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53) (153/268)

153. 이래서 등굣길이 아주 위험합니다. (2)

‘아, 이건 타야지!’

사실 드리프트를 하면서 등장한 인물은 현하빈이었다. 기만자의 소망으로 외형을 바꾸어 터프하게 운전대를 잡은 현하빈!

‘그동안 퀵 알바랑 대리운전 알바 뛰면서 갈고닦은 운전 실력이라구!’

범상치 않은 바퀴 컨트롤과 극적인 드리프트 실력은 다 그렇게 갈고닦아진 거였다. 하빈의 외형은 기만자의 소망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모습이고, 자동차는 지세 언니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차량이라 추적에도 자유롭다. 차주도, 운전자도 이 세상에 기록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그야말로 완전 범죄!

하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한 백리다를 향해 박력 넘치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군! 다행이야!”

“뭐, 뭣?”

“설명할 시간이 없어, 빨리 타게!”

의미심장한 분위기와 화려한 이펙트까지.

‘자, 원래 동행 제안은 사람이 생각할 틈을 주면 안 되는 거라니까?’

호기심과 궁금증을 최대치로 올려놓고, 지금이 아니면 절대 다시는 오지 않을 두근거리는 기회처럼 포장해야 한단 말씀!

‘이게 바로 홈쇼핑에서 자주 쓰는 방법이지.’

지금 당장 주문하세요, 지금 이걸 보고 계시다니 운이 정말 좋으시네요! 운명의 아이템입니다. 바로 주문하지 않으면 2분 내로 매진 예상됩니다!

갑자기 다가온 차량을 바로 잡아타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 같다거나, 혹은 지금 이 차를 타면 두근거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될 것 같다거나. 그런 기분을 안겨 주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당장 타지 않으면 바로 출발할 것 같은 분위기까지.

부르릉!

요란한 배기음이 백리다의 결정을 재촉했다.

[그,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법에 넘어가겠느냐?]

아헤자르가 걱정이 된 듯 속닥였다. 그동안 사이비 종교도 물리치고 남학생의 대쉬도 거절했던 백리다. 그녀가 이런 신원 미상의 미스터리한 차에 올라탄다고?

‘뭐, 안 넘어가면 어때? 안 타나 보다, 하고 다음 대책을 세우면 되지.’

백리다가 무시하면 ‘아핫, 다른 사람과 착각했군, 잘 가게 학생! 공부 잘 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따위의 대사 날려주면 되겠지.

“…….”

그 시각. 백리다는 여전히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하빈과 열린 차 문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짧은 순간 엄청난 갈등을 하는 듯 찌푸려진 미간.

찰나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공백은 아주 길게 느껴졌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백리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

하빈의 차 뒷좌석을 향해.

* * *

‘……이, 이건 또 뭐지?’

백리다가 처음 하빈의 ‘미스터리 드리프트 카!’를 마주했을 때 든 생각은 의아함과 황당함 그 자체였다.

그동안 조직원으로서 교육은 받았지만 이런 상황까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다.

‘드디어 찾았군, 다행이야!’

정말 백리다를 찾아 헤맸다는 듯 긴급한 목소리, 게다가 상대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설명할 시간이 없어, 빨리 타게!’

이 차는, 당장 타지 않으면 바로 출발할 것만 같았다.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 거지?’

솔직히 인간으로서의 백리다는 이 상황이 너무 궁금했다!

그동안 열심히 하빈을 관찰했지만 돌아온 거라곤 학생들 사이에서 낑겨 듣는 지루한 수업, 소득 없이 급식 먹고 놀기만 했던 시간 뿐.

저번에 표적이 솔라리스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솔라리스 자택의 삼엄한 추적, 염탐 방지 시스템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못 들었다. 치킨 배달부가 다녀가는 것과 치킨 상자가 발견된 것으로 진짜 치킨을 먹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들었을 뿐.

‘아냐, 침착하자. 이 모든 게 고도의 연막일지도 모른다.’

먹는 것과 노는 것에만 신경이 팔린 척해서 평소 이미지를 통해 방심시킨 다음, 정작 거물들을 만났을 때 제대로 된 회의를 한다거나.

그걸 심증으로만 쌓아두었을 뿐 정작 백리다가 제대로 건진 건 하나도 없었다. 매일매일이 지루하고 답답한 학교생활뿐.

그래서 백리다는 한껏 신경이 예민하고 조급해져 있었던 것이다.

‘함정일지도 몰라.’

스파이로서의 날카로운 감이 절대 경계를 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백리다 역시 경계를 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뭐라도 해야 해!’

그러나 백리다의 성취욕과 향상심은 그걸 앞질렀다. 무언가 건질 만한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건져야 한다. 설사 그것이 함정일지라도.

‘그것이 바로 스파이의 숙명.’

백리다는 짧은 시간 동안 차량과 앞 좌석 운전자의 실력을 파악했다. 운전자에게서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능력자이거나 F급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고위 실력자라면 굳이 이런 방식을 썼을 리가 없다.’

이런 조잡하고 희한한 방법을 굳이 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실력자였다면 진작 백리다를 처리할 수 있었다. 으슥한 뒷골목에서든, 백리다의 집으로 쳐들어가든, 혹은 다른 방식이든.

이렇게 황당하고 뻔뻔한 방법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럼 진짜로 이 차를 타고 가면 뭔가가 나오거나, 아니면 역으로 내가 이쪽을 칠 수 있겠어.’

백리다는 자신이 있었다. 확신이 있었기에 차를 타기로 결정했다. 비록 F반에 숨어있지만 백리다의 실제 실력은 B급 이상. 거기다 마이너 패치에서 제대로 된 살상 교육과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 그러니 이런 조잡한 차량과 허접한 운전자쯤은 간단하게 제압하고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탈출 못 한다면, 백리다가 죽음을 각오하고 이들의 정보를 마이너 패치에게 송신하면 된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 마침내 차량에 몸을 실은 것이다.

달칵.

마침내 차량에 탑승한 백리다가 운전석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죠? 어디서 오신 거예요?”

탐색하기 위한 질문이었기에 백리다는 아직까지 평범한 학생인 척 가장하고 있었다.

‘앗, 뭐라고 말하지?’

신이 나서 멋지게 차에 태울 생각까지는 했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말할지는 생각 안 났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이큐 187의 하난. 뭐라도 방법을 생각해 내는 수밖에!’

하빈은 앞 좌석 밑에 숨겨놓은 아헤자르를 건드리며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자, 잠시만, 지금 당장 여길 벗어나지 않으면 불법 주정차 딱지 끊기니까 좀 움직인 다음에 말하도록 해.”

“불법 주정차 딱지?”

“과태료가 무려 12만 원이라구!”

“……뭐야?”

백리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뭐가 있나 싶어 기껏 타줬더니만 그냥 정신 이상한 사람이었나? 그녀는 창밖을 흘긋대며 달리는 차의 속도를 가늠했다.

‘이 정도 속도면 상처 없이 내릴 수 있다.’

그녀가 차 문 손잡이를 움켜쥐고 다시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하빈이 외쳤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슈아악!

그 말과 동시에 차 안에 퍼지는 무색무취의 수면 가스!

“……뭐?”

‘이게 바로 명탐정의 고전적인 수법, 마취 수면 작전이다!’

“큭……!”

백리다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역시 함정이었어!’

하지만 백리다는 훈련된 조직원, 이런 아이템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재빨리 코를 누르자 안에 끼워 뒀던 캡슐이 터지며 수면가스를 중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저 운전자를 쳐서 배후가 누구인지…….’

마비 독이 아닌 수면 가스를 쓰다니 상당히 어설프다. 그러니 상대의 실력 또한 허접일 것이다. 백리다는 당연하게도 그리 생각하고 운전자의 목에 헤드락을 걸려고 했다.

컥-

하지만 걸리는 쪽은 백리다였다.

‘어, 어째서?’

가히 인지하지도 못할 속도였다.

‘설마 상대도 고위 각성자? 역시 피데스가 보냈나?’

백리다는 생각할 틈도 없이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아앗, 그 짧은 시간에 반격하려 들다니 깜짝 놀랐지 뭐야.”

[그렇다고 헤드락을 걸면 어떡하느냐? 그것도 달리는 차 안에서!]

확실히 달리는 차 안에서 누군가의 머리를 팔로 거는 건 안전상 좋지 않다. 말도 안 되는 민첩 스탯치를 가진 하빈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 아주 찰나의 순간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백리다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하빈이 안타깝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실수로 기절시키고말았네. 어쩔 수 없지.

하빈은 그렇게 합리화하며 백리다를 데리고 CCTV가 없는 골목 어딘가로 향했다. 미리 확보해 놓은 사각지대.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하빈은 그곳에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에러메이커’

파지직, 소리를 내며 오류가 차량을 집어삼켰다. 잠시 후의 골목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하고 평화로운 정적만을 남겼다.

* * *

“으음…….”

백리다는 미약한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낭패였다. 그렇게 어이없게 적에게 걸려들다니.

아무리 백리다 그녀가 어리고 미숙하다 해도, 정식 조직원 출신이 아니었다 해도!

뼈아픈 실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체 그 운전자의 정체는 뭐야……?’

어설프고 초심자스럽다 못해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하거나 위험할 것 같은 낌새가 있었다면 백리다는 걸려들지도 않았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는 초심자였는데.’

이런 일을 처음 해보는 티가 풀풀 났다. 설마 그런 것까지 연기할 수 있나? 그럴 수 있다면 상대는 진정으로 천재임이 틀림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여기서 무사히 정보를 캐내고 탈출하면 돼. 그럼 만회할 수 있다.’

여긴 어딜까? 취조실? 아니면 비밀 조직의 아지트?

생각을 마친 백리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중세풍 영화에서나 볼 법한 시커먼 철창이었다.

“뭐……?”

손에 묶여 있는 것 또한 어디 게임에서나 볼 법한 묵직한 구속 기구였다.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걸 보니 아이템의 일종인 모양.

“소용없을 거예요. 그건 상급 마족들도 함부로 풀 수 없거든요.”

그녀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가 캡모자와 정복을 갖춘 채 서 있었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인 복장이었다.

백리다가 으르렁거리며 물었다.

“넌 뭐지?”

“네? 아, 저는 그러니까, 흠흠!”

조금 긴장한 듯 헛기침을 한 분홍 머리 소녀. 그녀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꽤 진중하고 프로페셔널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어조였다.

“흠흠! 저는 한국의 국가정보원 대테러 각성자특별관리부서 소속 ‘이시네’! 당신을 외국 범죄조직 ‘마이너 패치’의 일원으로 판단하여 이렇게 비공식 체포합니다!”

“국정원? 한국의 국정원이라고?”

“네? 네! 저는 국정원 소속!”

재깍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네. 백리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어설픈데…….’

백리다 또한 한국에 국가정보원이라는 기관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에 저렇게 생긴 외국인도 있나?’

아니, 애초에 국정원이 저렇게 허술한 느낌을 팍팍 풍긴다고?

‘하지만 방심하지 말자. 분명 날 납치한 운전사도 허술해 보인다고 방심했다가 이렇게 된 것이니까.’

백리다가 홱 이시네를 쳐다보자 이시네는 놀란 토끼눈을 떴다가, 다시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그렇게 쳐다봐도 안 풀어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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