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마계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수 있을 리 없다.
백리다에게 추궁하기 전, 하빈은 백리다가 그동안 보냈던 보고서를 다 확인한 참이었다.
“에엥? 뭘 이런 걸 다 적어보냈담?”
-표적은 오늘 회덮밥과 김치족발, 막국수를 먹었습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좋아하는 메뉴인 모양입니다.
-표적은 오늘 학교를 나갔습니다! 아…… 레몬 케이크와 복숭아 아이스티를 시키려고 나갔다 온 모양입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좋아하는 메뉴인 듯합니다.
백리다의 하빈 관찰기. 그걸 읽어내려 가던 하빈의 표정은 점점 괴상해졌다.
“헉, 내 최애 숨은 맛집 카페를 알아내다니?!”
레몬 케이크와 복숭아 아이스티를 시킨 카페. 그곳은 하빈이 발굴해 낸 맛집 카페였다.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 내 맛집을 왜? 설마 맛집을 알아내고 싶었던 건가?”
작성한 보고서는 죄다 하빈의 먹방 대잔치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중요한 정보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으음, 하고 턱을 매만지던 하빈이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합정역 맛집은 상당히 중요한 정보이긴 해. 여긴 번화가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그때부터 곤란해진다.
‘그럼 웨이팅이 너무 길어진다고!’
숨겨진 맛집은 재깍재깍 가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엄청난 이점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발굴해 내기 전에 먼저 개척했다는 자부심, 그리고 사람들이 줄 서는 유명 맛집이 되기 전에 줄 안 서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단골손님이 될 수 있다는 점까지.
“안 그래도 합정역에 유동인구 많아서 힘든데, 이 마이너 패치 놈들이 내 소중한 맛집 리스트까지 털어가다니!”
하빈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 백 억을 털어가는 것도 모자라 남의 맛집 정보까지 날름날름 빼가?
“나도 채씨랑 친해지고 나서 겨우 모은 것들인데!”
그 리스트를 모으기까지는 맛집 추천 장인 채지석의 공도 컸다. 하빈이 채지석을 돌아보았다.
“채씨! 채씨는 우리 맛집 리스트 뺏긴 거 화 안 나? 에휴, 이런 게 궁금하면 그냥 물어볼 것이지. 그럼 친절하게 알려줬을 수도 있는데. 역시 말린 멸치들은 예의가 없어.”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 사생활이 털렸다는 게 더 큰 문제이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큰 문제지!”
도청 방지 장치, 방음 장치를 쫙 깔아놓을 정도로 사생활에 신경 쓰던 전직 셀럽 현하빈. 덕분에 백리다는 하빈의 사생활을 제대로 캐지 못했으니 그 점은 선방한 걸지도.
“으으, 내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 감시당했다니 기분이 무척 불쾌한걸!”
하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비록 장난스럽게 돌려 말했다지만 이건 커다란 문제였다. 마이너 패치가 끄나풀까지 심어서 하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 말은,
“……마이너 패치 쪽도, 나한테 관심을 둔다는 거네.”
어떤 이유 때문일까?
“흐음.”
하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깍지 위에 턱을 괸 그녀가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이제껏 내가 마이너 패치랑 깊게 엮인 적은 없는데.’
물론 마이너 패치가 백 억을 털어갔다는 악연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하빈 개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게 아닌, 한국의 새빛은행을 상대로 일어난 범죄였을 뿐.
‘설마 내가 새빛은행 VIP라서 감시한 건 아닐 테고.’
털고 보니 최대 예금자였다거나 털고 보니 미안해서 감시했다거나, 그럴 리는 없겠지. 대한민국에 백 억 이상 예금한 인간이 현하빈만 있었을 리는 없고, 미안해서 감시할 리는 더더욱 없고.
‘그럼 뭐 때문에 감시했던 거지?’
하빈이 자신의 스펙을 진지하게 돌이켜보았다. 일단 마신으로 추앙받고 있긴 했지만 마이너 패치는 그걸 모를 테니 기각.
그리고…… 스탯이 21억을 찍는 –1위 현상 수배자.
“아, 이건 그럴 만하다.”
에라타는 세계 랭킹 3위니까 말이다 그쪽한테도 하빈을 잡으라는 퀘스트가 떴을 거다.
“이걸 의심하고 있나? 아니, 설마 의심할 리는 없지. 무슨 실마리가 있다고 의심하겠어?”
그러니 일단 이 이유는 보류.
“그리고 또 무슨 이유가 있다고 그래? 고작해야 강태서랑 동창이고, 채씨랑 돈가스 나눠 먹고, 지세 언니랑 딸기 뷔페 갔고, 코니 할머니한테 편지 받고…… 그게 다인데?”
그게 다라니.
"……그, 그 정도면 거물 맞는 것 같은데."
채지석이 조용히 지적했다. 솔직히 그가 보기에도 현하빈은 그동안 벌려놓은 일이 정말 많았다.
몰래 최상급 던전들을 깨부쉈고, 관리자가 퀘스트를 내렸고, 고위 랭커들과 친하다. 휘말린 굵직굵직한 사건들도 너무 많다.
‘저번에 카지노에서도 추적이 붙은 적이 있고 말이지.’
혹시 그것의 연장선일까?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건덕지가 너무 많아서 뭐부터 찔러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쉽니다.]
“그래. 너 이쯤이면 피데스 님하고 엮인 일은 없냐? 그분이랑 엮이면 그랜드슬램 달성일 것 같은데.”
채지석의 농담 섞인 말에 하빈이 찔려서 펄쩍 뛰었다.
‘저번에 던전에서 엮였다고는 절대 말 못 하지!’
“가, 가면마법사? 그 녀석이랑 내가 왜 엮여?”
“……왜? 일단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시잖아.”
“앗, 아, 이미 우리 학교 교장이긴 하지만!”
하빈이 시선을 피했다. 우연히 던전 보스룸에서 만나 이리저리 대화를 주고받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찔리는 게 있나 본데.’
여기서 더 추궁해 볼까.
“그래. 이미 교장 선생님으로 엮여 있지. 또 그것 말고 걸리는 점은 없어?”
“……없어!”
하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함께 보스를 상대했다지만 그것 때문에 마이너 패치가 현하빈을 감시할 것 같진 않았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오리무중으로 가는 상황에, 아헤자르가 의견을 내었다.
[흠, 네 오빠 쪽은 잘 모르지 않느냐?]
‘오빠가 왜?’
[지금 마이너 패치가 널 감시한 이유가, 현하빈 너 때문이 아닌 네 오빠와 관련된 일일 수도 있지.]
‘엥……?’
그렇네. 그러고 보니 그쪽을 안 챙겼다.
만약 마이너 패치가 하빈을 감시하는 이유가 하빈 그녀만의 이유가 아닌 현시우와도 관련 있는 일이었다면? 현시우에게 복수하고 싶었던 마이너 패치가 현하빈에게 먼저 마수를 뻗친 거라면!
‘잘잘이, 웬일로 날카로운 추론을!’
[커흠, 본디 가족과 관련된 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한번 그 부분을 경계해 볼 필요가 있지.]
‘왜? 잘잘이, 무슨 일 있었어?’
[나 때도 계속 따라붙는 암살자가 있다며 하소연을 하던 제자가 한 놈 있었다. 근데 알고 보니 그 녀석의 어머니가 타국의 실종되었던 왕녀였지 뭐냐! 그래서 왕위를 노리는 다른 계승권자들에게 견제당했던 모양이야.]
‘엥? 근데 그걸 본인이 몰라?’
[어머니가 말을 안 해주는 바람에 본인이 왕족인 것조차 몰랐다고 하더군. 그래도 나중에 알게 된 후에 직접 돌아가서 왕위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동안 내게 신세를 많이 졌다는 이유로 은사님이라 부르며 온갖 선물과 혜택을 주려 했지만 난 거절했지!]
뿌듯했던 듯 헛기침을 하는 아헤자르. 뭐,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꽤나 가능성 있는 추론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로 현시우 때문인가?’
아, 현새우 진짜 밖에서 뭐 하고 다니는 건데? 진짜로 말린 멸치랑 엮였냐?
너네들 때문에 고래 등 다 터진다고!
확실히, 현시우가 국정원이나 각성자관리국 같은 기관에서 근무한다면 마이너 패치와 종종 부딪힐 일이 있었을 것이다.
‘조만간 생존 신고를 하라고 해야겠어.’
그래도 최근에 카톡 답장이 멀쩡하게 온 걸 보면 아직까지 문제없이 살아있는 듯하니 그쪽은 일단 내버려 두고.
“에휴, 우리끼리 이렇게 떠들어도 답이 안 나오니까, 진짜는 저쪽에게 물어보는 게 낫겠지.”
마침내 결론을 내린 하빈은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이건 저쪽 마왕성 지하감옥에 있는 스피커랑 연결된 마이크다. 여기서 말을 하면, 저쪽에 있는 백리다에게 음성변조되어 들리는 구조.
‘크, 던전 내 와이파이는 진짜 신의 발명품이야.’
이걸 이렇게도 써먹을 수 있다니까. 한국에서 마계까지 직통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하빈은 화면 너머로 보이는 백리다를 향해 물었다.
“첫 번째, 왜 울림국제고에 잠입한 거지?”
앞서 수신기와 핸드폰을 털렸다는 말에 잠깐 멈칫하던 백리다. 그러나 그녀는 평정을 찾으며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내 나이에 학교를 가는 게 뭐 어때서?
물론 울림국제고 학교 입학에 나이 제한은 없다. 그러나 지세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백리다는 최소 20대 성인으로 추정된다 들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굳이 힘들게 또 고등학교를 다닌다니! 그것도 힘들기로 유명한 한국의 학교를!’
피데스가 가르치는 과목과 하빈이 듣는 교양 수업, 거기다 수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다른 과목들까지 다 섞어 들어가며 열심히 학교를 다녔던 백리다.
“학교를 왜 두 번이나 다녔지?”
-그전까지는 외국에서 다녀서 한국 문화를 한 번 더 제대로 익히기 위해 다닌 것뿐이야!
미리 준비한 듯 매끄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빈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힘들었을 텐데! 자퇴할 마음은 들지 않았나?”
예기치 못한 자퇴 질문에 백리다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 이제 일주일 다녔는데 웬 자퇴……? 그리고 자퇴할 만큼 힘들지도 않았는데……?
‘뭐? 말도 안 돼. 다니는 내내 단 한 번도 자퇴 생각을 한 적이 없단 말이야?’
그러자 아헤자르가 혀를 찼다.
[첫날부터 자퇴를 입에 달고 산 네가 이상한 거다!]
실제로 입학식 날부터 자퇴를 고민했던 현하빈. 그녀는 헛기침을 했다.
“크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다음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야.”
‘아주 중요한 문제.’
백리다는 티 나지 않게 긴장했다. 하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동안 작성했던 보고서, 다 읽어 봤어.”
-……보고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무슨 보고서?
백리다는 의기양양하게 둘러대며 모른 척을 했다.
‘넘어가면 안 돼.’
보고서를 읽지 않았으면서 읽었다고 진술 유도를 하는 빤한 방법이다. 그 정도는 백리다도 알았다. 하지만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복숭아 아이스티와 레몬 케이크.”
-……!
그건 백리다가 보고서에 적은 내용이었다. 그녀가 남몰래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 그럴 리가. 진짜로 보고서 데이터를 찾아낸 거야? 어떻게?’
백리다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되뇌었다.
‘침착해. 침착해야 한다. 떠보는 것일지도 몰라.’
정말 만에 하나, 백리다가 현하빈을 감시했다는 걸 눈치챘다면, 현하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을 거라는 추론쯤이야 금방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표정을 갈무리해 전혀 모르겠다는 낯을 하는 백리다.
‘여기서 저쪽이 뭐라고 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녀는 조용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신문 내용을 기다렸다. 하빈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너는 복숭아 아이스티 맛집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 두었더라고. 그 의도가 의심스러워.”
-……?
‘맛집을 상세하게 적어둔 의도?’
그런 의도 따위 없었다! 현하빈이 맛집 가길래 그냥 그대로 적은 거였다. 백리다의 집중이 다소 흐트러졌다.
그러나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진중했다.
“설마 맛집을 탐방하기 위해 잠입한 건가? 울림국제고에?”
-……네?
맛집을 노렸을 리가 없잖는가! 그런 거 노린 적 없다. 오히려 그런 것만 적느라 현타가 왔던 백리다가 아니었던가.
‘이, 이건 대체 무슨 신문이지?’
그동안 수많은 레퍼토리에 대응하는 법을 익혔던 백리다. 상대의 미끼에 현혹되지 말고, 어떤 고통과 고문에도 배후를 불지 말고, 수많은 정신력 훈련으로 겪어 온 나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훈련에서도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라는지는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응? 대답해야지, 백리다! 합정역 맛집을 왜 노리고 있었냐고 묻고 있잖아.”
-구, 국정원에서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건데!
“어허, 맛집 선정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국빈을 대접할 때도 맛있는 곳에 데려가서 대접을 해야 하는 거야.”
-국빈은…… 청와대 셰프가 대접하는 게 아니었나?
“하? 백리다, 청와대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건가? 대체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왔지? 청와대도 접수할 생각이었나?”
-……?!
‘……이게 무슨 대화야?’
자칫하면 청와대 습격 주모자로 엮어서 감방에 넣을 생각인가?
페이스에 휘말리면 안 되는데 계속 휘말리고 있었다. 어떤 신문 연습과 시뮬레이션에서도 겪어 본 적 없는 희한한 레퍼토리에 백리다는 어떤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몰라 심적으로 주춤했다.
현하빈 역시 화면으로 백리다의 살짝 흔들리는 표정을 확인했다.
‘좋아, 지금이다!’
하빈은 옆에 있는 다른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건 이프시네에게만 들리는 무전기로 연결된 마이크였다.
“이시네, 지금이야, 그 스킬 준비해.”
“넵! 마시…… 아니, 마이 상관님!”
이프시네는 몽마 일족. 타인의 꿈에 파고드는 것이 특기다. 그녀가 가진 스킬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독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