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레몬은 생선의 비린내 제거도 되고 비타민 C도 풍부하며 리코타 치즈나 소스 재료로 쓰이는 등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과일입니다. (1)
“야, 레몬아.”
“레, 레몬…….”
레몬머리, 아니 레몬은 히끅 딸꾹질을 삼켰다.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는 말을 돌릴 생각도 없이 그냥 바로 물었다.
“너 성좌니?”
생전 처음 겪는 빠꾸 없는 질문에 레몬은 기겁했다.
“넥? 아, 아?뇨.”
삑사리를 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레몬.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며 변명했다.
“성, 좌가 뭐, 뭘까요?”
[발뺌하는 모양이니라!]
예전에 성좌 아니라고 발뺌한 경력이 있었던 아헤자르. 그가 딱 걸렸다는 듯 신이 나 외쳤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레몬이 흠칫했다.
“헉, 설마 아, 아헤자……. 으윽, 어쨌든 아니에요!”
[흐음?]
아헤자르가 의아한 듯 침음을 흘렸다.
[이 녀석 나랑 아는 사이었나? 굉장히 익숙한 기분이 든다만.]
“잘잘이한테 아는 성좌도 있어? 흠. 의왼데.”
[저번에 네아이바도 안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꽤 아는 사이였던 자들이 많았다!]
아헤자르는 본인의 인맥이 넓었음을 피력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가는 곳마다 주변의 환대와 존경을 샀던 몸이었다. 이 몸의 인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또 한 번 더 시작되려는 라떼라떼 스토리. 하빈은 심드렁하게 그 말을 잘랐다.
“그래그래, 됐고. 그래서 레몬이랑은 무슨 관계인데?”
[그게…….]
아헤자르는 오래도록 침묵하며 고민에 잠겼다. 그가 마침내 소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디서 본 듯한데 도통 모르겠다.]
“에이, 뭐야?”
기껏 중요한 정보인가 했더니 김샜네.
‘너 그냥 아무나 붙잡고 다 안다고 말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엉?’
[아, 아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오래 살다 보니 못 알아볼 수도 있지 않느냐? 게다가 성좌는 인간형이 될 때 모습을 조금씩 바꾸기도 한단 말이다!]
“그치만 인간형 성좌는 한 손에 꼽는다며. 그거 하나 기억 못 해?”
[짐작 가는 녀석이 있긴 한데…… 하지만 그 녀석은 실종된 성좌였는데. 사이도 그렇게 친밀하지는 않아서 아는 척을 하기가 좀…….]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하긴 현하빈도 맨 처음 아헤자르를 만났을 때 알림창에서 본 적이 있다.
시스템의 영향을 받는 모든 성좌가 아헤자르와 하빈을 적대한다고.
그럼 괜시리 성좌에게 친한 척을 하거나 아헤자르에 대해 마구 티 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하빈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레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쨌든 레몬 성좌야.”
“서, 성좌 아니라니까……요!”
어린 인간 모습으로 인간화를 했는지 작은 체구를 가진 레몬. 그는 레몬즙을 넣어 만든 리코타 치즈처럼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하빈이 물었다.
“어쨌든 레몬레몬아. 넌 여기 어떻게 있는 거니?”
“그건 나야말로 묻고 싶은 것……예요! 인간은 여기 못 들어오는데 그쪽 인간 맞아요? 뭐, 마신이거나 오류 이런 거 아냐?!”
‘헉? 어떻게 알았지?’
속으로 사알짝 찔렸던 하빈. 그러나 하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떳떳한 인간이었으니까. 대한민국에 주민등록까지 된, 세금 내는 선량한 시민!
그러는 와중에도 레몬은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여긴 마신도 막 못 들어온다던데……. 큰맘 먹어야 겨우 들어올 곳일 텐데……. 나도 겨우 들어왔는걸.”
“그치그치. 난 인간이 맞다구.”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은 펄쩍 뛰었다.
“으에엑, 거짓말하지 마앗……요! 인간이 어떻게 여길 막 들어와?!”
‘듣다 보니 빈정 상하네?’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채씨도 맨날 인간 취급 안 해주던데 이젠 지나가는 레몬도 나를 인간 취급 안 해준다. 하빈이 뾰족한 목소리로 레몬에게 물었다.
“그럼 넌 인간 아니야? 인간 아니면 뭔데? 엉?”
“저, 저는 그러니까!”
정곡을 찔린 레몬이 주춤했다. 그가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저, 정령! 이공간의 정령!”
[저건 나도 저번에 썼던 변명인데!]
채지석과의 첫 만남에서 본인이 검의 정령이라고 되도 않는 변명을 했던 아헤자르. 그는 레몬에게 내적 친근감이라도 생겼는지 안타깝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꽤나 정체를 들키기는 싫은 모양이로구나.]
하빈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며 눈을 굴리던 레몬. 그는 하빈과 싸우거나 도망쳐 볼 엄두가 안 났는지 포기한 듯 한숨을 쉬었다. 레몬이 어쩔 수 없이 말을 뱉었다.
“……그냥 숨어 있는 거예요. 여긴 아무도 못 들어오는 최후의 대피처니까.”
“뭘 피해 숨었는데?”
레몬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관리자나 멸망 같은 거요.”
“오?”
[오?]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이 레몬 녀석이, 멸망을 피해 숨어 있는 거라고?
“그럼 멸망 일어나도 여기는 안 망한다는 거야?”
“그렇죠! 여긴 관리자의 영향이 닿지 않으니까 멸망 일어나도 여기에만 잠깐 숨어 있으면 지나간다니까요? 저번에도 그렇게 피했었는데…….”
신이 나서 줄줄 설명을 내뱉던 레몬. 그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 잠깐! 혹시 그쪽, 관리자가 보낸 건 아, 아니죠?”
뒤늦게 레몬이 주춤거리며 하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이 공간의 존재까지도 관리자가 알아버린 건가? 그럼 내겐 더 이상 희망이 없는데…….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상당히 겁이 많고 심약한 성격인 모양이었다. 하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야, 네가 보기엔 내가 관리자 같아 보이냐?”
“아, 아뇨. 전혀.”
“그래. 난 은퇴를 꿈꾸는 백수……가 아니라, 고등학생이라고. 그런 골치 아픈 일 따윈 안 해.”
“관리자는 골치 아픈 일이 아니라 신 같은 건데요…….”
“아무튼 안 해!”
오히려 관리자에게 단단히 찍힌 게 현하빈이다. 관리자는 하빈을 죽이고 싶어서 퀘스트까지 대대적으로 내렸지 않은가.
“어쨌든 그래도 레몬 네 말대로면, 여기에만 숨으면 관리자의 눈을 피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
“대답.”
“네, 네에.”
“그리고 말야, 너 말고 여기 들어온 녀석 있었냐?”
“당연히 없겠…… 아니지. 그, 이론상 오류 그 자체인 마신이라면 들어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흐음, 그렇구나.”
“그래서 그쪽, 뭐예요? 설마 진짜 마신이에요?”
레몬의 추궁에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엥? 아냐. 스카웃 받긴 했는데 거절했다구.”
“스, 스카웃?”
마신 자리에 스카웃을 받을 수가 있나?
하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맵찔이 꼰대 주제에 감히 그런 귀찮은 자리에 앉히려 했단 말이야. 난 당연히 탈주했지.”
[근데 애초에 네가 마신이라고 사기 치고 다니지 않았느냐?]
“앗? 그랬었네?”
생각해 보니까 마신이라고 입 털고 다닌 건 하빈이 최초였다. 지금 마족들도 하빈을 마신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찐 마신도 하빈에게 반지와 함께 전권을 넘겨줘 버렸다!
[……!]
아헤자르가 무언가 깨달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마신 맞는 거 아니냐?!]
‘엥? 그게 그렇게 되나?’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난 탈주했다고. 원래 직업은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법이지. 해X포터에서도 나오잖아? 결국 본인이 가고 싶은 기숙사를 가는 게 이치. 원래 진로라는 건 그런 거야. 누가 뭐래도 본인이 아니라면 아닌 거라니까.’
지금 하빈은 마신이 아니라고 주장 중이니 어쨌든 마신이 아니다. 기적의 논리를 마친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래서 난 마신이 아니야.”
“그, 그럼 뭐 하는 분이신데요?”
“인간이라니까! 내가 인간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니? 자, 이것 봐. 주민등록증이야.”
하빈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카드지갑을 꺼냈다. 그녀가 선심 쓴다는 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원래 신분증은 정말 중요한 거라서 잘 안 보여주는 건데. 흠흠.”
아헤자르를 얻기 전에는 하빈의 보물 1호와 2호가 바로 체크카드와 신분증이었다. 이 험난한 사회에서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필수품. 사실 지하철에 몇 번 두고 내려서 분실신고와 재발급을 받은 적 있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하빈은 팔짱을 끼며 설명했다.
“이런 게 있어야 대한민국에서 알바를 할 수 있어. 그러니 신분증이란 정말정말 중요한 것이지.”
근로계약도, 성인인증도 이게 있어야만 가능하다.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몬은 멍한 표정으로 주민등록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로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게……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요한 건가 보네요. 바깥 세계에서는 이게 인간이라는 증거로 통용되나 보죠?”
“안타깝게도 그래. 사실 우리나라만 그런 걸 수도 있어. 우리나라는 쓸데없이 등록에 철저하거든? 각성자 등록도 쓸데없이 철저해서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렇다. 대한민국은 일을 잘하느니라!]
‘에휴, 잘잘이는 대체 어디서 살다 왔길래 맨날 대한민국이 일을 잘한대?’
뭐, 공문서를 편지로만 처리하는 곳에서 살다가 왔나? 하긴 로판 소설 보고 자기네 세상이랑 닮았다느니 하는 걸 보면 맞는 거 같기도.
“어쨌든 레몬아, 너 원래 여기서 사니?”
“…….”
하빈은 신분증을 다시 지갑에 넣으며 물었다. 레몬은 침묵했다. 어디까지 믿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하빈이 선수를 쳤다.
“여기 살고 있다면 미안. 그치만 내가 앞으로 여길 자주 써먹을 거거든? 괜찮지? 어차피 사유지도 아니잖아?”
“사, 사유지요?”
“그래. 설마 레몬이 너 여기 부동산 등기를 쳤니? 여기 땅 샀어?”
하빈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유지라면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문제라면 나가줄 의향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레몬은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레몬은 그저 경악했다.
“네? 네에? 그게 뭐죠? 드, 등기요?”
“봐봐, 아니잖아! 그럼 나도 여길 맘대로 들락거려도 되는 거 아냐? 난 내 친구들 다 데려올 건데.”
“치, 친구요? 여기에요? 여기 들어오는 거 자체가 성좌급에게도 힘든 일인데 대체 어떻게…….”
덜덜 떨고 있는 레몬. 그러나 하빈은 묵직한 팩트를 던져주었다.
“응? 나 이미 친구들 데리고 여러 번 들락거렸는데?”
“뭐요?!”
* * *
한편, 던전이 공략된 걸 알아버린 마이너 패치. 네 번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어떻게 그 수수께끼들을 다 푼 거지?”
그가 설정한 던전은 보스를 처리하기 전까지 끔찍할 정도의 고난도 문제를 풀어야 했다. 이걸 풀으라고 던져 준 건가 싶을 정도의 골 때리는 수수께끼.
그런데도 공략 성공했단 말은 이걸 다 풀었단 건데…….
“아, 아이큐가 187이라도 되나?”
“…….”
네 번째의 멍한 중얼거림에 에라타는 비웃음을 던졌다.
“이 와중에도 저런 얼빵한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니. 저 자식 저러다 소멸 각인데?”
“뭐 어때, 소멸되면? 관리자님이 다음 사도를 뽑든 말든 알아서 하시겠지.”
세 번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제대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시 관리자는 징계를 주거나, 최악의 경우 소멸의 방식으로 사도를 폐기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죽어버리면 관리자도 사도에게 줬던 치트를 회수하지 못한다. 그러나 관리자가 직접 소멸시켜 폐기를 시키면, 다음 계승자를 골라 다시 치트를 선사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여섯째가 반대라는 듯 말을 얹었다.
“그치만 네 번째가 죽는 건 싫은데요. 계승자 뽑는 게 쉬운 것도 아닐 테고. 기껏 서로 좀 알았다 싶었는데 죽으면 아쉽잖아요?”
말은 저렇게 해도 이 녀석들은 동료애 같은 건 딱히 없었다. 여섯째의 발언도 딱히 별 감정이 있다기보단 귀찮다는 태도. 그가 태서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첫 번째, 당신도 설치에 가담한 부분이 있으니 패널티 받을지도 몰라요. 네 번째 때문에 그쪽이 웬 고생인지.”
“참작해 주시려나?”
“…….”
강태서는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도 각오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강태서는 설치 중에 손댄 것이 있었으니까.
‘2일간 저주에 걸리도록 하는 패널티.’
원래라면 몬스터들이 그 공격 외의 다른 공격들도 해야 정상인데 강태서는 마이너 패치와 관리자 몰래 조금 장난질을 쳐 뒀다.
몬스터들이 공격 스킬 대신 저주 스킬을 사용하도록.
그것 또한 치명적인 스킬이지만, 2일 동안이라도 학생들의 목숨이 붙어 있으면 구조대에게 구해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그런데 전원 생존이라니.
효과가 과하게 좋았던 탓에 오히려 걱정이 앞선다.
‘설마 눈치채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