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외박 사유는 신중히 적어야 합니다 (1)
“턴다고? 사이비 종교를?”
“응! 털어야지. 나쁜 놈들이잖아?”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백리다를 탈탈 털어본 결과, 정작 백리다가 에라타나 스파이 행보에 대해 아는 건 적었다.
대신 마이너 패치가 운영하는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꽤 캐낼 수 있었다. 마이너 패치는 사이비 종교재단을 활용하여 각종 범죄 행각을 손쉽게 저지르고 조직을 굴리기 위한 자금도 벌어들이는 모양이었다.
하빈이 팔락팔락 자료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래. 들어보니 그쪽 종교재단이 돈이 엄-청 많더라고. 신자들에게 사기 쳐서 삥땅 친 돈이랑 걔네가 사업하면서 불려놓은 돈들! 그런 건 모두 잘 분배해서 피해자들에게 돌려줘야지……. 물론 나도 피해자고!”
“왜 마지막 말에 은근슬쩍 감정이 더 실린 느낌이지?”
“흠흠!”
하빈이 백리다에게서 들은 말들을 정리한 노트를 착, 하고 덮었다. 말단 조직원이었던 백리다에게 정보를 쪽쪽 뽑아낸 하빈은 곧바로 익명의 이름으로 SPES 관리국에 곱게 백리다를 넘겨주었다. 아마 SPES에서 백리다를 열심히 추궁해 봤자 하빈에 대한 실마리는 얻지 못할 거다.
설사 백리다가,
‘어제까지 민트초코에 대해 묻던 놈은 어떻게 된 거야?’
‘파인애플 피자에 대해 묻던 놈은 어디 갔지?’
‘내 수신기와 발신기를 뺏은 조직원들은 대체 뭐야?’
같은 소리를 해봤자 백리다가 교란을 위해 헛소리를 한다고만 생각하겠지. 애초에 백리다 성격상 그런 말을 마구 할 것 같지도 않고 말이다.
결정적으로 백리다는 자신이 정보를 넘겼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실수로 SPES가 백리다를 놓친다 해도, 마이너 패치는 현하빈이 사이비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입수했을 거라곤 추호도 모를 거다.
“왜냐면 사이비에 대해 질문할 때도 돌려서 물어봤거든.”
처음에는 목적어 없이 ‘백리다, 네가 관리하던 부서의 장소가 어디지?’, ‘그 부서의 목적은?’, ‘총괄하는 지역은?’ 같은 질문으로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사이비에 대해 말문을 열 때도 ‘백리다, 너는 사이비 신도들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하더군. 이미 사이비를 가입했나?’
‘사이비와는 무슨 관계가 있었지?’
같은 질문으로 얻어낸 정보들이라 백리다의 입장에서는 하빈이 실마리를 잡아서 그랬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중간중간에 이런 질문들도 섞였기 때문에.
‘그리고 지하철역에서 남학생의 제안은 왜 거절했지? 왜 순수한 소년의 꿈을 짓밟았냐!’
이런 류의 교란 질문들 말이다.
결국, 백리다로서는 어느 질문이 진짜고 어느 질문이 가짜인지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을 터.
그녀를 옮기고 묶는 작업들도 김릭샤와 이시네가 나서서 해결했고, 그 둘의 얼굴도 ‘몽환의 마왕’인 이프시네의 환상 마법을 써서 본래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보였을 테니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을 거다.
“나머지 일은 SPES가 알아서 하겠지, 뭐.”
곤란하고 복잡한 일들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도록 하자! 하빈이 ‘빨래 끝!’ 하는 CF의 한 장면처럼 후련한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채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SPES에 넘긴 건 잘한 일 같아.”
만일 백리다를 현하빈 선에서 소리 소문 없이 처리했다간 마이너 패치에서 배후를 궁금해할 것이다. ‘대체 어떤 조직이 스파이를 빼돌린 거야?’라며 궁금증을 가지겠지.
오히려 SPES에 곱게 넘겨주는 것이 마이너 패치 측에서도 ‘아, 평소처럼 SPES가 꼬리를 잡았네, 또 피데스 짓이겠지?’하고 스무스하게 넘어간다.
“그리고 이번 사건, 학교에는 연락이 안 갈 거야. 공식적인 보도도 없을 것 같고.”
채지석은 하빈에게 방금 들어온 정보를 알려주었다. 이번 일은 보도와 공지 없이 조용히 묻힐 예정이다.
아직 던전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리다 같은 스파이가 학교 안에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면 학생들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기 때문에.
대신 몇몇 주요 선생님들에게만 사실을 알리고 주의하라는 당부를 하기로 했단다.
“그러니, 피데스 님도 지금쯤 이 사실을 다 아셨겠지.”
현하빈에 대한 내용 말고, 학교에 있던 스파이가 잡혔다는 내용 말이다.
* * *
현시우는 백리다가 붙잡힌 소식을 듣고 당황했다.
“학교에 스파이가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다니.”
[……많이 바빴으니 그럴 수도 있지.]
던전 수습, 테러 수습, 거기다 현하빈의 카톡 사건까지.
현시우의 정신을 쏙 빼놓는 일들만 연달아 터진 덕에 교장으로서의 출근도 제대로 못 했다. 그래서 잠깐 스쳐간 전학생 백리다에 대해서 현시우가 신경 쓰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걸 전달해준 쪽이…… 솔라리스인 것 같다고요?”
“익명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추측이 됩니다. 아마도 교사로 근무하다 보니 다른 교원들보다 먼저 알아챈 게 아닌지…….”
[여러모로 솔라리스에 신세를 많이 졌군.]
테러 수습도 솔라리스에게 맡겼는데, 이번에도 신세를 졌다. 사실 채남매는 모르는 일이지만 현시우는 1회차 때 채남매와 동료로 전선에 자주 섰던 기억이 있었기에 이번 테러 사건도 그들에게 믿고 맡긴 것이었다.
‘채남매는 예측도 잘 하고, 특히 채지세는 폭탄 제거도 잘 할 테니 최고의 조합이었지.’
1회차 때 검증된 믿을 수 있는 동료, 거기다 믿을 수 있는 실력까지. 그래서 테러 사건도 맡겼는데 스파이까지 잡아다 줄 줄은 몰랐다.
“스파이 상태는 어떻습니까?”
“음,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고는 있습니다만, 식사로 나온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보고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격렬한……반응이요?”
“민트초코를 보고 흠칫하더니.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는데…… 무언가 트라우마가 있는 모양입니다.”
“흠…….”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민트초코를 싫어하나? 아니면 알레르기? 묘한 표정을 짓던 현시우가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이었을 수도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그 외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습니까?”
“계속 본인은 마이너 패치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익명 제보로 함께 들어온 증거물들이 너무 확실해서 조사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저희도 마이너 패치와의 연관성은 확실하다 판단하여 추가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마이너 패치 측에서 먼저 스파이와 접선하러 올지 몰라서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보고자를 돌려보낸 현시우는 홀로 집무실에서 생각에 잠겼다.
‘왜 스파이가 붙은 거지? 역시 이번에 던전을 막아내서 그런 건가?’
던전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이번 던전은 마이너 패치의 짓이다’라며 공식적으로 언급한 피데스. 그 점에서라면 마이너 패치가 첩자를 보낸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럼 ‘피데스’를 주로 감시했어야 했는데 왜 교장실엔 자주 들르지 않았지?”
기껏 학교에 보내 놓은 스파이는 현시우와 말 한마디 못 섞어 보고 붙잡혔다. 네아이바가 본인의 추측을 얹었다.
[들르기도 전에 붙잡혀서 그런 거 아냐?]
“그런 걸 수도 있지만…….”
현시우는 흘깃 백리다의 울림국제고 생활 이력을 보았다. 붙잡힌 이후 측정된 능력치는 A급. 그런데 일부러 F급으로 측정을 속이고 울림국제고 F반에 잠입했다.
“왜 굳이 F반을 신청했던 거지……?”
눈에 띄기 싫어서 F반에 갔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러기엔 차라리 D급이나 C급이 더 유리할 것이다. 과하게 힘을 숨기는 것도 컨트롤 능력에 부담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F반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있었단 건데.”
울림국제고 F반에? 굳이?
[그래, 하지만 이번 1학년 F반만큼은 좀 다르지.]
“다르죠.”
적어도 네아이바와 현시우는 확실히 안다. 그 어떤 메리트도 없는 F반에 존재하는 유일한 특이점.
“현하빈.”
하빈을 알아보기 위해서 심은 스파이다. 그런 결론이 가장 그럴듯했다.
“시간표를 봐도 그래요. 일부러 현하빈이 듣는 교양을 고른 느낌이에요.”
백리다의 핸드폰에는 웹툰, 혹은 웹소 어플이 단 한 개도 깔려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웹툰, 웹소 강의를 신청했다.
“그러니까 결국, 마이너 패치는…….”
[현하빈을 주목하기 시작했군.]
대체 어떻게 현하빈의 존재를 파악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현시우는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었다.
“걔네, 자기들 스스로 무덤을 파네요?”
[그러게……?]
1회차 때 인터넷 유명 사이트 공식 설문 조사에서 ‘건드리면 다치는 인간 1위’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던 현하빈. 가만히 놔두면 좀 더 명줄이 길어질 텐데 왜 굳이 그런 애를 건드리지 못해 안달인지.
현시우는 마이너 패치에게 묵념을 해주려다 그쪽은 나쁜 놈들이라 참았다.
* * *
“보고 싶었어, 평화로운 학교야!”
-삐이!
리베를 데리고 뒹굴뒹굴 침대에 드러누운 하빈. 그 모습을 보며 서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 그동안 어디 갔다 온 거야?”
땡땡이가 일상인 하빈이었지만 이번엔 말도 없이 이틀째 기숙사를 나갔던 현하빈.
사실 그녀는 그동안 마계에 백리다 잡아놓고 추궁하고 하느라 채남매네 집에서 자고 온 것이었다.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외박계는 쓰고 다녀왔다구. 점호는 무사히 넘어갔지?”
교칙상 외박은 미리 사이트에 외박 사유를 적어야 했다. 그래야 밤에 점호를 할 때 벌점을 받지 않았다. 참고로 하빈은 ‘제 돈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꼭 부자가 되어 돌아올 예정.’이라고 썼다.
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언니 벌점 안 받았어!”
벌점이 많이 쌓이면 퇴실이었다. 하빈이 서윤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아늑한 보금자리를 뺏길 수 없지!’
물론 하빈의 집이 따로 있었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잘 곳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던가? 하빈은 벌써 채남매네 집, 학교 기숙사, 하빈 본인의 집, 이프시네의 집까지 무려 4개의 숙박 시설을 확보했다!
-삐이.
때마침 아장아장 걸어온 리베가 하빈이 들고 있는 종이 서류를 우물우물 베어 물었다. 하빈이 황급히 서류를 뺐다.
“어어, 지지. 이거 먹는 거 아니야!”
하빈이 들고 있던 건 마이너 패치가 관리하는 사이비 종교 재단에 대한 보고서였다.
‘종말교.’
밑에는 종말교에 대한 설명들이 주루룩 적혀있었다.
‘으음…… 여긴 뭐지? 마신의 존재와 종말의 도래를 믿어?’
“헐, 두 개나 맞췄네! 마신도 찐이고 멸망도 찐이잖아?”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더니!
“흐음…….”
마신 마신 하니까 어쩐지 찐 마신인 꼰대 선배가 생각나는걸? 하빈이 손에 낀 반지를 흘긋 쳐다보았다.
“본인과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 대면서 사이비 종교 운영하는 거, 꼰대도 싫어하겠지?”
본인이 직접 보면 무슨 생각 들까? 한번 보여줘? 말아?
이거 마신 본인이 직접 처리하게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슬슬 소환해 볼까?”
하빈이 빙글, 손에 끼인 반지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