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이래서 등굣길이 아주 위험합니다. (1)
이후 하빈은 소곤소곤 납치 계획을 신나게 떠들었다.
“채씨랑 지세 언니는 대외적 이미지가 있으니까 릭샤랑 이프시네가 도와주면 될 것 같아. 다들 ‘김릭샤’랑 ‘이시네’라는 한국어 이름을 잘 외워두도록 해.”
“넵…….”
“이, 이시네라니! 이름이 진짜 예뻐요! 앞으로 제 애칭은 이시네입니다!”
무려 마신님이 직접 지어주신 애칭!
이프시네는 한국식 이름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신이 나서 팔짝 뛰는 이프시네를 보면서 레몬은 고개를 돌렸다.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마왕과 마신들이 모여서 나쁜 놈을 잡는다는 희한한 계획. 어차피 성좌인 황레몬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이 많았기에 별 의미는 없었지만.
‘이 마신 여자랑 굳이 척을 칠 필요는 없겠지.’
선량해 보이는 금발 인간들도 동의를 하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나쁜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특히 채지세는 걱정스러웠던 듯 도움의 조언까지 덧붙였다.
“그래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언니가 다른 건 몰라도 언론플레이라거나 해킹이라거나 총화기류 다루는 건 잘 할 수 있어. 아, 돈이나 집, 차 같은 거 빌려주는 것도!”
[……그, 그럼 다 해주는 게 아니냐?]
헌터계의 빛으로 불리던 채지세. 그녀는 하빈을 위해 뭐든 도와주겠다며 나섰다. 하빈은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 걱정 마! 언플이랑 해킹까지는 필요 없을 거야! 난 아주 평화적인 방법으로 데려올 거라구.”
채지석이 걱정스러운 듯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피데스 님이랑 공조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동안 마이너 패치를 잡는 건 피데스가 주로 해왔다. 이번에 스파이를 발견했다고 알려주면 피데스도 그들을 도울 것이다.
“어쩌면 피데스 님도 전학생이 온 걸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어. 서로 따로 조사하는 건 비효율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뭐, 가면마법사랑 같이 마이너 패치를 잡으라고?”
“내가 소개해 줄까? 피데스 님이랑 같이 보는 자리를 만들어서…….”
“아, 아냐! 절대 안 돼!”
하빈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 그래도 저번에 피데스와 한 번 맞부딪혔었던 하빈이다. 서로 계속 얼굴 보다가 하빈의 정체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게다가 가면마법사가 나서면 너무 어그로를 많이 끌어. 피데스가 떴다 하면 마이너 패치가 몸을 엄청 사린다고. 그러다 꼬리 놓치면 어떡해?”
마이너 패치는 피데스의 행보에 온 촉각을 다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는 틈에 얼굴도 모르는 현하빈이 외통수를 치는 게 훨씬 일이 깔끔하고 편하다.
“겸사겸사 백 억도 되찾고, 소소한 복수도 하고. 최고지, 최고.”
어디까지나 마이너 패치를 잡는다는 가정하에서지만.
그 의견에 채지석은 고개를 기울였다.
‘……틀린 말은 아닌데.’
조금 걱정이 되긴 하지만 현하빈이 어디 가서 죽거나 얻어터질 인간도 아니고. 동료로 삼은 녀석들은 마왕에다가, 실수로 정체 뽀록 난다 해도 언플과 해킹을 맡겨달란 채지세까지 있다.
‘서, 설마 이대로 성공하는 거 아냐?’
채지석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그들은 다른 주제로 다시 떠들고 있었다.
“아, 하빈아! 여기서도 포켓파이 되는지 확인해 볼래?”
“어? 되네? 여기서도 된다!”
지세가 개발한 ‘던전 안에서도 터지는 와이파이’는 여기서도 터졌다. 하빈은 뜻밖의 기능에 신난 표정을 했다.
“다음에는 여기서 네풀릭스를 봐도 되겠다. 황레몬! 너는 이런 거 모르지?”
“네……?”
“그래그래. 여길 못 나가니까 얼마나 심심하겠어? 내가 이걸로 특별히 재밌는 거 같이 보게 해줄게.”
“헉, 이건 뭐죠? 아티팩트인가요?”
하빈의 폰에서 재생되는 화려한 영상미를 보며 레몬이 놀란 표정을 했다. 예전에 하빈이 폰하던 모습을 익히 봤던 크릭샤와, 하녀에게서 하빈이 영화를 보던 장면을 전해 들었던 이프시네는 그래도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하빈이 선심 쓰듯 설명을 했다.
“이거 봐. 이게 바로 데이터가 터져야 볼 수 있는 거라니까?”
“아, 이게 그 계속 찾던 데이터란 말입죠?”
“응응. 이제 내가 알아서 볼 테니 크릭샤 너는 데이터 찾으려고 수고 안 해도 돼. 대신 지세 언니한테 감사하렴!”
하빈의 장난스러운 대꾸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레몬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이, 이게 이번 대의 바깥세상…….”
레몬이 보고 있는 건 현대물 드라마였다. 높이 솟은 마천루 빌딩들과 사람들의 복식을 보며 레몬은 신기하단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레몬을 지켜보던 채지석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가 몰래 하빈에게 물었다.
“현하빈, 얘는 뭐야?”
“뭐가? 레몬이?”
“……어. 인간은 아니지?”
“크흠! 흠!”바로 날아오는 직구에 하빈이 헛기침을 했다.
‘이래서 눈치 빠른 채씨는…….’
하빈은 눈을 피하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흠흠, 그래. 확실히 황레몬 얘가 주민등록증은 없긴 해.”
“네, 네. 저는 돈도 없고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부동산도 없고.”
말하다가 서글펐는지 목소리가 잦아드는 레몬. 하빈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덧붙였다.
“채씨, 상대의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건 실례야.”
“아니 잠깐만, 나는 그 문제가 아니라…….”
채지석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레몬의 외양을 훑었다. 아까부터 음식들을 처음 먹는 것처럼 구는 것도, 핸드폰과 화면 속 풍경들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도.
‘일단 우리가 살던 세상에서 온 느낌은 전혀 아니야.’
그럼 던전이거나 킬스크린에서 온 존재?
간혹 던전이나 킬스크린 층에도 주민들이 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은 시나리오 형식의 퀘스트를 제공하거나 적, 혹은 임시 동료의 역할을 한다. 게임으로 치면 NPC의 역할.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있는 마왕들처럼.
레몬도 어느 날 하빈이 다른 던전에서 주워 온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느낌은 아닌데.’
레몬에게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바른 생활 습관을 가진 인간이라도 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인 이상, 필연적으로 얼굴이 조금은 비대칭이거나 자세가 조금은 틀어졌거나, 피부에 잡티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레몬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게 균형 잡힌 얼굴, 도자기처럼 깨끗한 피부. 그게 기묘한 이질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하빈이 방금 했던 말.
‘여길 못 나가니까 얼마나 심심하겠어?’
그럼 레몬은 이곳을 나가지 못하고 계속 지내는 존재라는 거다. 물도 음식도 없는 무지갯빛 이공간에서. 보통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 채지석은 그나마 내릴 수 있는 결론을 입에 담았다.
“…정령 같은 거야?”
“그게…….”
하빈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흘깃 레몬을 쳐다보았다. 레몬은 날름 그 추측을 받아먹었다.
“마, 맞아요! 전 이공간의 정령!”
“이공간의 정령……?”
“네에. 오래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냥 여기 숨어 있는 것이었지만, 성좌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레몬은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하빈도 선심 쓰듯 거들어 주었다.
“그래그래. 맞아. 얘는 지나가는 정령이라구. 내가 워낙 정령 친화력이 높아서 이런 녀석까지 발견했지 뭐람?”
“역시 마신님! 그럴 줄 알았어요!”
격하게 옹호하는 이프시네. 잠시 둘을 미심쩍은 표정으로 보던 채지석은 하빈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렸다.
정령이라.
‘그러고 보니 예전에 정령술 선생님도 하빈의 정령 친화력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긴 했었지.’
짧은 순간 번쩍 빛났는데 재측정을 해봐도 안 나타나서 잘못 본 건가 했었다는 정령술 선생님의 증언. 그걸 우연히 들은 적 있었다. 다들 그 말을 지나쳤지만 채지석은 담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로 현하빈은 정령술도 잘 하는 건가?’
진상이 대체 뭐지?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이공간 소풍이 끝난 뒤에도, 채지석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 * *
바로 그 다음 주 월요일.
하빈은 그날부터 착착 백리다 납치, 아니 ‘백리다 평화적으로 데려오기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일단 등굣길부터 멀리서 졸졸 따라가며 백리다를 관찰하는 하빈.
이건 다 백리다를 분석해 그녀의 약점을 찾기 위함이었다. 백리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빈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휴우, 저 백리다라는 애 너무 어렵네. 보면 볼수록 애가 빈틈이 없어.”
[그냥 포기하는 게 낫지 않느냐? 납치라니…….]
“뭐어, 김잘잘? 항상 정의를 주장하던 녀석이 웬일이야? 넌 나쁜 스파이를 잡는 데 동참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렇지만 납치를 하는 건 기사도에 어긋나는…….]
“쉬잇, 난 납치 안 한다니까! 다른 방법을 쓸 거야! 아주 평화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을 말이지!”
하빈은 주말이 끝난 직후인 월요일부터 백리다의 등굣길을 따라가 보았다. 학생들은 주말에 기숙사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기에 월요일에는 지하철을 타고 등교하는 사례가 대부분.
백리다 역시 지하철로 등교를 하고 있었다. 마침 청순한 그녀의 분위기에 지나가던 다른 남학생이 먼저 백리다에게 접근했다.
“저기, 교복을 보니 우리 학교 학생인 것 같은데 혹시 학교까지 같이 갈래?”
귀 끝이 붉어진 남학생.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이 숨을 죽였다.
‘잘잘아, 잘 봐! 저 녀석이 먼저 선수를 치고 있어. 일단 어떻게 대응하는지 살펴보자.’
남학생의 용기 낸 제안에, 백리다는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 미안해. 내가 혼자 등교하는 걸 좋아해서.”
‘역시 저 정도로는 안 넘어간다, 이거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이후로도 하빈은 백리다의 행동을 쭉 지켜보았다.
남학생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백리다는 지하철 계단에 도달하는 동안, 그리고 교문까지 향하는 동안 수많은 권유를 받아야만 했다.
“학생! 인상이 아주 좋아 보이는데? 우리 종말교에 대해 한번…….”
“네, 이미 가입했어요.”
“학생, 혹시 근처에 만 원짜리 케이크 파는 집 어딘지 알아?”
“죄송해요. 잘 모르겠네요.”
쿨하게 사이비 종교 권유들을 지나치는 백리다. 그 모습을 보며 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휴, 합정역에 저런 사이비 종교 권유가 많긴 해.’
설문 조사를 도와달라며 접근한 뒤 사이비 종교 권유를 하는 사람들, 길 가르쳐 달라고 접근한 뒤 종교 권유를 하는 사람들. 저마다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사람을 붙든다. 하빈이 어렸을 땐 좋은 마음으로 길을 가르쳐 줬다가 된통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근데 쟤는 정말 야무지게 잘 거절하네! 아무리 봐도 보통이 아냐.”
살아있는 철벽 그 자체!
[저런 녀석을 대체 어떻게 따라오게 한다는 말이냐?]
아헤자르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어떤 접근도 원천 봉쇄하는 칼 같고 정중한 거절이라니. 저런 인간을 어떻게 꼬신담?
그러나 하빈은 후후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잘잘아. 앞으로 내가 하는 걸 잘 보라구. 누구라도 거절할 수 없는 자발적 납치 제안은, 바로 이렇게 하는 거란다!”
그녀가 흐뭇한 표정으로 톡톡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그럼, 작전을 시작해 볼까.”
* * *
‘……날파리가 꽤 꼬이네.’
백리다는 코웃음을 치며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사람들을 쳐냈다.
‘애초에 사이비 종교 권유에 넘어가는 녀석이 바보 아닌가? 대체 어떤 놈이 이런 꾐에 빠지는 거야?’
이 나라 사람들은 어리숙하고 순진한 편인 모양이다. 백리다는 시크한 표정을 지으며 발을 놀렸다. 그녀의 번호를 따려는 같은 학교 학생도, 계속 달라붙는 사이비 종교 권유도 상당히 귀찮았다.
‘내 목적은 학교에 가서 표적을 감시하는 일뿐.’
다른 곳에 한눈을 팔까 보냐?
비록 정식 스파이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백리다는 스스로를 자화자찬하며 걸음을 떼었다.
이제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교문이 코앞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도로 가까이 섰다.
바로 순간이었다.
-끽! 끼리리릭! 끼익!
갑자기 그녀 앞으로 차 한 대가 난입했다.
“……?”
화려한 드리프트로 차체를 꺾으며 백리다 앞에 극적으로 멈춰 선 차량!
덜컹!
백리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채기도 전에 뒷좌석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앞 좌석 창문이 지잉 내려갔다. 앞 좌석에 탄 사람이 긴급하고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드디어 찾았군! 다행이야!”
“뭐, 뭣?”
“설명할 시간이 없어, 빨리 타게!”
“……!”
긴박한 목소리와, 등굣길에 일어난 극적인 사건! 그리고 활짝 열린 뒷좌석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 상황에, 백리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