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외박 사유는 신중히 적어야 합니다 (5)
“코니 님께서 걱정이 된다며 보내셨습니다.”
“네? 할머니께서 무슨 일로?”
하빈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경호원들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아가씨, 그동안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습니까. 듣자 하니 돈도 백 억이나 잃어버리셨다고…….”
그들은 여전히 기숙사 근처였다. 이 시간에도 주위에 학생들이 몇몇 있었던 데다 리무진과 경호원의 향연에 기숙사 내 학생들도 창문을 살짝 열고 그들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경호원의 말을 들은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허억.’
‘저, 저, 저분 그 현하빈이지? 저번에 그 코니님 손녀……!’
‘말하는 거 들었어?’
‘백 억을 잃어버렸대!’
‘배, 백 억을 어떻게 잃어버려? 역시 재벌의 스케일은…….’
“잠깐! 잠깐잠깐!”
하빈이 재빨리 경호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번엔 기분이 상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제, 제가 백 억 잃어버린 거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저희 측에서도 알려고 했던 건 아닌데 방문하셨던 새빛은행에 마침 컨티뉴 측 관계자들도 금융 문제로 함께 기다리고 있었는지라 어쩌다 보니 들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하…….”
상황을 보아하니 일부러 뒤를 캔 건 아닌 것 같고, 곰곰이 떠올려 보니 새빛은행 측에서도 하빈을 안내하던 와중 ‘죄송합니다.’ ‘백 억은…….’ 하면서 말을 좀 흘렸던 것 같다. 하필 파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어서 들은 이들도 꽤 있었을지도.
“아니, 이 은행은 말야, 개인 정보 보호도 안 되는 거야?!”
백 억 못 지켜준 것도 속상한데 이게 이렇게 말이 퍼져?!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 코니 님께서 너무 걱정을 하고 계셔서…….”
“할머니가요?”
앗, 왜지?
하빈이 백 억을 잃었는데 코니가 걱정을 할 게 뭐란 말인가? 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혹시 내가 검집을 홀랑 팔아 버릴까 봐?’
코니가 하빈에게 특별 제작해 준 검집. 안 그래도 그 검집은 아주 좋은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진 양품이다. 최근에 공을 들여 제작한 제품을 고객이 홀랑 바로 중고로 내다 팔면 제작자 입장에서도 속이 쓰릴 법도 하다.
하빈이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다른 경호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현하빈 님, 왜 이 시간에 나오십니까? 혹시 지금 기숙사에서도 쫓겨나신 겁니까?”
“마침 기숙사 측에서 벌점을 받았다고 저희 측에 연락을 넣었더라고요.”
“네? 왜 그쪽으로 또 연락이 가는데요?”
“저번에 배달 사건 때 연락처를 줬었는데 저희 쪽도 보호자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네에?”
하빈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다들 개인 정보 보호를 제대로 하는 곳이 없어!”
“아가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짜로 쫓겨나셨습니까?”
“어떻게 현하빈 아가씨께서 쫓겨나실 수가…….”
“당장 컨티뉴로 가시죠.”
그들의 강경한 태도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더욱 커지고 있었다.
‘와, 현하빈 기숙사에서 퇴소당한 거야?’
‘이 틈을 타 컨티뉴에서 모시러 온 거 봐.’
‘이제 컨티뉴로 다시 돌아가려나?’
‘할머니와 손녀의 지지부진한 자존심 싸움은 이렇게 막을 내리는 것인가?’
“아가씨, 저희와 함께 가시……”
“아, 진짜 다들 맛 들리셨어요? 아가씨 대우하지 말라니까요!”
이분들은 저번엔 아가씨 대우 안 하겠다고 하고 또 그새 까먹으신 모양이다. 홀랑 기억을 리셋하고 돌아와서 저번처럼 극진히 대우하는 모습을 보며 하빈은 기가 찼다.
“그리고 이렇게 잘 대해주실 필요 없어요. 저 백 억 이제 없어서 개털입니다, 개털. VIP고 뭐고 없어요…….”
시무룩하게 주장하는 현하빈. 그러나 경호원들은 물러설 기색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니, 오히려 그런 상황이실수록 저희의 도움이 필요하신 게 아닙니까? 코니 님께도 말씀드릴 수 있으실 텐데!”
“엥? 그걸 할머니께 왜요?”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빈이 백 억을 잃어버려서 이제 금전적 지불 능력이 떨어졌단 이야기를 왜 굳이 제 입으로 하겠는가?
“뭐, 그 잃어버린 백 억도 되찾을 궁리를 하고는 있지만, 그건 제가 다시 알아서 할 일이고.”
“역시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그래도 일단 이렇게 밖에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오늘은 저희와 함께 가시죠. 마침 코니 님께서도 한국을 방문 중이시라 저쪽 별장에 머물고 계십니다.”
“방금 코니 님께서 하빈 님과 만나고 싶다고 연락도 하셨습니다.”
“엥, 그래요?”
으음. 하빈은 고민에 빠졌다. 요즘 바빠서 코니 할머니와 편지 연락이 뜸하긴 했다. 그동안 하빈이 코니에게 쌓인 것도 많았고 말이다. 이를테면 왜 이렇게 경호원들을 붙여대나, 같은 추궁을 하지 못했다.
또한 감사한 것들도 있었다 지난번에 받은 별꽃뿌리의 가루는 던전 내에서 요긴하게 썼고, 만들어 준 검집도 쏠쏠하게 마취총, 아니, 수면 검집으로 잘 썼고. 지난번 경호원을 붙여줬던 사건도 오히려 하빈의 여러 가지 소문을 하나로 좁혀 잠잠해지게 하는 이득을 주었다.
“그래, 못 다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겠죠.”
이왕 밖에서 잘 거면 마신 혼자 떨궈 두고 가는 것보단 마신이랑 같이 다니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하빈이 리무진에 올라탔다.
“옆에 계신 그분은……?”
동행하는 글리치를 보며 경호원들이 잔뜩 경계한 낯을 했다. 하빈이 손사래를 쳤다.
“그, 아는 사람인데 중요한 사람이라서. 신경 쓰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멀뚱멀뚱 리무진에 같이 타게 된 글리치가 리무진을 살폈다.
“이쪽은 탈것이 다들 이런가?”
“쉬잇. 선배님 질문은 나중에 몰아서.”
“…….”
또 나왔네, ‘중세 시대 사람이 현대에 왔을 때 적응 못 하는 상황.’ 다행히 글리치는 눈치가 꽤 빠른지 하빈의 말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본인도 인간계에 숨어든 경험은 꽤 많기에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슬쩍 성좌 메시지로 찔러 주는 걸 봐서는 글리치도 ‘성좌’의 개념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미등록 성좌인 것도 알고 있는 건가?’
하빈이 메시지를 보고 있을 때였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글리치가 하빈에게 들리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런데 후배님.”
“응?”
글리치는 경호원들의 모습과 고급스러운 차의 실내를 눈으로 한 번 훑은 뒤 물었다.
“이건 지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묻는데…….”
잠깐 멈칫하던 글리치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혹시 후배님은, 귀족가의 자제였나?”
“……님까지 왜 그래?!”
아니라고!
* * *
그날, 하빈은 또 외박계를 썼다.
-아는 할머니 댁에 방문합니다. 외부인 데려왔던 건 죄송합니다!
그 외박 사유를 본 사생회가 뒤집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헉!”
“허억.”
“역시, 코니…… 할머님과 담판을 지으러 가는 건가 보다.”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려는 걸지도 몰라!”
“…….”
저번에 선물 받는 것조차 질색했던 손녀, 그녀가 결국 할머니와 담판을 지으러 가는 것이다!
두근두근. 그 사실을 상기한 사생회 임원들은 당장 팝콘이라도 가져오고 싶은 표정이었다.
“이, 이건 그래도 비밀로 해야겠죠?”
“물론이지. 개인 정보잖아. 절대 신문부나 방송부에 새어나가선 안 돼! 이번에도 짤리고 싶어?”
“아, 아니죠.”
신문부와 방송부는 아무리 선생님이 통제한다 해도 외부 신문사와 커넥션을 통해 정보를 팔아넘기는 간 큰 부원들이 있었다. 아니 그전에, 교내에 이런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물론 하빈 학생이 워낙 기숙사 앞에서 요란하게 리무진을 타고 가셔서…… 그걸 본 학생들이 있다 보니 완전히 비밀에 부치긴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컨티뉴로 다시 갔다니 좋은 징조 아닐까요? 다시 후계자 자리를 되찾으려는?”
“그런 엄청난 일이 방금 일어났단 말이지……?”
믿을 수 없다는 낯의 학생들. 그 중심에는 굳은 표정의 3층장이 있었다. 사생회 부회장이 조용히 뇌까렸다.
“3층장. 이건 모두 네 벌점이 불러온 나비효과일지도 모르겠다.”
“내, 내가 벌점 기록하는 게 그렇게 큰일의 단초가 되다니…….”
깊어지는 오해 속에 그들은 이 외박 사유를 그들끼리만이라도 가슴속에 묻고 가자고 다짐했다.
* * *
“하빈 양, 오는 길은 괜찮았나요?”
쪼르륵. 코니의 별장에 도착한 하빈과 글리치를 향해 코니는 따뜻한 차를 내주었다.
“카페인 없는 허브티라 늦은 시간에 마셔도 괜찮은 음료죠.”
“우와 향기 좋다……가 아니라! 잠시만요, 할머니.”
하빈은 멋진 허브티 향기에 혹해서 찻잔을 집어 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아무리 할머니라 해도 이건 아니에요. 이렇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려 생각하지 마시죠! 대체 저번부터 VIP 서비스가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뭐가 말이죠?”
“저번에 그 선물도…… 갑자기 기숙사 앞에 경호원들을 쫙 보내시질 않나. 그,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요……. 좀 과했어요!”
투 머치, 투 머치!
하빈은 분명 처음 주문을 넣을 때도 눈에 띄는 걸 싫어한다 전달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이렇게 요란스럽게 하빈을 모시는 코니의 사람들이라니. 그러나 코니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했다.
“그건 내 작은 성의인데…….”
조금 서운한 듯 내려가는 코니의 눈썹을 보며 하빈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조, 좋긴 했지만요. 그러니까, 음.”
“부담이 되었나요?”
“아, 앞으로 그만큼 안 해주셔도 되거든요?”
하빈과 코니의 대치를 잠자코 지켜보던 글리치가 하빈에게 속삭였다.
“네 친할머니인가?”
“아냐.”
“……정말 아닌가?”
“아, 진짜 아니라니까.”
별로 닮지도 않았는데 왜 다들 코니 할머니와 자신을 혈육이냐고 의심하는지. 하빈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빈이 에휴, 하는 한숨을 삼키며 쪼록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코니가 이번엔 글리치 쪽을 돌아보았다. 하빈이 별장에 온 이후로 줄곧 하빈에게 신경을 쓰느라 코니를 포함한 사람들은 글리치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글리치 또한 50층 마왕성에서의 모습이 알려져 있을 것을 우려하여 얼굴 생김새를 미묘하게 바꾸었는데, 그래서 얼핏 보아서는 은발과 붉은 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평범한 외국인처럼 보였다.
“그쪽은?”
그러나 마침내 글리치를 마주한 코니의 태도는 꽤 경계심이 있어 보였다.
‘음? 코니 할머니가 왜 저러시지?’
하빈을 대할 때까지만 해도 줄곧 온화하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꽤 딱딱한 말투였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라 경계를 하시는지도.’
하빈이 글리치를 소개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쪽은 음, 아는 선배입니다.”
“선배?”
“…….”
끄덕.
일단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글리치. 그러나 코니는 매서운 말투로 질문했다.
“그런데 왜…… 하빈이랑 기숙사에서 함께 있다 나온 거죠?”
둘이 대체 무슨 사이야. 라고 묻는 듯 매서운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