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홈 스윗 홈 (4)
“하, 정말 이쪽 세계도 내가 살던 곳과 다를 바가 없군.”
글리치는 하빈이 꺼내준 붸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통을 든 채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살던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나를 괴물 중의 괴물로 그려대곤 했지.”
“저런. 힘들었겠다.”
사실 하빈은 네풀릭스를 보느라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턱을 괸 채 착실하게 대꾸를 해주었다. 글리치가 불만인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후배님, 아까부터 대답에 영혼이 없는데?”
“엥, 무슨 소리야. 대답에 어떻게 영혼이 담길 수가 있어? 사람은 영혼이 빠져나가면 죽어!”
“…….”
포기한 듯 곁에서 푹푹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며 속을 가라앉히던 글리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잠깐, 이건 무슨 음식이지? 맛이 독특하군.”
“아이스크림!”
“얼려서 만든 디저트치고 굉장히 부드러운데.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걸 보니 크릭샤처럼 아이스크림에 꽤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마계에는 아이스크림 없다더니, 이제 글리치가 가서 만들 듯?
“아, 그러고 보니 이프시네한테도 아이스크림을 맛보여 줬어야 했는데!”
하빈이 뒤늦게 이프시네를 생각해 내고 탄식을 흘렸다. 크릭샤랑 글리치한테는 아이스크림의 신세계를 선물해 줬는데 정작 이프시네에게 이 맛있는 걸 못 먹여봤다.
‘다음에는 이프시네 먹게 종류별로 사 가지고 가야겠어!’
하빈이 착실하게 마계 방문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 글리치가 다시 사이비 종교에 대한 내용을 넘겨보았다.
“그러니까 이놈들이 종교를 만들고, 나를 저……렇게 끔찍한 몰골로 만든 걸로도 모자라 사람들을 겁박하고 현혹시켜서 돈까지 뜯는다는 거지?”
“그렇지!”
“이…… 마왕보다 더한 놈들……!”
“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 세상은 악마가 이미 실직하고 없을걸? 사람이 더 일 잘하거든.”
하빈이 네풀릭스에 시선을 뺏긴 채 대충대충 대답하다, 번뜩 생각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앗, 근데 마왕보다 더한 놈들이라니? 우리 크릭샤랑 이프시네는 엄청 착한데. 너무한 거 아냐?”
“마왕이 그 둘만 남았었나?”
“응. 크릭샤 빼고 나머지는 다 죽었고, 이프시네는 새로 마왕이 되었지.”
하빈이 와작, 새우땅 과자를 베어 물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하빈과 글리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소파에 널브러져 TV를 보고 있었다. 듣자 하니 글리치 또한 잠을 안 자도 되는 체질이라 그냥 이 세상에 적응할 겸 TV를 더 보고 싶다나.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씻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라니. 인생 진짜 편하겠어.’
조금 부럽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하빈이 꺼내 준 현시우의 수면 잠옷을 빌려 입은 글리치는 누가 봐도 절대 마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차림이었다. 굳이 평하자면 붸스킨라빈스 먹는 흔한 은발의 백수?
은발이 흔하지는 않겠지만.
-삐이이!
리베는 어느새 은근슬쩍 글리치의 곁에 다가와 아이스크림을 탐내고 있었다.
“이 녀석, 이거 달라는 건가?”
-삐!
당연히 달라는 거 아니겠냐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베. 그 박력에 글리치는 슬쩍 아이스크림을 떠 리베에게 건넸다.
-삐악, 삐아악.
신이 났는지 활짝 웃으면서 아이스크림을 받아먹는 리베. 글리치는 손가락을 뻗어 리베의 머리를 살살 쓸었다. 아이스크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행복하게 살포시 접히는 반달 같은 눈. 그 모습을 본 글리치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은 도마뱀이야, 용이야?”
-삐이! 삐!
없는 날개로 어떻게든 파닥파닥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 보려고 노력하는 리베. 그 행동을 해석하지 못한 글리치가 이어 물었다.
“분명 마왕성에 왔을 땐 날개가 있었는데. 색도 달랐고.”
마계에서는 흰색 마물이 꽤 드물다. 어두컴컴한 마계에서 눈에 덜 띄기 위해 잠깐 검은색으로 위장했던 그때의 리베.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용과는 몇 번 싸운 적이 있어서. 나타나기만 해도 관심이 갈 수밖에.”
그뿐만이 아니다. 등장하는 용사들마다 용의 가호를 받은 가문이니, 용을 타고 왔다느니, 용의 핏줄에서 태어났다느니 하는 서사를 가지고 오다 보니.
‘용이라면 지긋지긋하지.’
판타지의 클리셰 중 클리셰! 드래곤!
오죽했으면 글리치도 한때 마룡을 길러볼까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해츨링을 구하는 것도 어려운 데다 교감과 기르는 과정이 까다로워 포기했지만.
“색도 하얀색이니 인간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 왜 숨기는 거지?”
“이쪽 세계에선 용이 엄청 희귀해서.”
“우리 쪽도 흔한 건 아니지만…… 아, 하긴 후배님은 눈에 띄는 걸 싫어한댔지?”
“그래. 그러니까 꼰대 선배도 여기서 조용히 지내도록 해. 섣불리 깽판 치다가 전 세계인들한테 주목받으면…….”
“주목받으면?”
흥미롭다는 듯 묻는 글리치의 모습에 하빈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하빈이 ‘난 마계 필요 없어’라고 했을 때, ‘그래, 안 줄게’라고 수긍하는 척하면서 말도 없이 뒤통수를 쳤었지!
‘절대 또 그럴 수는 없지!’
하빈은 경계 어린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랬다간! 그날로 마계에는 물과 용암 대신 핵맵닭볶음면 소스가 흐르게 될 줄 알아라!”
“…….”
잠잠해진 걸 보니 하빈의 협박에 글리치는 깔끔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조용해진 상황에 하빈이 툭툭 사이비에 대한 서류를 쳤다.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나 이 종교 털러 가려고. 가암히 내 돈을 털어? 절대 용서 못 하지!”
홱 팔짱을 끼던 하빈은 글리치의 표정을 힐끔 보곤 뒤늦게 덧붙였다.
“거, 거기다! 어? 멀쩡한 선배 얼굴을 이렇게 지옥도로 그려 놓고, 감히 사칭도 해?”
그러니까 글리치도 하빈을 도와줘야 한다, 하는 밑밥을 깔아둔 대사였다. 하빈이 글리치에게 들으라는 듯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사칭은 안 되지, 안 돼.”
“사칭은 네가 먼저 했을 텐데?”
“…….”
맞긴 맞네. 마계에서 대놓고 마왕 사칭에 마신 사칭을 했던 현하빈. 하지만 그녀는 뻔뻔하게 고개를 저었다.
“엉? 왜 나한테 그래? 나는 그래도 그쪽한테 허락받았잖아. 나중에 허락했잖아?”
“…….”
어디 허락뿐인가? 멋대로 마계를 떠넘겨서 진짜로 만들어 버린 게 글리치 본인이다. 그건 사실이었기에 글리치도 입을 다물었다. 하빈이 서류를 팔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이 무려 이렇게!”
하빈이 홱 다시 끔찍한 그림을 꺼내 들었다. 사이비 종교가 그린 처참한 ‘마신 상상도’에 리베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뱉었다.
-삐, 삐이익!
“이렇게나 사실 왜곡을 하고 님을 괴물로 만들어서 선전을 하는데, 이거 봐줄 수 있어?”
“……절대 못 봐주지.”
이번만큼은 글리치도 진심인 듯 그림을 확인하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하빈이 부추기듯 말을 얹었다.
“그래. 이게 바로 허위사실유포? 명예훼손? 그런 거라고! 본때를 보여줘야지. 그래서 말인데…….”
하빈이 상냥한 어조로 글리치를 향해 은근슬쩍 덧붙였다.
“나 거기 털러 가는 거, 좀 도와줄 거지?”
“……음?”
* * *
다음날.
하빈은 기숙사를 나간 김에 며칠간 쉬겠다며 외박계를 더 때리고, 학교에 현장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왔다.
학생 개인을 위한 현장학습신청서. 합법적으로 학교를 빠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중 하나!
‘이 제도가 아직까지 있었을 줄이야.’
1년에 며칠 못 쓴다는 단점이 있지만, 사용하면 합법적으로 결석을 할 수 있는 꿀 제도였다.
어쨌든 현장체험신청서로 이틀 빠지고, 자체 공강으로 이틀 빠지고, 원래 있던 공강으로 이틀 메꾸면 일주일은 거뜬히 학교를 안 가도 된다. 하빈이 뿌듯한 얼굴로 짐을 챙겼다.
“어디 보자,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야 하니까 분식 세트를…… 아, 그러고 보니 선배는 매운 거 못 먹는구나. 김밥이랑 순대면 충분하겠지? 아니면 오랜만에 투움바 파스타를 먹을까?”
하빈이 챙기는 건 알찬 식사와 얼굴을 가릴 용도의 가면이었다.
“혹시라도 정체를 숨겨야 하는 순간이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야.”
“왜 굳이 가면을 쓰지? 언제든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가끔은 어떤 얼굴 해야 할지 못 고르겠다구. 게다가 가면 쓰면 더 무시무시해 보일 것 아냐?”
“……어디가?”
“아무튼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고!”
툴툴거리면서 짐을 챙기던 하빈. 글리치는 마침 하빈에게 꾸껠울라칸에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했다. 겸사겸사 사이비를 터는 것까지도.
“일단 가서 주의할 것이 몇 가지 있으니까 잘 들어!”
하빈이 첫 번째 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첫 번째. 가서 아무나 막 죽이면 안 돼.”
“왜? 다 쓸어버리러 가는 것이 아니었나?”
글리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크릭샤도 맨날 묶지 말고 사형을 하라니 운운하던 놈이었다. 글리치 역시 하빈에겐 유했지만 ‘후배’가 아니었으면 바로 죽였을 분위기였고. 그러니 이번에도 본인을 사칭한 사이비 교단을 깡그리 없앨 생각이었겠지.
“안 돼. 왜냐면 거긴 교단만 있는 게 아니거든. 아무것도 모르는 신도들이 있어. 그냥 사이비에 홀랑 속아 넘어간 사람들.”
“홀랑 속아서 돈을 갖다 바친 신도들 말이지?”
글리치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한 번에 알아듣네?”
“나 때도 그런 사이비 교단은 있었으니까.”
[나 때도 있었느니라!]
“뭐야?”
둘이 같은 시대 살기라도 했나?
어쨌든 아헤자르까지 끼어들어 말하는 걸 보니 사이비는 모든 세계의 국룰인가 보다.
‘하긴. 돈 벌기 제일 좋은 게 사기지, 사기.’
입 몇 번 털어서 돈 꿀꺽할 수 있는 사이비 종교의 시스템은 누가 봐도 탐이 날 것이다.
하빈이 고개를 으음, 기울이는 동안 글리치는 마지막으로 종말교에 대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여전히 끔찍한 모양의 마신 초상화를 확인한 글리치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들이 그린 그림 말인데. 후배님은 어떻게 생각해?”
“어떻긴 뭘 어때? 진짜 끔찍 그 자체구만. 더 평할 게 있어?”
“이게 완전한 가짜에 허위사실유포라고 생각한다며.”
전날, ‘이거 허위사실유포에 명예훼손이야’라며 부추기던 현하빈.
‘그건 그냥 부추기는 의미에서 아무 말 덧붙인 건데.’
크흠. 하빈은 헛기침을 했지만 글리치 입장에선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 마침 그가 다시 물었다.
“솔직히 후배님은 날 잘 모르잖아. 내가 꼭 이렇……게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내가 괴물일 가능성도 있지 않나?”
마신은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존재. 이프시네가 확인했던 서적에도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처음 마신이 가장하고 있던 모습도 마왕성에서 섞여들기 위한 흔한 시종 차림의 은발 마족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덜 띄도록 눈도 적갈색에 가깝게 바꾸었고 이목구비도 미묘하게 다르다.
진짜 생김새가 어떤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빈이 마신 사칭이 가능했던 이유도 마신의 그 특성 때문이었다. 마신이 여자애 모습으로 등장해도 마족들에겐 익숙하다는 거지. 정해진 형태가 없는 존재니까.
“그럼, 원래 모습은 뭔데? 진짜 이렇게 생겼어?”
하빈이 그림을 가리켰다. 잠깐 그림을 뚫어지게 보던 마신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사실은 나도 내가 원래 어떤 모습인지 기억이 안 나.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럼 왜 물어본 거야?”
“……그냥. 후배님도 조심하라고.”
마신처럼 ‘기만자의 소망’을 쓸 수 있는 현하빈. 그 사실을 의식한 듯 글리치는 장난스러운 듯, 그러나 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조심해. 너무 오래 모습을 바꾸다 보면…… 어떤 게 진짜 본인의 모습인지 까먹을지도 몰라.”
“…….”
하빈은 잠깐의 침묵 끝에 답했다.
“……뭐래? 난 똑똑해서 그런 거 안 까먹어!”
아이큐 187을 뭘로 보는 거람?
[진짜 187이냐?]
‘응? 사실 안 재봤어.’
[그럼 아닐 수도 있잖느냐!]
‘하, 참. 잘잘아. 이제껏 보면 모르겠니? 이 나의 명석한 두뇌와…….’
띵동!
바로 그 순간 툭탁대는 그들의 사이로 갑자기 벨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빈은 의아한 표정으로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