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45) (145/268)

145. 십만 원이 왔다 갔다, 백만 원이 왔다 갔다, 백 억이 왔다 갔다 (3)

하빈은 새빛은행에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은행 영업 시간이 진작 다 지났기 때문이다.

“이제 곧 저녁 먹을 시간이라 다들 없지 않을까…….”

물론 파산한 은행이 영업시간이라 해도 멀쩡히 문을 열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하빈은 채남매의 격려를 받으며 시무룩한 얼굴로 저녁 식사를 했다.

물론 입맛은 하나도 없었다.

“그게…… 그게 대체 어떤 돈인데!”

[네가 번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 피 같은 백 억을!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열이 뻗치는 일이었다. 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숫자로만 확인하고 스쳐 지나간 백 억. 한때 열심히 구르던 하빈이 평생 벌어도 다 못 벌 만큼의 까마득한 금액.

하빈은 부들거리며 젓가락을 든 손을 떨었다. 채지석이 안쓰럽단 표정으로 그녀의 앞접시에 탕수육을 덜어 주었다.

“일단 짬뽕 불기 전에 먹자. 든든하게 먹어야 뭐라도 하지.”

“…….”

시무룩한 얼굴로 휘적 짬뽕면을 집어드는 현하빈. 지세도 덩달아 하빈을 위로했다.

“그래, 하빈아. 먹고 싶은 거 더 없어? 오늘 저녁은 우리가 살게.”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은 기분이 어떻겠냐마는, 그래도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하는 법. 하빈은 탕수육을 집어 들며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거 먹고 파블로바 먹을래. 오는 길에 그거 판다고 광고하는 카페 봤어.”

“그래그래. 언니가 살게!”

지세가 하빈의 등을 두드리며 따뜻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그나저나 진짜로 백 억이 있었구나…….’

한편 채지석은 하빈의 혼잣말을 묵묵히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처음 영입 때부터 백 억 따위 이미 있으니 필요 없다고 스카웃을 걷어찬 현하빈.

‘어떻게 번 거지?’

저번에 전설급 아이템들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던 하빈의 태도를 생각하면 그 정도 재력을 쌓는 건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빈은 각성 직후부터 백 억이 있다며 스카웃을 거절한 전적이 있다.

‘그럼 원래 갖고 있던 돈이라는 건데…….’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그렇게 돈 많던 애가 왜 각성 전에는 알바만 전전한 거냐며 갸웃합니다.]

예전에 짐꾼 알바로 일했던 것 때문에 백화점에서 망신을 당했던 전적을 떠올리던 그들.

‘음, 개인적인 사정이니까 캐묻지는 말자고요.’

채지석은 당장이라도 묻고 싶은 듯 눈치를 보고 있는 ‘가장 가까운 빛’을 진정시켰다.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세가 물었다.

“그럼 카드 결제도 막힌 거야?”

“아직 확인은 안 해봤지만, 아마도.”

케이크를 살 때는 미리 구입해 뒀던 상품권으로 결제했기 때문에 카드 사용이 되는지를 확인해 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하빈은 백 억짜리 통장은 카드를 만들지 않고 고이 남겨두었다. 실수로 카드를 분실하기라도 했다간 참사가 일어나니까.

“비상금 통장이랑 매달 생활비 빼두는 통장은 따로 있는데 그건 무사할 거…… 아니지.”

말을 하던 하빈이 무언가 깨달은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 통장들도 새빛은행 통장이었잖아?!”

수수료랑 이벤트 때문에 최근에 같은 은행으로 통장을 옮긴 게 화근이었다.

“아앗! 이래서 주거래은행 하나를 믿는 건 위험했는데!”

“그럼 다른 은행 통장은 없어?”

“자, 잠시만.”

하빈은 재빠르게 다른 은행 어플을 켰다. 다행히 비상금 통장이 딱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저번에 전설급 아이템 팔고 남은 돈. 그중에서 일부는 새빛은행 통장에, 그리고 일부는 검집 제작에 쓰고. 남은 1억 정도를 튼튼은행에 넣어두었다.

“작고 소중한 1억…….”

하빈이 핸드폰 화면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1억이 아무리 큰돈이라지만 25년을 버티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1년에 2천만 원씩 잡아도 5년이면 바닥날 돈. 결국 일을 해야만 감당이 될 텐데.

“이대로면 내 버킷 리스트는? 아직 유리버셜 스튜디오도 못 가봤고, 제주도 한 달 살기도 못 해봤다고!”

한참을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하빈. 삐걱삐걱 고개를 돌린 그녀가 아헤자르 쪽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 이거라도 팔아야 하나?”

[뭐, 뭐머뭐뭐 뭣이?!]

하빈의 시선을 받은 아헤자르가 경악해서 움찔했다.

[어, 어떻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나를 팔겠다니!]

아헤자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가치를 피력했다.

[내, 내가 비록 돈이 없어서 방구석에서 웹소를 얻어 보며 살지만…… 그, 뮤튜브, 네풀릭스 결제도 못 해주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동안 쌓아 온 추억과 우정이 있는데! 그리고 싸울 때만큼은 최강의 성좌이지 않느냐…….]

버리지 말아다오…….

구슬프게 우는 아헤자르의 말을 들으며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엥, 뭔 소리야. 내가 잘잘이를 왜 팔아?”

그녀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아헤자르는 계약성좌에 귀속 아이템이라 양도도 안 되는 존재. 애초에 불가능한 가정이다.

“내가 팔까 고민하는 건 이거야, 이거.”

하빈이 손가락을 쭉 뻗어 아헤자르를 둘러싸고 있던 검집을 톡 가리켰다.

[……!]

채지석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 검집, 코니 님의 작품이었지?”

아헤자르를 두르고 있는 검집은 컨티뉴의 특제 제작 아이템. 게다가 코니 님이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주문제작을 했다는 점에서 굉장한 가치를 가진다. 어느 아이템 감정사의 평에 따르면, 코니의 제작 아이템은 그저 아이템의 경지를 넘어, 예술적,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평할 정도.

“그러니까 팔면 값이 좀 나가겠지.”

이래서 부자들이 미술품으로 비자금 같은 걸 만드나? 그게 그 의미는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으으음, 그래도 이거 팔기는 너무 아까운데…….”

기능도 좋고, 킬스크린 입장할 명분도 되고. 산 지 얼마 안 된 귀한 아이템을 다시 처분한다 생각하니 역시 속이 많이 쓰리다. 하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역시 다른 방법을 찾던가 해야겠어. 절대 이렇게 허무하게 손 놓고 백 억을 날릴 수는 없다구!”

자세히는 모르지만, 은행이 파산한다 해도 개인마다 일정 금액 이상은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고 들었다.

“일단 그거라도 챙겨 받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아봐야겠어!”

하빈이 결의를 다졌다. 채남매는 그녀를 격려해 주기 위해 이리저리 말을 보태었다.

“하빈아, 일단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고 내일도 주말일 테니 은행에 가도 별다른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동안은 마음을 내려놓고 좀 쉬는 게 어때?”

“그래.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게.”

“…….”

그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하빈은 어느새 짬뽕을 먹다 말고 테이블에 쭈그러져 엎드려 있었다. 채지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현하빈이 음식을 남기다니…….’

맛집 탐방이 취미였던 현하빈. 저번에 군것질 배는 남겨 놔야 한다며 킬스크린 야시장을 평정했던 현하빈. 그런 애가 짬뽕 한 그릇을 다 못 먹고 물리다니. 역시 보통 충격을 받은 게 아닌가 보다.

[성좌, ‘가장 가까운 빛’이 쟤 저렇게 두면 안 될 것 같다며 걱정의 목소리를 얹습니다.]

한순간에 큰돈도 잃고, 학교도 파괴되고. 홀로 집에 쓸쓸히 돌아가서 잠을 청하면.

잠이 오긴 하겠어?

채지석은 현하빈 몰래 그의 누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현하빈 쟤, 오늘은 집에 혼자 보내지 말고 누나랑 같이 호텔에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역시 그게 낫겠지?”

어차피 채남매도 주말 내내 킬스크린에 머물 예정이었다. 지세는 폰으로 킬스크린의 명물 특급호텔 ‘오버 더 스테이지’의 스위트룸을 예약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야경 보면서 룸서비스로 야식이라도 더 빵빵하게 먹여야겠다.”

마음이 허할 때는 야식과 친구가 곁에 있는 게 나은 법이다.

* * *

“……헉, 여기 오버 더 스테이지 최상층 스위트룸이잖아!”

“어때? 마음에 들어?”

창밖으로 펼쳐지는 화려한 야경과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 보이는 킬스크린의 아름다운 무지갯빛 모습.

원래 호텔 ‘오버 더 스테이지’는 킬스크린에서도 손꼽히는 특급호텔로, 각국의 정상들이나 월드스타급 셀럽들이 방문하는 곳으로도 상당히 유명했다. 특히 그들이 방문한 룸은 최상층 펜트하우스 구조의 스위트룸으로 하루 숙박비만 억에 가까운 가격을 호가한다.

물론 지세는 혹시라도 부담 가질까 봐 하빈이에게 숙박료가 얼마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방도 넓고 침대도 두 개인데 하빈이도 자고 가면 좋지.”

“우와, 엄청 폭신해! 이프시네네 침대랑 막상막하야!”

하빈이 침대에 뛰어들며 신난 얼굴을 했다.

“앗, 지금 생각해 보니 수틀리면 마계에 가서 좀 얹혀살아도 되겠다.”

이제 와이파이도 있으니, 돈이 다 떨어지면 그냥 마계에서 생활해도 괜찮을지 모른다. 그나마 비빌 곳이 있다는 사실에 하빈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지세가 덧붙였다.

“하빈아. 여기 네풀릭스도 된다?”

지세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에서 스크린이 내려왔다. 거의 영화관을 방불케 하는 수준의 스케일에 하빈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럼 징징어게임 볼 수 있나?!”

“물론이지! 같이 볼래?”

마침 침대 옆 테이블에는 지세가 미리 시켜 놓은 룸서비스 메뉴들이 화려하게 차려져 있었다. 안주 삼아 먹을 수 있게 감자튀김과 구운 소시지, 폭립 같은 메뉴들의 구성. 그 곁에는 샴페인과 와인, 맥주도 종류별로.

그중에서도 낯익은 맥주를 발견한 하빈이 눈을 빛냈다.

“와, 이건 수제 맥주 ‘스크린샷’이잖아? 킬스크린에 있는 양조장에서만 한정 판매로 파는 거!”

“그래? 여기 호텔에도 공급되는 거였나 보다.”

“먹어보고 싶었는데!”

하빈이 들뜬 표정으로 잔에 맥주를 따랐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좋은 방과 음식, 환경에 놓이니 방금 겪었던 충격적인 사건도 어느 정도 잊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어차피 지금 고민해서 될 것도 아니고.’

하빈이 바비큐 폭립을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셰프가 정성을 다해 만든 폭립과 새콤달달한 사우어 수제맥주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지세가 살살 구슬리는 투로 설명을 보탰다.

“이 호텔, 인피니티 풀 수영장도 있고 별스타 성지로 유명한 북카페도 있어. 아, 여기 이 객실에는 오션 뷰가 딸린 욕조도 있다? 어메니티에 특제 배쓰 밤도 포함되어 있을 거야. 희귀 아이템 재료를 써서 만든 배쓰 밤이라서 꽤 유명해.”

“오오……!”

“혹시 하빈이 수영장 가고 싶으면 언니가 새 수영복 빌려줄게!”

“좋아! 갈래!”

태평양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뷰. 그걸 보며 수영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

힐링 넘치는 주말 계획 덕분에 하빈은 잠깐 백 억의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말이 지난 뒤-

“여기가 새빛은행인가.”

곧바로 한국의 새빛은행으로 달려간 하빈은 뜻밖의 대접을 받게 된다.

“혀, 현하빈 고객님?!”

“V, VIP 고객님께서 여기에…….”

“죄송합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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