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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41) (141/268)

141. 레몬은 생선의 비린내 제거도 되고 비타민 C도 풍부하며 리코타 치즈나 소스 재료로 쓰이는 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과일입니다. (2)

한편, 레몬은 기가 질리다 못해 울먹거리며 고개를 젓고 있었다.

“거짓말 마요……. 어떻게 사람들을 데려와요? 말도 안 돼! 저도 가끔 관리자 점검시간 때나 들락거리는데!”

“응, 네가 안 믿는 건 상관없고. 어쨌든 네 사유지 아니니까 난 맘대로 한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레몬의 태도가 돌변했다.

“다, 당신 뭐야! 당신 역시 마신이지? 아닌데……. 마신도 그렇게는 못 하는데…….”

“억울하면 너도 친구 데려오든가.”

“여기가 파티장도 아니고 왜 친구를……. 그것도 그거지만 어떻게 데려오냐고요.”

환장하다 못해 쓰러질 것 같은 낯빛의 레몬. 반면 하빈은 그새 이공간을 둘러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까 여기 고기 구워 먹으면 냄새 어디로 빠지려나? 말 들은 김에 이프시네랑 크릭샤한테도 구경 좀 시켜줄까. 파티장 하니까 말인데 진짜 여기서 소소하게 피크닉 정도는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허어.”

기절하기 직전의 레몬은 이제 말할 힘도 없는 듯했다.

‘뭐야? 얘는 낯빛이 새하얘?’

그 모습을 보니 하빈은 뒤늦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흠, 이제 보니 내가 애를 너무 몰아붙인 감도 있는 거 같고.’

그동안 아무도 이공간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본인 소유 집은 아니더라도 실거주 집처럼 여기고 있었을 게 빤한데.

거기에 대고 몇천 년이나 몇만 년 만에 새로운 인간이 떡하니 들어와서 갑자기 설치고 다니고, 거기다 친구들까지 데리고 들락날락하겠다 선포를 했으니.

‘집을 뺏긴 기분이려나?’

그럼 기절한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이래서 본인 소유 집에 사는 게 참 심적인 안정감을 주는 거야. 내가 괜히 현시우한테 받은 돈으로 우리 집 빚부터 갚은 게 아니라니까?”

아주 슬픈 사회현상이었지만 이래서 내 집 마련이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다.

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인벤토리에서 머랭 쿠키를 꺼냈다. 얼핏 딱딱해 보이지만 입 안에 넣으면 구름처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쿠키. 하빈은 그중에서도 상큼한 레몬 맛을 골라 레몬에게 건넸다.

“자, 레몬아. 이거라도 먹으면서 정보를 좀 불어 봐.”

레몬은 쿠키를 보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거…… 독 아니죠? 역시 관리자가 나를 죽이려고 보낸…….”

“죽일 거면 진작 죽였겠지. 하여튼 요 꿀밤 한 방짜리처럼 생긴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

“그리고 넌 독 먹으면 죽는 체질이니? 잘잘아, 혹시 성좌는 독 먹으면 죽어?”

[그런 건 못 들어 보았다.]

“그럼 걱정할 일도 없잖아?”

“그, 그건 그렇…… 잠시만요! 저 성좌 아니라니까요!”

하빈은 레몬의 변명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손짓했다. 성좌들은 다들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특징이라도 있는 건가? 뻔히 다 보일 거짓말을 왜 한담.

레몬은 흠칫흠칫 하빈의 눈치를 살피며 킁킁 머랭쿠키의 냄새를 맡았다. 상큼하고 따뜻한 레몬머랭의 향기를 맡은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얼마만의 쿠키……. 2만 년 만인가……!”

“……?”

2만 년?

2만 년이라고?

‘와, 얘 2만 년 넘게 여기 숨어 있었나 봐.’

그게 사는 거냐?

듣자 하니 몇 번이나 멸망을 피하려고 여기 숨었다던데, 2만 년 넘게 숨는 건 솔직히 멸망 피하려고 숨어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그럴 바에 즐길 거 다 즐기고 다 같이 멸망하는 게 낫겠네.

부스럭부스럭.

레몬은 머랭쿠키의 가장자리를 살짝 갉아먹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이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울먹하던 레몬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입안에 넣었다. 오독오독 머랭을 깨물어 먹는 레몬. 한 입 한 입을 먹을 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흑……. 맛있어!”

울먹거리면서 머랭을 씹어 삼키던 레몬은 마침내 쿠키를 다 먹자 무척 아쉽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가루라도 핥아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차마 그의 자존심에 가루는 핥지 못하는 모양.

“에휴, 자. 여기 더 먹어라.”

하빈이 측은해 보이는 레몬의 등을 두드리며 머랭쿠키를 몇 개 더 주었다. 레몬은 허겁지겁 쿠키를 더 먹었다.

“야야, 그러다 숨넘어가겠다. 쿠키 말고 또 먹고 싶은 건 없고?”

하빈의 은근한 물음에 레몬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마, 많죠! 전 바깥에 나갈 기회가 정말정말 없어서, 나갈 때마다 큰맘 먹고 하나씩 뭔가를 먹으려 하는데!”

‘그래도 바깥을 들락거리기는 하나 보네.’

하빈 외에 이공간 진입을 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횡설수설 정보를 불던 레몬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데…… 제가, 제가…….”

“응? 뭔데?”

“그…….”

말을 하던 레몬은 쿠키를 먹다가 멈칫했다. 그가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근데 저 돈이 없어요…….”

뒤늦게 다급한 목소리로 덧붙이는 레몬. 하빈은 그럴 줄 알았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성좌들은 다들 돈이 없더라고. 잘잘이도 캐시 없어서 웹소 못 봐.”

[구, 굳이 그런 얘길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힘껏 항변하는 아헤자르였지만, 왠지 그럴수록 더 딱하단 말이지. 성좌들은 다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네풀릭스 결제도 못 하고.

‘이래서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 수 있겠어?’

하빈은 고개를 돌려 레몬을 보았다.

쿠키를 2만 년 만에 먹는다는 발언이나, 가끔 밖에 나간다는 말로 봐서 이 녀석은 음식물을 섭취하는 일이 상당히 어려운 모양. 먹거나 마시지 않고도 2만 년 넘게 버틴 건 레몬이 성좌라서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걸 듣던 아헤자르는 혀를 쯧쯧 찼다.

[흥. 나도 음식을 못 먹어본 건 마찬가지인데, 별로 괴롭지 않더니만. 하도 오래되면 무슨 맛인지도 까먹어서 미련도 없어지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아직 그 경지까진 아닌 것 같군.]

레몬은 눈을 굴리며 하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빈이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 레몬은 돈이 없구나. 그치만 어쩌지? 나는 꼭 받아야겠는데.”

“히익.”

레몬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쿠키를 꼭 그러쥐었다. 지금 자신의 입으로 들어간 음식들이 얼마인지 몰라 혼란스럽고 두려운 모양이었다.

“도, 도저히 돈을 구할 수 없다면요? 어떡하죠?”

“어떡하긴. 다른 걸로 때워야지.”

“제가 어, 어떻게?”

극도로 불안해하는 레몬에게, 하빈은 눈웃음을 지으며 한발 다가섰다.

“지금부터 내가 물어보는 거에 솔직히 대답하는 걸로 갚도록 하자.”

“…….”

“잘 대답하면 쿠키 말고 더 맛있는 것들도 줄 수 있어. 콜?”

“……!”

씨익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짓는 하빈. 그녀의 상냥한 말에 레몬의 표정이 흔들렸다. 하빈은 놓치지 않고 레몬에게 물었다.

“그래, 레몬아. 첫 번째 질문이다. 네가 보기에 여긴 뭐 하는 공간 같아?”

“……그, 그건 저도 몰라요. 관리자조차 마음대로 간섭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것만…….”

“그럼 두 번째, 관리자는 왜 멸망을 일으키려는 걸까?”

“그것도 전 잘 몰라요.”

“뭐야,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하빈이 얼굴을 찡그렸다. 불안함을 느낀 레몬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제, 제가 아는 건 일단 저 말고 여기 이렇게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이 그쪽밖에 없었단 거예요! 아, 그, 그리고 전 이제껏 오랫동안 여기 지냈기 때문에 이 공간에 적응을 잘했어요. 아는 것도 많고요! 안내 역할로 쓰셔도 돼요.”

“흐음, 안내 역할?”

하빈의 물음에 레몬은 고개를 다급하게 끄덕였다. 그가 근처의 반짝이는 오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파직-

그의 손짓에 오류의 형상이 조금 바뀌었다.

‘오?’

창문인가?

레몬이 손짓한 곳에 오류 그 너머의 공간이 반투명한 창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빈은 방금 그녀가 지나온 기숙사 방 안의 모습이 그들 앞에 창문처럼 비치는 걸 보고 감탄을 흘렸다.

“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미리 어떤 상황인지 보고 들어갈 수 있다, 이거군?”

“네! 이게 제 능력과도 관련이 있거든요.”

“네 능력이 어떤 종류인데?”

“이동과 염탐이랑 관련된 거라…….”

레몬이 말을 얼버무렸다. 하빈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하빈은 바깥 상황을 모르고 막 들어가는 바람에 곤란한 일을 겪은 적이 많았다. 크릭샤의 집무실에 예고도 없이 떨어졌다거나, 서윤과 제희가 있는 공간에 불쑥 나타나기도 했고.

‘하지만 이 레몬 녀석을 써먹으면 그럴 일이 줄겠구나.’

그건 꽤 쓸만한 일이었다.

“오케이! 합격.”

하빈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레몬은 눈치를 보며 덩달아 안도한 표정을 했다.

“도,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에요. 그리고 저, 부탁이 있는데요…….”

“뭔데?”

“저는 진짜 여기 조용히 죽은 듯이 사는 게 꿈이라서, 제가 여기 있다는 거 관리자가 모르게! 비밀로 해 주세요!”

그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하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건 이해해. 사실 나도 그렇거든. 너도, 나를 여기서 봤다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럼 다음에 라면 안 사올거야.”

“라……면이요?”

“응, 그거랑 치킨이라고 닭을 튀긴 요리가 있고 떡볶이라고 매콤한 감칠맛을 가진 요리도 있어. 다음에 기회 봐서 소고기도 구워 먹을 건데…….”

이어지는 하빈의 심드렁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에 레몬의 눈이 커졌다. 줄줄 읊어지는 음식 설명을 들은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외쳤다.

“저, 저 진짜 안내도 잘하고, 입도 잘 다물게요. 정말 잘할 수 있어요!”

“호오. 그래?”

“그럼요! 올 때마다 레드카펫 깔아드릴까요?”

얘는 여기 쭉 살았다면서 레드카펫을 어떻게 안담?

완전히 경계심을 풀다 못해 방방 뛰려는 것 같은 레몬 성좌를 향해 하빈이 대답했다.

“뭐, 그런 건 됐고, 일단 입 다물기 위해 이것부터 걸자.”

“뭘 거는데요?”

“묵비의 저주.”

하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손짓했다.

* * *

현시우는 여전히 학교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잃은 학생들을 수습하고, 대피소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다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현하빈은 그냥 갔나 보네.’

아무래도 아직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모양. 급하게 도망친 것도 그렇고, 가면을 쓴 것도 그렇고. 자신의 공적을 숨기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지 않냐?]

그 순간이었다. 네아이바가 흠칫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뭐가요?’

[현하빈, 원래라면 여기 있을 수 없잖아? 원래 현장학습에 있어야 하는데?]

“……!”

급박한 상황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현하빈은 원래 뮤즈레문화예술제에 갔을 터. 게다가 이 던전은 아무도 들어오고 나갈 수 없는 던전이라고까지 했는데.

‘예술제에 있다가 소식 듣고 오류로 뚫고 들어온 걸까요?’

그럼 현장학습은 빠진 건가?

현시우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의 주머니 속 폰으로 알림이 왔다. 뒤늦게 복구된 통신망 덕분에 연락들이 도착한 모양이다.

띠링띠링.

‘SPES 본부 관련 알림들이겠지?’

테러 사건 때 여기저기서 현시우를 찾아댔을 테니 그 알림들이 이제야 오는 모양이다. 그렇게 넘기려던 현시우는 다른 알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이번에는 그가 가진 세컨드 폰으로 온 연락이었다. ‘현시우’라는 신분으로 만들어 놓은 폰이었다.

“……여기로 연락 올 일이 있나?”

의아한 마음에 알림을 확인했다. 전혀 모르는 연락처로 온 메시지였다.

[010-XXXX-XXXX]

-안녕하세요

-저기...

-현하빈 양 오빠 되시는 분이시죠?

-다름이 아니라 현하빈이 현장학습에서 사라졌는데 연락이 안 되어서요

-보호자 연락처가 이것밖에 없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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