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42) (142/268)

142. 사과는 일조량이 많아야 잘 자랍니다.

묵비의 저주로 레몬을 입 다물게 하고 성공적으로 귀환한 하빈.

‘레몬 녀석을 더 추궁하는 게 좋았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응? 그럼 뭐가 중요한 것이냐?]

‘당연 칼퇴지! 집에 가자. 집!’

오늘은 사인지를 전해주고 기숙사에서 간식을 까먹어야 했다. 겨우 지나가는 레몬 주제에 그 계획을 망쳐서는 안 될 일이다.

다시 쇼핑몰 화장실로 나온 하빈은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었다.

“윽, 왜 청소 관련 마법은 없는 거야? 몬스터 부산물 묻은 거 찝찝하네.”

너무 급하게 가느라 교복을 입은 채로 간 게 패착이었다. 교복에 약간의 몬스터 피가 묻을 걸 본 하빈이 중얼거렸다.

“안 들키려면 교복을 새로 사야 하나?”

하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폰을 켰다. 마침 폰에는 뒤늦게 부재중 연락이 우루루 도착해 있었다.

모두 드라마 교양 선생님이 걱정해서 보낸 문자였다.

[드라마 교양쌤]

-하빈 학생 어디 있어요? ㅠㅜ

-화장실인가요?

-화장실에 없는데...

-ㅠㅜㅠㅜㅠㅜ

-보면 꼭 전화 해줘요....!

다른 학생들이 화장실에 갔다고 알려준 걸 토대로 하빈을 열심히 화장실에서 찾았던 모양이다.

“아앗, 많이 걱정하셨나 봐!”

역시 교육부 장관을 맡아야 하실 정도로 마음 여리고 상냥한 선생님이시라니까.

마침 선생님한테 또 전화가 오고 있었다. 하빈은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앗, 선생님! 걱정하셨죠? 별다른 게 아니라…… 네네! 저 화장실에 있어요. 몇 층 화장실이냐고요? 그게요…….”

하빈이 빼꼼 고개를 문 밖으로 내밀었다. 일단 하빈이 있는 화장실은 행사장 화장실이 아니었다. 그 근처 쇼핑몰 화장실이었지.

물론 이 상황에 대한 알리바이는 있었다. 하빈이 처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제가 원래는 행사장 화장실을 가려고 했는데요, 글쎄 제가 화장실을 좀 가려서요! 깨끗한 화장실이어야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행사장 화장실은 그게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그 근처 쇼핑몰 화장실을 온 거죠! 네? 어떻게 거기까지 갔냐고요? 택시를 탔어요. 네에? 어떻게 택시까지 타고 거길 가냐고요?”

하빈은 종종거리며 화장실을 나오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는 택시를 잡아타고 다른 화장실에 갈 정도로 깨끗한 화장실이라는 게 제 삶에서 무척 중요해요. 그런 가치관인 거죠……. 네? 잠시만요. 뭐라고요?”

대충대충 둘러대던 하빈.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말을 던졌다.

-그게, 하빈 양이 너무 전화를 안 받아서 오빠한테도 연락했는데.

그 말에 하빈은 경악하며 반문했다.

“아니! 현시…… 아, 아니, 오빠한테는 왜요!?”

-그래도 보호자는 보호자니까…….

“선생님! 저는 비록 학생이지만 떳떳한 성인이라고요! 그래서 오빠는 뭐라고 하던가요?”

하빈이 찔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땡땡이를 혈육에게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것은 사생활적인 부분이라 기분이 별로였다!

‘현시우가 얼마나 잔소리가 많은 인간인데!’

어렸을 때도 하빈이 공부 안 하고 딴짓하고 있으면 꼭 잔소리를 한마디 던지거나 비웃고 지나가던 현시우의 태도. 그 기억을 떠올리던 하빈이 입술을 깨무는 순간이었다.

마침 수화기 너머로 대답이 들려왔다.

-전화를…… 안 받던데요.

“……휴.”

그럼 그렇지. 한 번 잠수 타면 5년은 가는 인간인데, 또 어디서 적당히 생존해 있는 모양이다.

하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쨌든 선생님에게 귀가 허락을 받게 된 하빈. 선생님은 이번엔 본인의 탓도 있었다며 하빈을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

‘나도 학교에 일이 갑자기 터졌다는 말을 듣고 가는 바람에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이 있죠. 하지만 앞으로 자리를 비울 때는 다른 학생에게라도 언질을 주도록 하세요. 음, 물론 하빈 학생은 화장실에 간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다른 건물까지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 하빈이 화장실 가겠다고 한 말은 진실이었기에 차마 더 추궁하지 못한 것이리라.

“어쨌든 라티제 케이크를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구!”

하빈은 귀갓길에 라티제 베이커리에 들러서 딸기 케이크를 포장했다. 저녁 먹고 나서 디저트 겸 야식으로 먹을 셈으로 챙긴 것이었다. 고민 끝에 아이스크림이 아닌 케이크를 골랐지만 후회는 없었다.

‘저번에 먹었던 로즈슈가랑은 전혀 다른 매력이 있단 말이지.’

이제 기숙사에 가서 먹기만 하면 될 터. 하빈은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보스도 해치우고, 가면마법사도 상대하고.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그러니 내겐 이 정도 소확행을 즐길 자격이 있지.”

하빈이 그럼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서윤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으휴!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걸 뭘 전화씩이나.’

하빈이 냉큼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서윤이 물었다.

-언니, 설마 지금 학교 오는 중이야?

“응? 당연하지. 약속대로 케이크도 잘 포장했어! 사인지도 잘 챙겼고. 좀 있다 줄게.”

하빈이 인벤토리에 있는 사인지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서윤의 반응은 얼떨떨했다.

-어……. 근데 어쩌지……?

곤란한 듯 말을 얼버무리는 서윤.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언니……. 내가 방금 들었는데 우리 학교가 당분간 안전 문제로 폐쇄될 것 같대.

“엥?”

안전 문제로 폐쇄라니?

“그럼 이제 학교 못 가……?!”

하빈은 후두둑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다. 서윤이 말을 이었다.

-그, 언니도 알다시피 던전 열리면서 학교 구조물들이 좀 파괴되었잖아. 우리 기숙사 지하대피소도 입구가 무너졌고……. 아무리 그래도 무너진 건물에서 수업을 하거나 잠을 자는 건 안 된다는 의견이라서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 결정 났나 봐.

“뭐어?”

-아마 언니한테도 집으로 가라는 알림이 곧 갈걸…….

“이럴 수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동안 즐겁게 땡땡이를 쳤던 소중한 학교. 오늘 안락하게 야식을 먹으려던 아늑한 기숙사가 몬스터들 때문에 망가져서 출입 금지라니!

“이런 몰상식한 몬스터들! 남의 삶의 터전을 망가뜨리면 쓰나! 역시 씨를 다 말려버렸어야 했는데!”

-…….

“아참! 내가 심어 놓은 사과나무 묘목도 무사한지 확인을 안 했네!”

하빈이 학교 뒤뜰에 심어놓은 소중한 사과나무 묘목. 그 귀여운 묘목들을 생각하니 우울감이 마구마구 몰려오는 기분이다.

“우리 애플이들은 물 안 주고 햇빛 못 보면 안 되는데…….”

-그래도 다행히 일찍 공략되어서 피해는 거의 없었대. 이 정도면 얼마 안 가 재건되지 않을까? 며칠만 휴교하고 다시 풀릴 것 같은데…….

“그럼 서윤이 너는? 오늘 케이크 못 먹어? 나 사인지도 가져 왔는데!”

하빈의 물음에 서윤이 곤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그게…… 부모님께서 많이 놀라셨는지 학교로 바로 데리러 오셔서……. 나 지금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뭣……!”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서윤아, 이제 가야지!’ 하는 그녀의 부모님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윤이 곤란한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 그럼 이만 가볼게, 언니. 오늘 정말 고마웠어. 케이크 사준 거랑 사인지도 너무너무 고마웠고…… 다음에 또 보자.

“이럴 수가……!”

하빈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케이크 상자를 내려보았다. 아헤자르가 지적했다.

[그러게 내 말을 들으라 하지 않았느냐! 나는 저번에 분명 경고했다. 누구한테 뭘 전해줘야 한다고 아련하게 외치면 꼭 못 전해준다니까!]

“에이 진짜! 그 플래그가 왜 이렇게 되는 건데!”

다른 건 몰라도 잘잘이의 말이 맞았다는 게 제일 어이없었다. 하빈이 신경질적으로 폰을 끄려는 순간이었다. 아직 전화가 끊기지 않았는지 서윤의 말이 이어졌다.

-아! 그리고 제희는 병원에 실려갔대. 무사한가 봐.

“흐음.”

아마 저주가 풀렸으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몸이 받은 충격도 있을 테니 병원에 가는 게 맞을 것이다. 어차피 하빈이 걸어 둔 묵비의 저주가 있으니 누구에게 비밀을 발설할 수도 없을 테고. 어쩌면 그때 겪었던 일을 꿈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갈지도 모른다.

“…….”

하빈은 마침내 끊긴 전화와 케이크를 번갈아 보며 끄응 한숨을 쉬었다. 케이크는 혼자 먹기에 양이 너무 많은데.

“같이 먹을 사람 어디 없나?”

잠시간 폰 화면을 내려보던 하빈은 이윽고 누군가의 연락처를 떠올렸는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간 뒤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현하빈?

상대는 채지석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를 흘려넘기며 하빈은 본론을 말했다.

"오늘 출근 안 했지? 뭐 해?"

그 물음에 지석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출근은 안 했는데 출근을 했어.

“엥 그게 뭔 소리야? 아, 하긴 학교를 출근 안 해도 솔라리스 업무는 보겠구나? 이래서 랭커는 할 짓이 못 된다니까.”

-아냐, 그게 아니라, 이번엔 SPES에 테러 난 거 막다가…….

SPES 테러?

“……그거 가면마법사 대신 그쪽이 막았어?”

-어.

“와, 가면마법사 은근히 일 돌려막기 잘하네.”

다 계획이 있었다 이건가?

뭐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빈은 늦지 않게 본론을 말했다.

“채씨. 저번에 딸기 스무디 잘 먹었잖아. 혹시 딸기 케이크도 먹을 줄 알아?”

-무슨 질문이 그래? 당연히 먹지! 저번에 스무디 말고 케이크도 먹었거든? 그건 못 봤냐?

“그랬나? 어쨌든 지세 언니도 케이크 잘 먹지?”

-어. 누나도 잘 먹어.

“그럼 됐네! 같이 먹자!”

결론을 내린 하빈이 경쾌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역시 케이크는 여럿이서 먹어야 제맛이었다.

* * *

다시 학교. 피데스의 공식 기자회견은 예상외로 한참 늦어지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는 최종 브리핑의 경우, 원래 급한 일을 먼저 처리하고 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현시우 또한 생존자들의 대피를 확인하고, SPES 관리국에 간단 내용을 전달하느라 바쁜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문제로 조금 바빴다.

“……아, 네, 선생님. 네, 네네.”

주변에 아무도 못 듣고 못 보게 열심히 방비를 해둔 채 현시우는 지금, 드라마 교양선생님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것도 교장이 아닌, 현하빈의 오빠로서.

-아, 하빈 양의 경우 화장실에 간다고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아하, 그랬군요. 다행이네요.”

듣자 하니 현하빈이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비웠던 시간이 현하빈이 여기서 보스 썰던 시간과 너무 찰떡같이 맞아 떨어진다.

‘역시 그때 봤던 가면 쓴 여자애는 현하빈이 맞았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걸로 확인 사살까지 한 기분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현시우에게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화장실 간다고는 했는데 자리를 좀 오래 비워서 걱정했던 거였거든요……. 별문제는 없겠죠?

아무래도 걱정이 많은 성격인가 보다.

“흠…….”

그래도 현하빈은 가면까지 쓴 걸로 봐서 본인의 이중생활을 들키고 싶지 않을 텐데. 이왕이면 현하빈을 조금 도와주는 편이 좋으려나?

아무래도 선생님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도록 안심시켜 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또 인심 썼다, 현하빈.’

결론을 내린 현시우는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네?

“사실 이건 현하빈이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이긴 한데…… 그 애가 화장실을 오래 가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서요.”

-아, 아 그런가요? 역시 가족이라 좀 더 잘 아시는?

“네. 그렇습니다. 제가 잘 알죠. 이건 진짜 진짜 비밀인데…….”

잠깐 멈칫했지만, 결국 현시우는 고개를 진중하게 끄덕이며 말을 끝맺었다.

“사실 걔가 좀 변비가 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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