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54) (154/268)

154. 이래서 등굣길이 아주 위험합니다. (3)

“있잖아 채씨.”

“왜?”

하빈은 채남매네 집에서 새우땅 과자를 바삭바삭 씹으며 입을 열었다.

“나 백리다 잡았어!”

“뭐?! 진짜로?”

갑자기 던져진 주제에 채지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저번에 분명 계획을 듣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 하빈이 백리다를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한 모양이었다.

벌떡 일어난 채지석을 향해 지세가 덧붙였다.

“응, 오늘 아침에 잡았다더라. 꽤 깔끔하게 처리해서 목격자라거나 다른 문제가 생길 일은 없을 모양인데.”

몇 없는 목격자마저도 백리다가 자진해서 차에 타는 걸 봤을 뿐이었다.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문제는 생길 거야! 벌써 마이너 패치에서 찾고 있을걸? 등교를 안 했잖아.”

무려 학생인 백리다가 등교를 안 했으니 말이다.

[너도 학생인데 등교를 안 하지 않느냐?]

“에이, 나랑은 사정이 다르지! 걔는 성실한 전학생인걸.”

어쨌든 성실하게 등교하던 백리다가 사라졌으니 학교에서도 리다의 보호자 연락처로 연락을 돌렸을 거다. 또한 마이너 패치에 정기적으로 올라가던 보고도 끊겼을 테고.

“마침 백리다가 사라지자 걔 폰으로 연락이 몇 번 오더라고. 이쪽 위치추적은 안 되게 조심하면서 역추적을 해보았지.”

지세가 꿍꿍이 있는 웃음을 지으며 손 위에 놓인 사과폰을 빙글 돌렸다.

“역추적 과정이 상당히 까다로웠어. 해외 아이피를 얼마나 돌리고 돌렸는지. 프록시의 끝판왕었더라. 뭐 그래도 최종 연락 장소를 추적할 수 있었어. 겸사겸사 그쪽 서버를 짐작해서 정보를 좀 털어봤는데.”

다른 해커라면 절대 할 수 없었을 일이었겠지만 채지세는 예지 능력자. 촉이라는 게 아주 잘 선다. 백리다를 통해 잡은 아주 작은 실마리를 통해 이렇게 저렇게 찌르다 보니 꽤 많은 정보가 털려 나왔다.

“물론 하빈이가 나한테 해킹 도움 안 받겠다고 했지만, 내가 궁금해서 더 찾아본 거니까 부담 갖지 마.”

솔라리스 역시 마이너 패치에게 당한 피해가 많았다. 이번에 겸사겸사 되갚아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원한다면 진짜 국정원이나 각성자관리국 요원이랑 연계해서 제대로 수사 들어갈 수 있긴 한데…….”

언제든 도와주겠다며 선뜻 대안을 제시하는 채지세.

“조금 늦게 신고하는 것 정도로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그동안 정보 좀 알아내고,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당방위 했다고 하면 되니까.”

상대는 최소 B급 각성자. 대응하는 과정에서 수면 가스 아이템을 썼다 해도 신체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았으니 괜찮을 것이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헤드락도 걸지 않았냐며 지적합니다.]

그 말에 하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엥? 손이 잠깐 미끄러져서 목에 감긴 거 가지고 너무하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어떻게 손이 미끄러져 뒷좌석 탑승자의 목에 감길 수 있냐며 의문을 표합니다!]

“뭐? 반짝이 자꾸 그럴래? 내가 얼마나 손이 미끄러운 사람인데. 긴장하면 손에 땀이 난다구!”

하빈은 양 손바닥을 잠깐 들어 보였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양 손바닥이 너무 뽀송뽀송해서 햇빛에 말렸다고 해도 믿겠다며 눈을 흘깁니다!]

“흠흠, 반짝이가 눈이 좀 안 좋네. 그리고 아까는 분명 손에 땀 났거든? 또 반짝이 네가 햇빛 그 자체니까 쳐다보는 순간 말랐을 수도 있잖아!”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게 말이 되냐며 고개를 갸웃…….]

하빈은 계속되는 알림을 무시하며 천연덕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자자, 어쨌든 말이야, 백리다 쟤, 곱게 몇 가지 정보만 알아내고 관리국에 넘겨주자.”

마이너 패치 소속이라는 증거는 이미 백리다의 핸드폰으로 넘치게 잡아냈다.

지세가 그들 사이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백리다를 모셔 놓은 곳은 크릭샤가 안배한 마계의 감옥. 그곳에 안락하게 묶여 있는 백리다의 모습이 보였다. 채지세가 백리다의 모습을 보며 덧붙였다.

“그놈들 정말 악랄한 게, 적진에 넘어가는 순간 체내에 침투해 독을 주사하는 독침을 입안에 넣어 놨더라고. 다행히 이쪽 성좌님이 발견해서 긴급 조치할 수 있었어.”

스파이가 다른 세력에 붙잡혔을 때 정보를 누설하지 않도록 사살 아티팩트를 마련해 둔 것이었다. 일정 기간 이상 연락이 두절되면 자동 작동되는 사살 아티팩트. 다행히 제한 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채지세가 미리 손을 써 제거해 두었다.

하빈이 화면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엥, 그런데 쟤 벌써 깨어난 거 같은데?”

화면 속, 고개를 들고 뭐라 뭐라 말을 꺼내는 백리다. 그걸 지키고 있던 이프시네가 종종거리며 근처로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소리를 키워 볼까?”

채지석이 홀로그램을 조작하자 치직거리는 잡음 끝에 비로소 말소리가 들려왔다.

-……치…지직……저는 한국의 국가정보원 대테러 각성자특별관리부서 소속 ‘이시네’! 당신을 외국 범죄조직 ‘마이너 패치’의 일원으로 판단하여 이렇게 비공식 체포합니다!

-……흠흠. 그렇게 쳐다봐도 안 풀어드려요!

바짝 군기가 선 목소리로 백리다에게 거짓 상황 설명을 하는 이프시네.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 이프시네가 연기가 많이 늘었어. 처음에 연습할 때보다 훨씬 잘하네!”

[그래. 처음 연습할 때는 이름도 까먹더니만.]

참고로 처음 국정원 대사 연습할 때는 이프시네가 본인 이름을 ‘이시네’가 아닌 ‘잎시네’로 대거나, 국정원이 아닌 마계 소속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마왕으로서 자신을 소개할 때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리라.

“좋아, 그럼 이제 마저 추궁해 볼까?”

서로 소개도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백리다에게 정보를 듣는 게 좋을 것이다.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세가 끼어들었다.

“하빈이 혼자서도 괜찮겠어?”

“응? 걱정 마. 이시네랑 김릭샤가 있는걸.”

일부러 백리다를 상대할 인원으로 신원 미상인 둘을 골랐다. 만에 하나 백리다가 탈출한다 해도 이들의 정체가 누군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채지세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도 더 도와주고 싶지만 하필 오늘이 우리 포켓파이 발표 날이라서 말이야.”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채씨랑 지세 언니는 빼려고 했던 거였는걸. 해킹이랑 이것저것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해.”

하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채지세가 들고 있는 포켓파이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던전 안에서도 터지도록 설계했던 포켓파이의 대중 공개. 그게 오늘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지석이는 여기 남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 연락하고.”

“물론이지!”

대화를 마무리한 하빈이 홀로그램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석이 물었다.

“이제 어떡할까? 이프시네에게 통신 연결할까?”

그러고 보니 지금 이렇게 마왕성을 편하게 여기서 감상할 수 있는 것도 던전 안에서도 통신이 터지게 하는 신기술 덕분이었다.

흡족한 표정을 지은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럼 이제 저 가련한 폭풍의 전학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자고.”

* * *

“피데스 님, 이번에 솔라리스에서 던전 안에서도 터지는 통신 기술을 발명했답니다!”

“네?”

바로 그 시각. 예상치 못한 말에 현시우가 고개를 돌렸다.

던전 안에서도 통신이 터지는 신기술.

‘그건 과거에도 현하빈이 개발하라고 했던 건데.’

당시 개발의 중심에는 현하빈이 있었다. 그녀가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 덕에 딱 이맘때 개발에 성공했었지. 물론 그때도 개발자는 채지세였다. 듣기로는 핵심 재료 ‘반쪽 점토’를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려 지금에야 개발에 성공한 것이라 들었지만.

‘이번에도 과거랑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정 안 된다 싶으면 나중에 현시우라도 반쪽 점토를 구해 개발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지점이었다.

‘이번에도 현하빈이 관련 있었나?’

채지세와 현하빈이 친밀한 사이인 걸로 보아 현하빈은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저런 신기술은 시작하기 전에 베타테스트를 거치는 게 일반적. 현시우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굴러갔다.

‘베타테스트 기간을 생각하면…… 그럼 현하빈이 SSS급 던전을 공략하던 시간대와도 맞물리는데.’

설마 그때도 던전으로의 통신 기술을 활용해서 던전 내의 상황을 눈치챘던 건가?

과거 현하빈이 그렇게 바랐던 방식으로 말이다.

‘왜 연락을 하지 않았어? 이러라고 통신 기술을 개발했던 거였는데!’

당시 기술을 활용하지 못해 구하지 못했던 인원들. 그걸 이번에는 제대로 써먹어서 구한 건가?

[와, 만약 네 추측이 사실이라면 현하빈 보통 애가 아닌걸?]

회귀 전에도, 후에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내고 마는 현하빈의 행보.

[얘 설마 회귀 전의 기억 있는 거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행보가 다 의심스럽단 말이지. 어떻게 딱 킬스크린을 공략하고, SSS급 던전까지 공략하는 거야? 진짜 회귀 전 기억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있나?’

현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말이 안 된다. 만약 현하빈이 회귀 전 기억이 있다면 현시우의 정체를 먼저 눈치챘을 거다.

‘그리고 안 그래도 돈 중요시하던 애인데 주식 투자 같은 거 열심히 했을걸요? 마이너 패치에게 그동안 당했던 원한이 있으니 시작하자마자 그쪽부터 치고, 또 히든피스 독식도 했을 텐데. 그런 행보는 안 보인단 말이죠.’

[흐음……. 그럼 던전 안에서도 터지는 통신 기술은 왜 만든 거며, 이번 SSS급 던전 공략은 왜 나서서 한 건데?]

네아이바의 의문에 현시우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래도 요즘 현하빈의 행보에 빗대 추측해 보자.’

최대한 단순하게, 최대한 뒹굴거리려는 사람의 입장으로 대입해서! 생각해 보자.

‘음……. 그냥 던전에서 인터넷 하고 싶어서? 그리고 SSS급 던전에 들어온 건…… 학교에 두고 온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들어갔다가 상황 파악하고…….’

[네가 생각해도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죠.’

[그치?]

근데 왜 이상하게 말이 되는 것 같냔 말이다…….

“어쨌든 피데스 님, 솔라리스의 신기술 발표식 보실 거죠?”

“아, 네.”

부관의 물음에 현시우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이번 통신 기술은 지난 회차와 같을까, 다를까?

그리고 과연 지난 회차 같은 파급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분명 지난 회차에서는 이 기술이 대중화되면서 불러온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이번에도 그 기술이 발표되는 역사적인 순간은 당연히 관람해야 할 것이다. 결론을 내린 현시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그쪽 이름이 이시네?”

“…….”

백리다의 날카로운 질문에 이프시네는 무시로 일관했다.

‘마신님이 웬만한 말에는 대꾸하지 말랬어!’

혹여나 이곳이 마계라는 정보나 마신님의 신상에 대해 정보를 흘릴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프시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리다가 칫, 하고 한숨을 쉬었다.

“됐어, 뭐 가명이겠지. 그래서 날 왜 끌고 온 거야?”

‘이건 대답해도 되는 질문이다!’

이프시네는 기다렸다는 듯 각 잡힌 자세로 재깍 대꾸했다.

“그건, 당신이 말린 명치…… 아아니, 마이너 패치의 일원이니까!”

하도 하빈에게 ‘멸린 말치를 족쳐야 해’ 같은 말을 듣다 보니 이시네 그녀도 모르게 입에 붙어 버린 탓이었다.

‘……말린 명치?’

명치를 왜 말리는데? 어쩐지 섬뜩한 말에 백리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일부러 나를 떠보려는 건가?’

일부러 허술한 척 굴면서 백리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인가?

‘절대 그 수작에 어울려 줄 수는 없지.’

백리다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마, 마이너 패치?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오는 건데? 당신들 뭐야? 사람 이렇게 묶어놓는 거 납치야! 당장 안 풀어?”

‘무조건 모른다고 둘러대야 해.’

꼬리를 잘리더라도 그녀까지 잘려야지, 조직까지 엮여서는 안 된다. 계산을 끝낸 백리다가 철컹철컹, 손을 흔들 때였다.

-엥,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는데.

그녀의 곁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현하빈의 목소리었지만 음성 변조된 목소리라 그 상대가 누군지 백리다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백리다가 홱 스피커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뭐야? 그쪽이 보스야? 당장 안 풀어? 국정원이 이래도 돼? 난 아무것도 몰라!”

-발뺌하네? 네 핸드폰 비번, 이미 다 풀었는데?

“……!”

철렁. 순간적으로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백리다는 겉으로 동요하지 않았다. 핸드폰에 증거를 남기지 않는 건 스파이의 상식 아닌가?

‘그거 뒤져봤자 나올 건 없어. 침착하자.’

그러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맞다! 숨겨져 있던 수신기도 다 압수했고.

“……!”

백리다는 시선이 따라가지 않으려 노력하며 본인 허벅지의 감각을 확인했다. 수신기와 발신기가 심어져 있을 만한 곳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게 느껴졌다.

‘그,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걸 본부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는 건가?’

신호를 보낼 방법도, 받을 방법도 사라졌다. 스피커 너머에서 그걸 알려주던 하빈은 보란듯이 쐐기를 박았다.

-백리다, 너 그동안 마이너 패치에게 꾸준히 보고서 보내고 있었지? 이미 그것도 다 털렸어. 마이너 패치랑 상관없다고 둘러대긴 늦었다구. 애써 힘 뺄 필요 없다니까? 그러니 이제 순순히 대답이나 하는 게 좋을 거야.

“…….”

도망칠 곳 없이 완전히 허를 찔렸다. 백리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첫 번째, 왜 울림국제고에 잠입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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