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외박 사유는 신중히 적어야 합니다 (3)
하빈이 반지를 보며 말을 뱉은 후.
몇 초의 침묵이 이어졌다.
파지직-지직-
스파크를 일으키는 반지를 노려보던 그 순간. 알림이 떴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당신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뭐?”
일단 이 방법이 맞긴 한 모양이다. 처음으로 응답이랄 게 왔으니. 잠깐 놀라서 창을 노려보던 하빈이 이내 반지를 빼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콕콕 찔렀다.
“아니? 내가 친히 불러주겠다는데 안 나와? 안 나온단 말이지?”
[성좌, ‘마신 글리치’가 왜 그게 친히 불러주는 거냐며 코웃음을 칩니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헤어질 때 후배님이 했던 말 기억 안 나냐며, 대체 누가 그런 말을 듣고도 만나러 가겠냐고 묻습니다.]
헤어질 때 했던 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헤어질 때 나 쟤랑 무슨 이야기 했더라?”
[그,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아헤자르는 곰곰이 글리치와의 만남에서 마지막에 하빈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이 개객기가!’
‘어디서 이런 개수작을!’
‘이 자식, 다음번에 잡히면 가만 안 둔다!’
[……다음에 잡히면 가만 안 둔다며 개객기라 부르고, 멱살을 잡았다.]
“오.”
[성좌, ‘마신 글리치’가 가만 안 둔다는 후배님에게 ‘개객기’가 뭐하러 친히 나타나야 하냐고 묻습니다.]
하긴 글리치 입장에서는 하빈에게 당했던 맵닭소스의 고통스러운 추억(?)이 있는 이상 함부로 하빈을 만날 엄두는 안 날지도 모른다. 게다가 멋대로 떠넘겨 버린 마신의 반지 때문에 하빈이 마신에게 원한도 있는 상황.
만나봤자 또 멱살 잡히고 맵닭소스 공격이나 받을 것 같은데 대체 뭐하러 만나겠는가?
하빈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야, 꼰대, 설마 쫄았어?”
-치지직.
“쫄아서 못 나와? 겨우 매운 소스 가지고 쫄았냐?”
[……성좌 ‘마신 글리치’가 그런 도발에 어울려줄 이유는 없다고 대답합니다.]
‘흐음, 안 통하네.’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걸 보니 심심하거나, 하빈에게 그다지 나쁜 감정만 있는 건 아닌 모양. 하빈은 반지를 툭툭 던졌다 받으며 요리조리 글리치를 구슬렸다.
“이봐요, 선배님, 내가 지금은 어? 연장자인 거 고려해서 선배님 대우해 드리고 있는데 그렇다고 이렇게 막 뻗대면 큰일 난다?”
일단 첫 번째 방식은 협박.
“좋은 말 할 때 머리를 내밀지 않으면 마계에 핵맵닭소스를 풀어버릴 거야. 마족들에게 강렬한 매운맛을 선사해 주지.”
크릭샤도 맛보고 눈물 콧물 쏟은 걸 보면 마족들의 기본 디폴트 설정이 맵찔인지도?
[성좌 ‘마신 글리치’가 본인도 마신이면서 어떻게 자신의 신도들에게 그렇게 잔악무도한 짓을 할 수 있냐며 한숨을 쉽니다.]
“어? 내가 마신 한댔어? 안 한댔는데? 난 한다고 한 적 없는데? 님이 막 맡긴 건데? 이건 님 잘못임.”
이래서 싫다는 사람에게 막 감투를 씌우면 안 된다. 애초에 저 글리치가 하빈의 뭘 믿고 막 마계를 양도했는지가 그녀의 입장에서도 영 미스터리였다.
“아니 근데 애초에 왜 나한테 준 거야? 그동안 후계자한테 넘겨준 적이 없다면서? 왜 나지?”
하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글리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하빈은 반지를 양손으로 던졌다 받으며 말을 이었다.
“……으음, 협박으로는 잘 안 나오는군. 잘잘아, 얘는 어떻게 해야 나올까?”
[본인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느냐? 나오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막 불러낼 생각을 했지 어떻게 해야 소환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빈이 아는 건 ‘글리치가 동의해야 소환할 수 있다’는 것뿐.
역시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낫겠다.
아헤자르의 의견을 받아들인 하빈이 반지를 향해 물었다.
“좋아! 어이, 선배. 어떡하면 순순히 기어 나올래?”
[그런 방식으로 물으니 문제인 거다!]
기함하는 아헤자르. 그러나 다행히 글리치 쪽에서 반응이 오긴 했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고민에 빠집니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핵맵닭소스인지 뭔지를 본인에게 억지로 안 먹이겠다고 약속하면 생각해 보겠다고 답합니다.]
‘오?’
뭐야? 이게 먹히네?
심지어 조건도 꽤 널널한데?
하빈이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가식적일 정도로 나긋나긋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에이, 당연하지. 이 마음 넓은 후배님을 뭘로 보고? 순순히 나오면 내가 이번엔 특별히 봐준다. 반지 준 거 혼 안 낼게. 맵닭볶음면도 안 먹임.”
[성좌 ‘마신 글리치’가 의심스럽단 눈빛으로 당신의 표정을 흘끔 봅니다.]
“어허, 하늘 같은 후배님을 뭘로 보고? 지금 의심해? 날 의심하는 거야?!”
하빈이 상처받은 표정으로 외쳤다. 아헤자르가 눈치를 보며 지적했다.
[그야 의심할 만하지 않느냐……. 그, 네가 그동안 마신에게 한 일이 있는데…….]
현하빈이 마신을 만나고 그동안 한 일: 라면 먹여서 울리기, 핵맵닭볶음면 소스 먹여서 울리기.
무려 ‘마신을 울린 자’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현하빈. 그녀가 다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글리치를 구슬렸다.
“에이, 무슨 소리야, 나는 무려 콜피스도 나눠 줬던 착하고 아량 넓은 후배라고! 자아, 선배, 잘 생각해.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냐. 내가 원래는 절대 용서 안 해주려고 했는데 이번 한 번만 기회를 준다. 나타나면 용서해 줌. 맵닭볶음면도 안 먹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
따뜻한 목소리로 권유하는 현하빈.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다른 방안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물론 수틀리면 욥떡의 세계를 구경시켜 줄 수도 있지.’
맵닭볶음면 소스를 안 먹인다고 했지 욥떡, 불타는 돈가스, 불족발 같은 메뉴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이번에 한 번만 더 배신 때리면 바로 응징 들어가야지!
‘다시는 마늘의 민족을 무시하지 마라.’
흠흠, 하빈이 뿌듯하게 헛기침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킬 거냐고 물어봅니다.]
“어허, 후배님을 못 믿냐니까? 선학의 의리가 그 정도밖에 안 돼?”
뻔뻔한 낯을 한 하빈이 당당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성좌, ‘마신 글리치’가 고민에 빠집니다.]
그 뒤로는 잠깐의 침묵.
그리고.
-치지지직-!
한참의 정적 끝에 반지의 스파크가 파바박 튀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검은 연기가 반지를 타고 침대 옆자리에 나타났다.
“……흠, 그래도 약속은 지킬 줄 아는 인간일 거라 믿어보지.”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빈은 옆을 돌아보았다. 저번에 봤던 은발과 붉은 눈, 간단한 검은 코트 차림의 마신이 등장했다.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진짜 그 빨간 소스는 안 쓸 거지?”
“물론!”
‘욥떡을 안 쓴다는 이야기는 안 했지만!’
하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신이 미심쩍단 낯으로 하빈을 슬쩍 살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그가 툴툴거리며 질문을 던지던 순간이었다.
“허억. 언니…….”
후두둑.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둘은 고개를 돌렸다. 마침 글리치를 발견한 서윤이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린 것이었다. 서윤은 황급히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글리치를 향해 경계 어린 어조로 외쳤다.
“꼬, 꼼짝 마. 당신 뭐야?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설마 이번에도 언니를 쫓아다니는 스토커 기자들 중 한 명?!”
“…….”
서윤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하빈을 살폈다. 지난번 기자들에게 시달렸던 하빈의 상황을 무척 걱정했던 서윤. 이번에도 잔악무도한 기자가 하빈에게 달라붙은 것은 아닌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하빈이 서윤을 달래려 입을 열었다.
“진정해, 서윤아. 이쪽은…….”
그러고 보니 뭐라고 설명하지?
이쪽은 마계를 주름잡던 전설 속 마신 글리치! 그런데 지금은 맵닭볶음면 소스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기숙사 침입자.
……라고 설명할 수는 없잖아?
하지만 하빈의 태도가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는지, 서윤은 천천히 경계를 풀었다.
“아, 언니가 아는 사람이야?”
저번에도 갑자기 나타난 김릭샤를 마주친 적이 있었던 서윤. 그녀는 그 경험 덕분에 꽤 빨리 안정을 찾았다.
글리치가 하빈에게 물었다.
“저 녀석은 뭐지?”
“룸메이트.”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나? 그것도 혼자가 아닌 둘이서?”
글리치가 당황한 눈빛으로 기숙사 방 안을 훑었다.
‘무려 마계를 양도받은 이가 이렇게 좁은 방에서 살고 있다고? 그것도 혼자 사는 게 아닌 다른 이와 공간을 나눠가며…….’
글리치 역시 룸메이트가 어떤 개념인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인간계에 위장하고 돌아다녔을 때 값이 싼 여관에서는 방을 홀로 쓰지 못하고 낯선 이와 함께 사용해야만 했다.
“후배님, 혹시 금전적인 문제가 있나?”
글리치는 무심코 하빈에게 물었다.
물론 울림국제고의 기숙사는 학교 기숙사 중에서도 최상급 컨디션을 자랑하는 최고의 숙소였다. 아늑한 침구와 예쁜 인테리어, 훌륭한 보안과 맛있는 식사까지. 괜히 하빈이 눌러앉을 생각을 한 게 아니다. 두 명이 쓰기에도 넓은 편인 데다 거실까지 딸린 방.
그러나 마왕성에 머물렀던 글리치가 보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엥? 어떻게 알았어? 나 금전적인 문제 생겼는데.”
물론 하빈으로서는 글리치의 질문에 잃어버린 백 억이 가장 먼저 떠올랐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안 그래도 최근에 내 재산을 털고 내뺀 놈들이 있어서.”
“……뭐? 다른 이도 아닌 후배님 재산을 털었다고?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무려 마신을 꿇렸던 하빈의 무위. 그걸 기억하고 있는 글리치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해졌다. 그가 더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언니, 이분은 그래서 누구야? 언니를 후배님이라고 부르는데?”
서윤이 끼어들어 물었다. 서윤은 어느새 그들 가까이 다가와 글리치의 생김새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 나이 들어 보이는 외모가 아닌데. 거기다 하빈 언니를 후배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같은 학교 출신인가?’
서윤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맞아. 서윤이로서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니 궁금할 만해.’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니, 갑자기 사람을 데려오면 소개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역시 마신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 하빈은 좀 돌려 설명해 주기로 했다.
“으응, 내가 좀 아는 꼰대 선배.”
“선배? 어느 쪽 선배야? 설마 우리 학교?”
서윤이 글리치를 살폈다. 머리색과 이목구비를 보아하니 한국 사람 같진 않은데, 울림국제고는 원래 국제고등학교니까 외국인들도 몇몇 입학하곤 한다. 서윤이 글리치에게 몸을 돌렸다.
“아, 혹시 외국인 입학생이셨나요? 하지만 선배님들 중에서는 뵌 적이 없는 듯한데…….”
이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스치듯 본 적이 있을 텐데, 그런 기억이 없었다. 생각하던 서윤이 손뼉을 짝 쳤다. 그녀가 글리치를 향해 친근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하! 그럼 졸업생이시군요!”
“맞아. 졸업생이지.”
“……?”
서윤의 추측을 날름 받아먹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하빈, 그리고 납득했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짓는 서윤 사이에서 글리치는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