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십만 원이 왔다 갔다, 백만 원이 왔다 갔다, 백 억이 왔다 갔다 (1)
“언니!”
“하빈아!”
“다들 나 기다렸지? 다 알아!”
하빈이 채남매를 만나기 위해 향한 곳은 킬스크린의 솔라리스 지부였다. 듣자 하니 채남매는 한국이 아닌 킬스크린 섬에 있다길래, 하빈이 그곳으로 찾아간 것이다.
“다행히 컨티뉴의 VIP라는 점 덕분에 금방 올 수 있었다구.”
킬스크린 입성은 원래 일반인이라면 최소 하루는 더 걸렸어야 할 절차였지만, 컨티뉴의 VIP라는 신분이 그 절차를 대폭 줄여 주었다. 아무래도 ‘컨티뉴’가 킬스크린에만 있는 독점 제작 브랜드이다 보니, 그곳에 제품 A/S를 받으러 가는 특별 VIP에 대해서는 더 쉽게 통과시켜주는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할머니!’
하빈은 이곳에 없는 코니를 향해 마음 속으로 감사 표시를 했다. 일반인으로서는 킬스크린에 함부로 오가기 힘든데, 덕분에 하빈은 앞으로도 쭉 킬스크린 섬 프리패스권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머, 케이크 가져온 거야?”
하빈이 가져온 케이크 상자를 보며 지세가 들뜬 표정을 지었다. 채지석 역시 케이크를 흘끔대며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니, 이 타이밍에 간식을 들고 온 게 그들에게 무척 기꺼운 모양. 서류들 사이에 앉아 있던 채남매와 이 비서. 이 비서의 눈치를 살핀 지세가 다급히 물었다.
“아, 하빈아! 혹시 비서님도 같이 먹어도 돼?”
“응? 당연하지.”
아마 네 사람이 먹기에 모자랄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한 사람만 따돌리고 케이크를 먹다니, 그런 잔인하고 몰상식한 짓을 어떻게 한담?
그녀의 허락에 지세가 준휘를 향해 외쳤다.
“비서님! 비서님도 이거 드시고 합시다!”
“……케이크네요? 감사합니다.”
이준휘 비서가 하빈을 향해 꾸벅 정중한 목례를 했다. 하빈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어쩌다가 모두들 킬스크린까지 와서 이러고 있어?”
SPES 테러를 막아낸 게 다른 누구도 아닌 솔라리스였다니.
심지어 그들은 막아낸 테러에 대해 기자회견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후속 조사와 정리까지 하고 있었다. 채지석이 설명했다.
“피데스 님의 부탁이 있었어.”
“역시 가면마법사의 짓이었군!”
하빈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면마법사 주제에 감히 우리 언니랑 채씨, 비서님을 막 굴리다니. 비록 의도는 좋았다지만 이런 일을 막 떠맡겨도 되는지 몰라?
하빈이 인상을 찡그리며 케이크를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새하얀 크림과 싱싱한 딸기가 부드럽고 달달한 시트를 만나 환상적인 맛을 그려냈다.
“크, 이거지.”
어느새 표정이 스르륵 풀린 하빈이 미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서류를 넘겨보던 지세가 웃음을 지었다.
“뭐, 우리도 공짜로 해주는 건 아냐. 다들 알잖아? 내가 사업에 한해서는 상당히 철저한 거. 아무리 피데스의 부탁이라도 거래할 건 확실히 한다고.”
이번 출동에 도움을 받는 대신 피데스는 솔라리스의 사업에 일정 부분 도움을 주겠다고 약조했다. 마침 그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고, 테러 사건을 막는 건 도의적인 부분에서도 당연히 나서야 할 일이었으니 솔라리스 측에서 손해 볼 건 없었다.
“난 오히려 피데스 님이 왜 우리한테 맡겼는지가 의아한데?”
채지석이 포크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다른 랭커들도 분명 있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들을 제치고 우리한테 부탁했을까?”
“흠, 그러게. 다른 친한 랭커들도 있었을 텐데.”
피데스의 말이라면 달려올 인원은 수두룩하다. 당장 그의 팬을 자처하는 랭커들의 숫자도 어마무시할 텐데. 채지석이 나름의 해석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요즘 학교에서 계속 마주치다 보니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그랬나?”
계속 학교에서 얼굴을 맞대는 사이다 보니 겸사겸사 부탁한 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잘 풀렸으니 된 거 아니겠어?”
사실 결론만 따지자면, 도움을 청할 상대로 솔라리스를 고른 피데스의 선택은 무척 훌륭했다. 예지 능력에다 총화기류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가진 채지세가 주도한 덕분에 테러 사건은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끝나버렸으니. 적재적소에 좋은 인력을 배치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빈은 그런 점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소파에 몸을 묻었다.
“에휴, 잘 풀리면 뭐 해. 그래서 다들 퇴근은 언제 하는 거야? 나 심심한데. 같이 맛집 탐방이나 쇼핑 갈 사람 없는 거냐고.”
물론 혼자서도 관광은 잘 즐길 수 있겠지만, 그래도 여럿이서 했을 때의 이점도 있는 법.
‘하다못해 식당에서 메뉴를 시킬 때도 엄청난 메리트가 생기지!’
혼자 메뉴를 시키면 한두 개만 먹고도 배가 부를 테니 다양한 메뉴를 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여럿이서 가면 여러 메뉴를 시킨 다음 앞 접시에 덜어 먹을 수 있단 말씀.
게다가 하빈은 그동안 채씨와 다니면서 꿀을 빤 적이 많았다. 저번에도 컨티뉴에 채씨와 방문한 덕에 단번에 VIP 대접까지 받았잖는가.
이왕이면 채남매랑 함께 킬스크린을 도는 게 더 재미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아쉬운 눈으로 채남매를 흘긋대는 순간이었다.
“하하, 퇴근이라…….”
마침 퇴근이라는 단어에 꽂혔는지 이준휘 비서가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딸기 생크림 케이크로도 그의 허한 마음을 달달하게 채울 수 없었던 듯, 살기 어린 눈빛이 일순 반짝였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피데스 님한테 맡기고 물러날 수 있을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네요?”
원래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피데스가 나타나서 ‘이제 가 보셔도 됩니다, 감사했습니다’라고 해야 정상이었다. 그들도 합정역 던전이 B급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피데스가 단번에 정리하고 여기로 와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뉴스 기사를 보아하니, 합정역 던전이 SSS급짜리 던전이었다면서요? 그래서 피데스 님은 그쪽 뒷정리를 하느라 당분간 못 오신다네?”
“……네? 등급이 SSS급이라고요?”
채지석이 고개를 돌렸다. 아마 지금까지 테러 수습에 잔뜩 정신이 팔려 방금 밝혀진 합정역 던전에 대한 내용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금 들은 SSS급이라는 극악한 등급에 채지석은 귀를 의심했다.
“그럼 SSS급 던전을 피데스 님이 공략한 겁니까? 그것도 두 시간 만에?”
“네. 그것 때문에 지금 다 뒤집어졌던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채지석이 침음을 삼켰다. 아무리 피데스가 SSS급 헌터라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 공략을 해내다니. 말도 안 된다.
던전 등급과 헌터 등급이 같다고 해도 여럿이서 던전을 공략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안전을 위해 그게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A급 던전이면 A급이나 B급 여럿이 팀을 짜 공략을 하는 식. 그마저도 이렇게 이른 시간 내에 공략을 끝냈다는 케이스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아니, 딱 한 번 그런 케이스를 봤지.’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던전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깨부수는 인간.
그걸 세 번이나 했던 존재가 바로 여기 있었다!
“……현하빈.”
채지석이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뱉었다. 하빈은 한창 크림을 퍼먹다 고개를 들었다.
“음? 왜?”
“…….”
“앗, 혹시 내가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그래? 채씨 몫까지 먹을까 봐?”
슬금 채지석의 얼굴을 살피던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 채씨, 그런 표정으로 봐도 소용없어! 내가 순순히 케이크를 양보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게 얼마나 어렵게 손에 넣은 케이크인데!”
하빈이 케이크 칼을 집어 들며 턱을 괴었다. 잠깐 고민에 빠진 듯 케이크를 노려보던 그녀는 곧이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크게 선심 쓴다는 태도였다.
“뭐어, 그래도 내가 오늘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긴 했으니, 채씨한테 쪼오금 더 양보해 주도록 할까?”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채지석은 하빈의 칼질을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는 하빈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하빈 너, 방금까지 학교에 있다가 온 거야?”
그의 물음에 하빈은 무심코 대답했다.
“나야 당연히 학교에 있다가 왔……던! 게, 아니라!”
실제로 학교에서 던전을 공략했던 하빈. 그녀는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가 멈칫했다.
‘아차차, 나 오늘 현장학습이었지!’
학교에 던전이 열렸는데 거기 있다 왔다면 이상하다! 하빈은 재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다, 당연히 뮤즈레예술제를 갔어. 거기 시사회를 보러 가야 했거든! 드라마 교양쌤이 데려다주셨다구.”
“……정말 학교 들른 적 없어?”
“그을쎄……? 오늘은 학교 안 갔다니까. 학교에 던전 열렸다는데 어떻게 가? 오늘도 기숙사가 아니라 집으로 귀가해야 해!”
“음…….”
예전이라면 채지석도 좀 믿어줬겠지만, 그는 그동안 하빈에게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다. 그가 하빈의 옷에 진 얼룩을 흘끔 바라보았다.
‘저 얼룩, 이번에도 몬스터 체액 묻히고 온 것 같은데……?’
열심히 털어낸 흔적은 보이지만, 그래도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지석이 눈길이 얼룩에 닿은 걸 확인한 하빈이 괜스레 찔려서 입을 열었다.
“뭐야? 왜 자꾸 쳐다봐? 이, 이건 그냥 콜라 흘린 거거든?”
하빈이 재빨리 변명하며 손으로 옷을 가렸다.
“영화나 드라마는 콜라랑 팝콘 들고 보는 게 국룰인 거 몰라? 그렇게 보다가 콜라 흘린 거라고.”
“색깔이 주황색인데…….”
“퐈, 퐌타! 오렌지맛 퐌타야. 오늘은 콜라 말고 그걸로 먹었어. 에휴 나도 참, 음료수 이름을 헷갈리다니! 원래는 콜라 먹고 싶었는데 다 떨어졌대서 어쩔 수 없이 퐌타를 먹었더니…….”
“영화관에 콜라가 다 떨어졌다고?”
“아, 글쎄 그렇다니까? 참나! 나도 어이가 없어서 정말. 미리미리 콜라 보충을 했어야 할 거 아냐?”
“…….”
하빈은 팔짱을 끼며 쭈욱 몸을 채지석에게서 멀리 물렸다.
“채씨, 적당히 해! 자꾸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으면 다신 안 온다? 기껏 케이크 가져왔더니 사람 의심이나 하고!”
“내가 뭘 의심했는데?”
“……으음.”
하빈이 시선을 피하며 케이크를 입안에 쏙 넣었다. 다행히 때마침 합정역 던전과 관련된 내용들을 모니터링하던 이준휘 비서가 화제를 돌렸다.
“뭐, 이제 보니 SSS급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네요.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SSS급이라고 주장하는데 피데스 님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고 발표하나 봅니다.”
이준휘 비서가 모니터 화면을 그들에게 보이게 돌려주었다. 마침 울림국제고의 상황과 피데스의 인터뷰가 화면 가득 생중계되고 있었다. 피데스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던전은 제가 공략한 게 맞습니다.
[허어?]
‘흐음?’
하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헤자르가 외쳤다.
[이, 이번에도 또! 또 본인의 공로로 모든 것을 돌리려는 참인가!]
‘쉬잇, 잘잘아. 안 들리잖아!’
하빈이 아헤자르를 진정시켰다. 어차피 피데스가 본인이 했다고 입 싹 닫는 게 하빈의 입장에서 훨씬 좋았다. 알리바이가 생긴달까.
‘피데스 녀석이 날 추궁하지만 않는다면 이번에도 완전 범죄가 되겠지!’
만약 피데스가 개인적으로 하빈에게 찾아와서 사건의 진상을 묻는다거나, 영입을 한다거나 그런 귀찮은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흠흠, 그래도 설마 ‘지나가던 아이큐 187의 주민 하난’’을 그렇게 잘 찾아낼 수 있겠어?’
아무리 피데스의 정보력이라도 그런 건 못 찾겠지!
하빈은 태평한 얼굴로 피데스의 나머지 인터뷰를 들었다. 피데스는 무거운 목소리로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려 하고 있었다.
-다들 이해하기 어려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B급인 줄로만 알았던 던전이 SSS급으로 나왔는지, 그리고 제가 어떻게 SSS급 던전을 이렇게 빠르게 해치웠는지 궁금하실 테죠.
그 말에 인터뷰어가 끼어들었다.
-네, 정말 그 부분이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피데스 님이 SSS급을 단번에 클리어할 정도의 강자였냐며 지금 사람들의 반응이 굉장하거든요.
피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이번 던전을 빠르게 공략한 건 제가 강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강했던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요?
그 질문에 피데스는 잠시간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네, 아주 중요하고 위험한 이유죠.
모두가 그 발언에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무슨 이유를 말하려고 저래?”
지레 찔린 하빈이 눈을 굴렸다. 지석이 물었다.
“왜 그래, 뭐 찔리는 거 있어?”
“아? 아니. 당연히 없지. 내가 찔릴 게 뭐가 있어?”
하빈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화면 속 피데스를 노려보았다.
‘설마 하난이니, 지나가던 주민이 도와줬다느니 같은 쓸데없는 말 꺼내기만 해봐라!’
그날이 네 제삿날이다, 가면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