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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49) (149/268)

149. 모든 창작물에서, 명탐정과 같은 반이 되는 건 위험한 선택이다. (2)

‘내가 장담컨대, 저 전학생은 분명 외계인이거나 시간 능력자거나 어딘가의 조직원이거나 초능력자야!’

하빈은 리다를 보자마자 곧바로 결론을 내렸다. 아헤자르가 지적했다.

[크흠, 나도 물론 클리셰를 믿는 편이긴 하다만, 그건 너무 비약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애초에 여긴 각성자들이 다니는 학교니까 다들 초능력자인 건 사실 아닌가……?]

예기치 못한 하빈의 급발진 추측에 조금 당황한 모양. 그러나 하빈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 잘잘아. 그동안 웹소랑 웹툰 많이 읽었다며. 그동안 뭘 읽은 거니? 캐시 어디다 썼어?’

학원물에서 전학생이 오면 백이면 백 보통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하빈은 강경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전학생, 분명 뭔가 있다. 

‘그러니까 절대 엮이지 말아야지.’

이야기가 시작될 때는 전학생과 주인공이 엮이면서 시작되기 마련. 하빈은 절대 그런 엮임의 시작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난 말린 멸치를 어떻게 족쳐서 내 백 억을 충당할지가 우선이라구.’

돈을 열심히 털어서 빨리 버킷 리스트를 채워야 한다. 하빈은 여름방학 계획으로 유리버셜 스튜디오에 가기 위해 지금도 랜드스캐너 사이트에 들어가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있었다.

‘오, 비즈니스석 특가가 떴다! 음…… 그래도 이왕이면 퍼스트클래스를 타 볼까?’

어차피 한번 살고 말 인생. 돈 아껴봤자 범죄 조직에게 털리기나 했던 하빈이다. 그녀의 욜로 가치관은 나날이 굳건해지고 있었다.

‘인생 뭐 있나? 펑펑 쓰고 즐기다 가야지!’

유리버셜 스튜디오행 비행기 티켓. 그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하빈은 마지막 순간에 조금 주저했다.

“으윽, 아직은 아냐. 채씨랑 지세 언니한테도 물어본 다음에 꼼꼼히 결제해야지…….”

이제 돈도 더 아껴 써야 하니까, 어느 항공사 비행기가 제일 괜찮았는지랑, 퍼스트클래스 라운지 이용법이라든가 그런 것들을 듣고 결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니면 이왕 가는 김에 같은 날에 가서 같이 놀면 그것도 재밌을 것 같고.

“아무래도 저쪽이 훨씬 바쁘니 내가 언니랑 채씨 스케줄에 맞춰야겠지?”

혼자 노는 것보단 같이 놀면 두 배로 재밌을 것이다.

하빈이 즐거운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이었다. 때마침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저기…… 안녕?”

“……?!”

하빈이 흠칫 폰을 숨겼다. 가끔 선생님들 중에서는 수업 시간에 폰 사용을 엄격히 금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경우 하빈은 스리슬쩍 숨겨가면서 적당히 조절했다. 웬만해서는 선생님의 시선과 기척을 미리 간파하고 잘 숨기는 편이었고.

하지만 이번에 다가온 건 선생님이 아니었다.

“괜찮아. 선생님은 방금 나가셨어.”

상냥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 젠장!’

백리다였다.

‘이 전학생은 수많은 학생들을 다 놔두고 왜 하필 나한테 왔지?’

하빈은 귀찮은 마음을 꾹꾹 눌러 삼키며 입을 열었다.

“……용건이?”

하빈의 물음에 리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도와주고 싶게 만드는 청순하고 예쁜 미소였다.

“어, 음…… 저기, 내가 이 학교 처음이라서. 혹시 안내해 줄 수 있나 싶어서…….”

전학생의 국룰 이벤트, 학교 소개해 주기.

‘그걸 나한테?’

“저런…….”

영혼 없는 안쓰러운 감탄사를 내뱉은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있지, 나도 정말 안내해 주고 싶지만 문제가 있어.”

“문제?”

“응. 미안하지만 사실 나도 이 학교를 잘 몰라.”

“모, 모른다고?”

벌써 중간고사까지 쳤을 정도로 다녔는데 어떻게 학교를 모른단 말인가? 백리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하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응.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녔거든.”

“……?”

이해할 수 없는 발언에 리다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빈이 활짝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난 오늘도 땡땡이를 칠 거란다. 잘 있으렴! 아디오스!”

말을 마친 하빈은 화려한 낙법을 사용해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휘잉-

“……뭐, 뭐야?”

순식간에 창문 너머로 사라져 버린 하빈의 신형. 뒤늦게 아련히 펄럭이는 창문 커튼과 ‘저런 일이야 뭐 일상이지.’, ‘하빈 언니는 오늘도 땡땡이를 치는구나’ 하는 무덤덤한 표정의 같은 반 학생들을 보며 백리다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뭐하는 인간이야, 저 사람?!’

* * *

현하빈을 놓친 이후, 백리다는 멍하니 울림국제고의 수업을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번 임무, 난이도가 너무 높다.’

그랬다. 백리다는 에라타가 보낸 스파이가 맞았다.

원래 이 일에 투입될 예정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차출되다 보니 다른 부서에서 교육받던 아직 미숙한 스파이인 그녀까지 차출되고 만 것이다.

나이와 성별이 맞으면서 한국에 대한 문화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거기다 울림국제고 입학을 위해서라면 마법사 클래스의 헌터여야 했다. 피데스와 한국 정보기관의 감시망을 피할 만큼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고 그럴듯한 백그라운드까지 갖출 수 있는 인재.

그렇게 찾다 보니 백리다가 뽑힌 것이다.

‘잘 해야 하는데…….’

원래 백리다는 에라타의 직속 라인은 아니었고 다른 쪽 파트를 담당하고 있었던 데다 정식 조직원으로 승급되지도 못했기 때문에 실력이 좀 미숙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차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떻게든 에라타에게 환심을 사보려는 그녀의 상관의 욕심이 컸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 잘 할 겁니다!’

‘……기대에 부응해야 해.’

이건 기회야. 윗분들에게 잘 보일 기회. 잘 하면 그냥 조직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간부까지 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녀의 상관은 온갖 달콤한 말로 백리다를 구슬렸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줄 아니? 다른 분도 아닌 에라타 님의 눈에 들 수 있는 기회야!’

정식 조직원이 되어도 고위 간부가 알아주지 않으면 말단만 전전하다 조직 생활이 끝난다. 반면 에라타 같은 보스의 눈에 들면 초고속 승진도 꿈은 아니다. 고작해야 견습 출신이었던 백리다에겐 로또와도 같은 기회였다.

‘그냥 고딩이랑 학교 분위기 감시하는 거라서 별거 없을 줄 알았더니만…….’

에라타는 일부러 강태서를 감시하란 임무를 주진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을 때 강태서에게 추궁을 듣거나 내부 분열을 조장했단 의심을 받을 테니.

대신 현하빈을 감시하고 울림국제고의 분위기를 알아보면서 그녀에게만 정보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강태서의 정보나 피데스의 정보도 에라타에게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고, 들킨다 하더라도 ‘CCTV에 찍힌 여자가 궁금했다.’, ‘피데스를 감시하고 싶었다’라며 빠져나갈 구석이 생기니까 말이다.

그래서 리다 역시 현하빈과 피데스를 주로 감시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다른 반이 아니라 F반에 들어가야 한다고?’

첫 번째로, 표적이 F반 소속이었던 것이다.

“F등급은 일부러 받기도 힘든데!”

이래 봬도 마이너 패치에서 길러지던 조직원이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이미 B급 이상의 능력치를 가지고 있었다. F급으로 힘을 숨기면서 다니는 건 처음이었다.

‘에라타 님은 대체 뭐하러 F반 학생을 감시한다는 거지?’

그녀는 매 수업 그녀의 진짜 힘이 드러나지 않도록 경계해야 했다.

또, 가장 큰 문제이자 두 번째 문제는…… 표적이 엄청난 망나니라는 점이었다.

“하빈 언니요? 그 언니 이 수업 안 듣는데요?”

“그 언니 원래 교양만 들어요.”

“검술 시간엔 낮잠 잘걸요?”

‘대체 어디까지 할 셈이냐……?’

감시를 하고 싶은데, 표적이 수업에 나오질 않는다. 현하빈이 제대로 학교에 나올 때는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 그러니까, 급식을 먹을 때 제일 참석률이 높았다.

“크으, 최고야! 오늘 메뉴는 회덮밥이네! 너무 맛있겠다. 어디 보자…… 저녁 메뉴는 김치족발이랑 막국수잖아? 하, 점심 먹고 디저트는 먹지 말자. 배를 비워 둬야지.”

“…….”

끼니마다 감탄을 흘리며 급식을 한가득 챙겨 먹는 현하빈의 모습. 그러나 보고는 해야 했기에 백리다는 그 모습까지도 일단은 보고서에 모두 적었다.

-표적은 오늘 회덮밥과 김치족발, 막국수를 먹었습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좋아하는 메뉴인 모양입니다.

-표적은 오늘 학교를 나갔습니다! 아…… 레몬 케이크와 복숭아 아이스티를 시키려고 나갔다 온 모양입니다. 반응을 보아하니 좋아하는 메뉴인 듯합니다.

-표적은 립아이 스테이크가 나오는 금요일 저녁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

자판을 두드리던 백리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이런 걸…… 적어도 되는 걸까?’

내가 이러려고 스파이 했나 자괴감 들어……. 그렇지만 적을 게 없었다. 그것 외에 표적이 수업을 듣는 모습을 몰래몰래 관찰해 보았지만 수업 시간에도 별달리 하는 게 없었다! 피데스와도 관련이 있기는커녕 마주치지도 않고.

‘혹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건가?’

사실 레몬 케이크를 사 먹는 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거나, 그 속에 암호가 있었다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

백리다는 최대한 현하빈에게서 정보를 뽑아내려고 애썼다.

‘그래. 강태서와 동창이랬으니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야.’

강태서가 사도라는 점은 사도들끼리만 알고 있는 정보이기에 말단 스파이인 백리다는 태서를 그냥 한국의 유능한 랭커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를 토대로 알아봐도 큰 진전은 없었다.

“태서야, 까망이 보러 왔어!”

-게오옹!(인간! 또 찾아왔구나! 반갑다!)

-……표적은 강태서보다 고양이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에라타 님은 이 정보를 필요로 하진 않으실 것 같은데.

‘설마 고양이에게 뭔가가 있나?’

혹여나 고양이와 관련된 암호나 모종의 관계가 있을까 싶어 백리다는 까망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께오옹!(넌 뭐냐! 츄르도 안 주는 게!)

파바박!

부담스럽게 따라오는 백리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강경하게 쳐내는 까망이 때문에 냥냥펀치만 맞고 나가떨어졌다.

“절대, 절대 이렇게는 못 물러나!”

이를 갈기 시작한 백리다. 그래도 그녀가 하빈을 관찰하던 끝에 그나마 건진 게 있다면.

‘솔라리스 수장들과 상당히 교류가 많군.’

백리다는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하빈이 백 억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는 채남매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었다.

“현하빈, 오늘 수업은 잘 들었어?”

“으억, 진짜! 여기서 아는 척하지 말랬잖아!”

몰래 말을 거는 채지석과 식겁해서 자리를 피하는 현하빈의 모습. 그 모습이 제삼자인 백리다가 보기에는 아주 수상했다.

‘그래. 내가 파낼 수 있는 건 이쪽이다!’

스파이 인생을 걸고 확신할 수 있었다.

‘촉이 선다. 서.’

백리다는 슬금슬금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오늘 우리 집에 놀러 와.”

“안 바빠? 항상 일 많더니.”

“응. 오늘은 여유가 있어. 이번에 새로 나온 치킨 메뉴 시킬 건데 같이 먹자.”

“콜! 완전 좋지!”

‘……설마 진짜 치킨 먹으려고 모일 리는 없을 테고.’

날카롭게 세모꼴로 눈을 치켜뜨는 백리다. 그녀는 성공적인 스파이 생활에 스스로를 자찬하며 다시 교실로 향했다. 백리다가 신청한 수업은 웹툰 웹소 교양 수업이었다. 표적이 이런 수업을 듣는다니 별수 있나.

마침 그녀가 도착했을 때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우리 수업에 오늘 전학생 온다던데? 소문 들었냐?”

“어, F반에 온 전학생이라더라.”

“외국에서 왔다던데.”

“오올…… 전학생…….”

다른 학생들이라면 모를까, 웹툰 웹소 교양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클리셰에 대해서는 굉장히 잘 꿰고 있었다. 학생들 중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거 원래 클리셰에 따르면 전학생 보통 인물 아니지 않냐?”

“크, 외계인이거나 초능력자지.”

“아님. 시간 능력자거나 스파이 조직원임.”

“그, 그걸 어떻게……!”

그 대화를 들은 백리다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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