가 두 쪽으로 갈라지는 거 아니야?’

일단 마신이 여기 소환된 것부터가 전 지구적 비상이긴 한데.

그런데 마신보다 더 센 현하빈이 있는 것도 세계적으로 알리지 않았는데 마신 나타났다고 경계하는 것도 좀 이상한 듯하고.

채지석은 하빈의 부탁대로 마신의 등장을 비밀에 부치겠다고 약속했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저런 존재를 비밀에 부쳐도 되겠냐며 걱정스러워합니다.]

가장 가까운 빛의 입장에서는 전 지구적 위기가 될 수 있는 엄청난 변수. 그걸 비밀에 부치는 게 걱정이 된 모양. 그러나 채지석이 보기에 지금의 마신은…….

“……큽, 어떻게 이런 걸 먹는 거지?”

‘설마 떡볶이 먹고 우는 건가?’

그저 흔한 맵찔이처럼 보였다.

사람을 잘 볼 줄 아는 채지석의 판단에서도 그리 크게 해가 되는 존재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왕성에 등장했을 때도 반지만 넘겨주고 순순히 물러났던 행적이 있었고.

‘게다가 솔직히 따지자면 마신보다 현하빈이 무력으로는 우위지.’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현하빈 선에서 처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 채지석이 마신이 여기 있는 걸 반대한다 해도 제대로 돌려보낼 수 있는 것 또한 현하빈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무슨 생각인지나 먼저 들어 보는 게 맞아.’

결론을 내린 채지석이 하빈에게 물었다.

“그래, 그러니까 둘이서 사이비를 어떻게 털 셈이야? 피데스 님도 골치 아파하는 게 사이비인데.”

무력만으로 해결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다. 사이비는 특히 폐쇄적인 집단이라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 텐데.

채지석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읽은 현하빈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가면 마법사가 사이비를 못 잡는 건 마법이 약해서야.”

“……마법이 약했다고?”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로 손꼽히는 게 피데스였다. 그가 마법이 약할 리가 없을 텐데.

의아한 표정의 채지석을 향해 하빈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이걸 보라는 듯 서류에 있는 교주의 사진을 톡톡 건드렸다.

기만자의 소망!

스킬을 사용하자 하빈의 모습이 스르륵 바뀌었다. 사진에 있는 교주의 모습으로 변하는 현하빈. 그 모습을 본 채지석이 알았다는 듯 외쳤다.

“설마 너, 사이비 교주를 사칭할 거야?!”

“물론! 이게 바로 이 세상 최고의 마법, 매관매직!”

“그거 마법 아니잖아! 스킬이긴 하지만…….”

[아니, 애초에 매관매직(賣官賣職)은 매직(Magic)도 아니고 돈으로 신분을 사고판다는 의미의 한자성어가 아니냐!]

놀라 숨을 들이켜는 둘을 향해 하빈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외쳤다.

“하, 잘잘아. 내가 마법이라면 마법인 거야! 두고 보라고, 지금부터 내가 피데스보다 몇 수 위의 ‘마-법’을 보여줄 테니까!”

세상은 사칭과 선동…… 아아니, 마법과 전략으로 헤쳐 나가는 곳이지!

하빈이 그럼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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