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64) (164/268)

164. 홈 스윗 홈 (3)

“그래서 선배님 칫솔은 있고?”

“그게 뭐지?”

“뭐? 칫솔이 뭔지 몰라? 그럼 치약은 있어?”

“치약……?”

일단 뒤에 ‘약’자가 붙는 걸 보니 약 종류인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에 빠진 글리치가 추측을 던졌다.

“그건…… 새로운 종류의 마법약인가?”

“…….”

-삐이, 삐삐.

답이 없다며 곁에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리베.

“이거 봐. 우리 리베도 칫솔과 치약이 뭔지를 안다구!”

참고로 하빈은 꼬박꼬박 리베의 양치를 해준다. 혹시라도 충치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어린이용 딸기맛 치약을 사서 살살.

-삐!

본인도 아는 걸 왜 모르냐는 듯 리베가 가슴을 쫙 펴며 알은체를 했다. 아헤자르가 나름 마신의 변호를 해주었다.

[모를 수도 있지 않느냐! 다른 문화에서 왔으니 다른 방법을 쓰겠지.]

“그럼 선배는 이 안 닦아도 충치 안 생겨?”

“충치? 그게 뭐지?”

“안 닦아도 이가 썩는다거나, 시리다거나, 누렇게 되거나 그런 거 없냐는 거지.”

“……그런 거 없는데.”

하빈이 흘끔 글리치의 낯을 살폈다. 도자기처럼 깨끗하고 잡티 없는 피부에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머리카락까지. 누가 봐도 청결하게 관리를 잘 받은 상태.

“그럼 세수는? 스킨케어는 해? 수분크림 같은 거 발라?”

“스킨케어? 그게 뭐 하는 거지?”

“엥? 그걸 몰라? 근데도 이렇게 관리가 잘 되어 있다고?”

불공평하군.

설마 마신은 안 씻어도 언제나 깨끗하고 완벽한 상태인 건가? 곰곰이 돌이켜 보니 이공간에서 만났던 황레몬 그 녀석도 참 깔끔한 상태였다. 이공간에 화장실이나 샤워실 같은 게 있을 리도 없는데.

“뭐야, 이 안 닦아도 안 썩는 패시브라니, 반칙 아냐?”

너무 사기잖아? 귀찮아서 안 닦아도 자동으로 깨끗해진다는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성좌들 대상으로 치과를 열면 망할 듯.

“그럼 안 씻고 살아? 안 씻은 지 몇 년 된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씻고 청결을 유지할 줄 알아.”

글리치가 조금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매번 수많은 형태로 모습을 바꿔가며 마계를 통치하고, 인간계에 잠입한 전적이 있었던 글리치. 당연히 인간의 생활 습관쯤은 따라 할 줄 알았다. 그들이 건강을 위해 주기적으로 씻는다는 것도.

마법과 특성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는 것 외에 직접 씻는 것도 할 줄 안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우 마법이 더 간편하지만 말이다.

이래 봬도 마신. 온몸에 피를 뒤집어써도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순식간에 깨끗한 상태로 만들 수 있다. 하빈이 안다면 ‘메테오같이 쓸데없는 스킬 말고 그거나 가르쳐 줘!’라며 협박을 시전했을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씻을 줄을 안다니 특별히 가르쳐 주지.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야. 혹시 씻고 싶으면 여기 이걸 돌리면 따뜻한 물이 나와. 이렇게 돌리면 찬물이 나오고…… 이게 바로 바디워시라는 건데.”

하빈은 친절하게 수도꼭지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글리치는 흥미롭다는 듯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떻게 마법을 쓰지 않고도 바로 따뜻한 물이 나오는 거지?”

“이게 바로 베짱이 보일러의 원리라는 거야. 보일러 최고!”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의 기술 수준이 높다는 뜻이군.”

“그치! 역시 과학은 최고라니까. 그렇지만 이게 다 난방비로 나가는 거니까 감사하도록 해! 어디 보자……. 나 그동안 가스비 얼마나 나왔지?”

하빈이 그동안 우편함에 꽂혀 있던 가스비 납입 고지서를 모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집에 도착하는 고지서를 제때 확인하지 못했다. 가스비 내역을 본 하빈이 흐음? 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그래도 그동안 기숙사에서 산 덕분에 가스비랑 전기세가 안 나왔네?”

기숙사 개꿀인데!

흠흠, 하빈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백 억도 털렸으니 예전처럼 가스비에 신경을 좀 써 줘야 한다. 그새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글리치가 물었다.

“그럼 정말로 여기 재워 주는 건가?”

“그건 말이지…….”

하빈은 끄응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다른 사람 집에 떠맡기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민폐인 것 같아서 하빈의 본가로 데려온 건 잘한 것 같았다. 대뜸 남의 집에 마신을 재우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나도 나름대로 예의는 있다구.’

그리고 지금 보니 글리치는 꽤나 영리한 편이었다. 수도꼭지 사용법을 한두 번 보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적응하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사고도 치지 않았다.

사극 같은 걸 보면 과거 문화권에서 현대로 날아온 사람들은 자동차를 보고 놀라거나 뭔가를 잘못 건드려 일을 치기도 하는데. 글리치는 섣불리 무언가를 건드리지도 않고 시종일관 침착하게 상황을 살필 뿐이다.

심지어 함께 코니 앞에까지 다녀왔는데 코니도 글리치에게서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잖은가.

‘적응이 무척 빠른 편인가 봐.’

[너만 하겠느냐?]

아헤자르가 끼어들어 하빈을 지적했다.

‘엥? 내가 왜?’

[마계에 가서도 떡하니 고위 마족의 집을 별장 삼아 놀면서 영화 보고, 마왕성에서도 태연하게 마신을 사칭했지 않느냐!]

생각해 보니 하빈이 마계 갔을 때 더 뻔뻔하게 적응을 더 잘했던 것도 같고.

“크흠.”

어쨌든 마신 또한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고 사칭을 했던 인물이니 낯선 상황에서도 부자연스럽지 않게 적응하는 능력 하난 최대치로 키워 놓았을지 모른다.

“그래. 그래도 우리 집에 머무르는 건…… 허락을 구할 사람이 있긴 해서 말이지.”

하빈은 흘깃 폰을 보았다. 방금 현시우에게 손님을 침대에 재워도 되냐고 물어본 참이었다.

집에 손님 왔는데

오빠 침대에서

재워도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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