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외박 사유는 신중히 적어야 합니다 (4)
한편 그 시각.
울림국제고 기숙사 사생회. 그곳에선 수군수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저, 저기. 사생회장님. 이거 봤어요?”
“뭔데?”
본디 사생회란 기숙사에 거주하는 학생들 중에서 뽑는 작은 학생회와도 같은 조직. 사생회장은 기숙사에 오래 머문 3학년 중에서 선발되며, 그 아래엔 부사생회장과 각 층을 담당하는 층장으로 구성된다.
1층을 총괄하는 1층장, 2층을 총괄하는 2층장……. 이렇게 7층까지의 일곱 층장.
그 외에도 사생의 복지를 담당하는 사생부장, 이벤트를 담당하는 오락부장 등등의 인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가장 큰 임무 중 하나는 바로 ‘점호’였다.
“지난번 점호 때 외박 사유 말이에요.”
“……응?”
외박 사유라는 말에 사생회장은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외박 사유, 말 그대로 기숙사에서 자지 않고 외박을 했을 때 대는 이유. 점호를 할 때면 외박 사유를 미리 제출한 학생을 제외하고 불참 인원수를 센다.
비록 사감선생님이 있었지만 점호를 담당하는 건 각 층의 층장들이었다. 선생님 한 명이 점호 시간 안에 수많은 기숙사 방을 모두 점검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각 층의 담당을 맡은 ‘층장’이 점호 시간에 학생들의 방을 확인했다.
주된 확인 요소는 학생이 기숙사에 잘 귀가해서 방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혹시 벌레가 나오지는 않았는지, 금지 물품을 반입하거나 흡연, 능력사용 등의 교칙 위반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부가적으로 확인.
‘학생이 기숙사에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벌점!’
물론 기숙사에 들어오지 않고 본가를 방문하거나 개인 사정이 있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 이렇게 외박계, 즉 외박 사유를 쓰는 것이다.
합당한 외박 사유를 적어 온라인으로 제출하면 기숙사에서 승인을 하고, 그날은 기숙사에 제때 들어오지 않아도 벌점을 매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학생의 외박 사유가…….”
사생회가 옹기종기 모여 보고 있는 외박 사유는, 바로 현하빈의 지난밤 외박 사유였다.
‘제 돈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꼭 부자가 되어 돌아올 예정.’
“…….”
“…….”
그걸 확인한 사생회 학생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맨 처음 외박 사유를 발견했던 층장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사실 어제는 제가 바빠서 외박 사유를 제대로 안 읽고 그냥 승인했는데…… 오늘 보니 사유가…… 저래서요.”
“……크흠.”
생각보다 층장들은 외박 사유를 잘 읽지 않았다. 대부분이 ‘집에 다녀옴’, ‘엄마가 자고 가래요’, ‘아빠가 저 보러 근처에 왔대서 근처 숙소에서 자고 갑니다’ 같은 내용들이었다.
게다가 현하빈은 이미 성인이라고 소문도 알음알음 퍼진 터라, 이미 성인인 분이 밖에서 좀 주무시고 오면 어떠하리? 하는 느슨한 경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평소답지 않게 외박 사유를 보며 심각하게 낯을 굳히고 있었다. 3층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것도…… 적으신 분이 ‘그분’이시니까요.”
“그, 그치. ‘그분’…….”
“‘그분’이 이런 걸 적다니…… 이건 무슨 의미일까.”
사생회에서도 현하빈의 명성은 대단했다. 무려 기숙사 앞에 취재진들과 경호원들을 끌고 온 전적이 있지 않은가. 사생회가 생각하는 하빈의 이미지는 이랬다.
‘무려 코니 님의 손녀.’
‘컨티뉴의 VIP!’
‘서민 체험하러 여기 온 재벌.’
재벌인 거 티 안 내려고 일부러 기숙사에서 소탈하게 생활하다가, 지난번에 코니 님이 티 내는 바람에 삐졌다는 게 정설.
사생회에서도 알음알음 ‘그분’이라고 부르며 조금씩 신경을 썼다. 가뜩이나 저번에는 우편물 담당하던 사생회 멤버가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이유로 짤리고 전교생에게 공개적 사과를 한 일도 있었으니, 하빈에 대한 사생회의 관심은 식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외박 사유는 사이트에 올라오는 거라 사생회는 다 볼 수 있었다.
“돈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꼭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고……?”
코니의 후계자가 돈을 찾기 위해 여정을 떠나고, 부자가 되어 돌아올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모두 생각에 잠긴 와중, 사생회 부회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 설마.”
“설마?”
“뭐, 뭔데요?”
모두가 부회장의 말 한마디에 주목했다. 부회장은 꿀꺽, 침을 삼키고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분 싸움을 끝내고 자신의 진정한 경영권을 찾아 돌아온다는 의미인가?”
“……!”
“……그, 그런.”
아침드라마와 주말드라마 재벌물에 익숙해진 학생들. 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 하빈에 대한 얄팍한 거짓 정보. 그걸 조합하면 외박계의 뉘앙스는 사뭇 달라졌다.
돈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 부자가 되어 돌아올 하빈.
누가 봐도 코니 할머니에게 맡겨 놓은 컨티뉴의 지분을 찾으러 가는 것으로 보인다!
“우,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괜한 게시글 올려서 짤린 본보기도 있었고, 이런 개인정보는 함부로 퍼뜨려서 좋을 게 없다. 모두들 그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넵.”
“뭔가…… 엄청난 세계를 엿본 기분이 들어요.”
“그사세…….”
“재벌가의 지분 싸움이라니…….”
그렇게 확인할 길도 없는 사생회의 오해는 오늘도 커져가고 있었다.
* * *
“휴우. 그래도 오늘 점호를 또 해야겠지.”
3층장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필 그녀가 맡은 방 중에 무려 그 거물이 사는 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방금까지도 사생회에서 나왔던 주제, 바로 ‘그분’!
현하빈 학우의 방……!
이 바로 3층에 있었다. 3층장은 다시 한번 꿀꺽 침을 삼켰다.
방 앞에는 ‘노크 해주세요’라는 귀여운 표지판이 달려있었다. 하빈의 룸메이트, 여서윤이 달아 둔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층장도 노크를 했겠지만, 방금까지 엄청난 외박 사유에 대해 떠들다 당황한 상태였던 층장은 긴장한 나머지 노크보다 앞서 문을 먼저 열고 말았다. 그리고.
“저, 점호를 하러 왔습…… 어어?”
문이 열린 사이로 층장이 본 것은-
현하빈, 여서윤, 그리고.
“음……?”
낯선 얼굴의 은발 외국인이었다.
“어, 어? 어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인물이 떡하니 방 안에 있는 모습에, 층장은 외마디 놀란 외침을 뱉었다.
하빈이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참. 노크하라고 표지판 붙어있는데.”
“……헉.”
* * *
“……외, 외부인을 들이면 벌점입니다!”
3층장은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고 외쳤다. 기숙사 규칙상 방에 사생이 아닌 다른 학생을 들이는 것도 규칙 위반인데, 심지어 다른 성별의 외부인을 들여?!
‘아무리 현하빈 님이라도 어쩔 수 없어! 이건 벌점이다!’
당장 벌점 기록을 하러 수첩을 꺼내 드는 층장을 보며 하빈은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앗, 어쩌지?’
벌써 점호 시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을 못 한 게 낭패였다. 해X포터 주문 외우고, 구지가 주문 외우고, 서윤이한테 소개도 해주고 난리부르스를 하는 동안 벌써 그렇게 시간이 많이 갔단 말이야?!
하빈이 끄응 고개를 돌려 글리치 쪽을 보았다. 둘은 다급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며 눈빛으로 묻습니다.]
오, 성좌 메시지가 이럴 땐 도움이 되네?
하빈은 층장에게 보이지 않게 서윤과 글리치를 보며 입술 위로 슬쩍 손을 올렸다.
‘쉿, 둘 다 일단 조용히 있어 봐.’
“…….”
글리치는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조그만 방에 갑자기 소환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지금 현하빈의 룸메이트라는 여자애는 마신을 아카데미 졸업생으로 오해하지 않나.
게다가 방금 들어온 저 여자도 하빈을 보면서 ‘외부인을 데려오면 벌점’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다.
글리치는 하빈의 생활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지금 머무는 거주지조차도 불안정한 건가?’
구매한 집이 아닌, 월세방이나 여관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중인 모양이다. 그 사실을 짐작한 글리치는 어이가 없었다.
‘마계의 주인이 이런 삶을 살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당장 마계에 가서도 마신 사칭을 계속하면 잘 먹고 잘살 텐데.
‘아니, 지금은 사칭도 아니고 내가 전권도 넘겨줬겠다, 정말로 마계 가서 살면 호화롭게 누릴 수 있을 텐데, 왜?’
그 말은, 결국.
‘……정말로 욕심이 없는 인간인가?’
글리치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릴 뻔했다.
‘대단하군.’
솔직히 글리치는 하빈에게 마신의 반지를 넘겨주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펑펑 써버릴 거라 생각했다. 마계의 자원을 제멋대로 쓸 수도 있을 테고, 하다못해 거기 담긴 마법 스킬들을 마구 써먹으면 이쪽 세계에서도 나라 하나쯤은 멸망시키거나 심지어는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의무는 내팽개치고 권리만 쏙 챙기는 놈들을 수없이 봐 왔던 글리치. 비록 이 ‘후배님’이 ‘마계 관리 따위 귀찮아서 싫고 난 딸기 뷔페나 갈 거임’이라고 했다지만, 그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마계 통치가 귀찮아도, 마계 강탈은 즐거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의무는 다하지 않아도 마계의 풍족한 자원들을 갖다 바치라며 마족들을 쥐어짜거나, 마신의 힘을 사용해서 행패를 부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하지 않다니.
‘……진심이었나.’
다 필요 없다던 말이 진심이었단 말인가.
그가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기던 때였다. 입구에 있던 층장이 다시 한번 더 강경하게 말했다.
“어쨌든 벌점. 벌점이에요! 당장 보호자에게 연락이 갈 겁니다.”
“네에? 안 돼요. 또 현시우 그놈한테 이상한 소리 했다간 가만 안 둬!”
‘현시우?’
하빈의 말에 흠칫한 3층장.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현시우, 현하빈. 같은 성씨를 가진 것과,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현시우’가 그녀의 가족인 모양.
‘……역시 지분 싸움과 관련이 있나!’
가족과의 지분 다툼을 위해 어제 외출을 했고, 지금도 자신의 이미지에 누가 되면 형제에게 지분을 뺏길까 봐 예민한 건가!
3층장이 머릿속으로 재벌물 대하드라마를 쓰고 있는 동안, 하빈은 글리치에게 속삭였다.
“그, 빨리 어디로 사라지던가 해!”
“……지금? 여기서?”
“나타날 때도 뿅 하고 나타났잖아. 가는 건 뿅 하고 못 해?”
하빈의 말에 글리치가 인상을 찡그렸다.
“후배님 눈에는, 차원을 넘어서 오는 게 쉬워 보이나 보지?”
그냥 반지로 뿅 소환한 줄 알았는데, 그것도 꽤나 대단한 기술이었던 모양이었다.
“으음, 그럼 뭐 순간이동으로밖에 못 나가? 아, 그러고 보니까 한국에는 갈 곳이 딱히 없겠구나.”
당장 글리치를 밖으로 쫓아낸다 해도 한국에 처음 와 보는 글리치가 어디에 머물 것인가?
하빈도 그동안 이런 류의 창작물을 본 적이 있었다. 중세 시대 배경에서 갑자기 현대로 떨어지면서 자동차 보고도 놀라고, 빌딩 보고도 놀라고, 결국 사고 치는 전개.
‘그럼 곤란해지는데.’
어찌 되었든 글리치가 현대 적응을 할 수 있게 도와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여기서 혼자 쫓아 보내서는 안 된다. 하빈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제가 밖에 데려다 놓고 올게요!”
“그러셔도 벌점 1점은 받으셔야 하는데…….”
“네네, 나중에 매기세요!”
당장 벌점 1점 가지고 기숙사 퇴소를 시키지 않는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야 할까? 일단 하빈은 글리치를 질질 끌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마신 글리치는 은근히 힘을 주어 질질 버텼다.
‘이게 무슨 꼴인지.’
살면서 마신을 함부로 질질 끌고 가는 존재가 있었을 리 없다. 어이없다는 표정의 글리치에게 하빈이 외쳤다.
“아, 일단 따라와 보라고. 내 말 들어서 나쁜 적 있었어? 저번에 내 말 듣고 콜피스 먹으니까 매운 거 싹 나았잖아! 하늘 같은 후배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니까!”
“…….”
진짜로 콜피스 때의 일이 기억났는지 글리치는 입을 다물었다. 기숙사 밖으로 나온 하빈이 한숨과 함께 팔짱을 꼈다.
“아, 이제 이 꼰대 선배를 어디다 넣어두지?”
소환한 뒤에 역소환이 안 쉬울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뿅 나오면 뿅 들어가는 것도 당연히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찌 되었든 당장 마신을 재울 장소는 필요했다. 아무리 꼰대라고 해도 무려 마신에다 성좌이기까지 한 글리치를 차가운 길바닥에 재우는 건 못할 짓이다. 이래 봬도 첫 한국 방문인데 따뜻한 코리아의 정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채씨한테 좀 재워 달라고 부탁할까?”
[대뜸 마신을 집에 재워 달라고 하면 무리한 부탁일 수 있지 않겠느냐?]
“흐음…….”
하빈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녀 앞으로 검은 리무진 한 대가 스르륵 다가왔다. 그리고.
“현하빈 아가씨! 저희가 왔습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리무진에서 내리는 저번에 봤던 컨티뉴의 경호원 무리들. 척척척, 저번처럼 절도 있게 에워싸는 모습에 하빈이 엥, 하고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백 억을 날리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