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Counter attack (4)
한편, 던전이 공략되어서 당황한 건 마이너 패치 뿐만이 아니었으니.
“뭐야? 던전 왜 벌써 공략된 건데!”
사실 공략 당사자인 현하빈이 제일 식겁했다. 원래 이렇게 빨리 공략할 생각은 없었다. 보스 좀 농락하면서 가면마법사도 추궁하고 겸사겸사 크릭샤를 위해 시간도 끌어야 했는데…….
하빈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다고 현실이 바뀌진 않았다.
-축하합니다! 보스 우레아랅을 성공적으로 처치했습니다!
-SSS급 던전▨ 쩳№떯흙헰!이 공략 완료되었습니다!
“완료하지 마! 이거 왜 완료인데!”
“…….”
그 꼴을 보며 조용히 침묵하는 현시우.
하빈은 통탄을 금치 못하고 이미 죽어버린 우레아랅의 시체를 탁탁 발로 찼다.
“너! 너어는 SSS급 보스면서 체력이 왜 이따구야? 어? 하긴 애초에 겨우 학교 따위를 먹겠다고 난리 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모 영화의 코 없는 대머리 악당이냐? 스케일도 작고 완전 허접이네!”
“쟤는 X드모트보단 X우론에 가깝게 생겼었는데…….”
현시우는 지적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 하빈이 씩씩거리며 현시우를 돌아보았다.
“가면마법사, 내가 경고하는데…… 다음에 보면…….”
무언가 말을 하려던 현하빈. 그러나 그녀의 말은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달그락달그락.
웅성웅성…….
“……우와, 진짜 던전 공략된 거야?”
“피데스 님이…….”
“자, 나오기 전에 먼저 안전을 확인하고…….”
중앙 홀 한쪽에 있던 지하 대피소. 거기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지하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이 옹기종기 다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엇, 사람들이 몰려오잖아?’
사람들 눈에 띄었다간 곤란해진다. 하빈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된 이상, 정말 아쉽지만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고 보자, 가면마법사!”
하빈은 삼류 악당이 남길 법한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도서관을 벗어났다.
* * *
“크릭샤! 아, 아니, 김릭샤 어딨어!”
“여, 여깄습니다!”
“해주 얼마나 했어?”
“학교 바깥쪽이랑 도서관 일부 층 빼고 다……일걸요?”
“됐쓰!”
황급히 크릭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하빈. 사람들이 보기 전에 쑤우욱 크릭샤를 챙겨서 나오는 걸 잊지 않았다.
“서윤이는 저녁에 보자! 언니가 라티제 딸기케이크 사올게!”
“어, 어어, 언니?!”
서윤을 기숙사 방에 데려다준 하빈. 그녀는 사라지기 전에 서윤과 제희에게 묵비의 저주를 걸기로 했다.
‘비밀을 잘 지켜줄 거라 생각하지만…… 음, 그래도 혹시나 발설하면 얘네가 위험해질걸?’
다만, 이번에 건 묵비의 저주는 예전에 크릭샤에게 얻은 스킬이 아니라 한 단계 진화한 버전이었다.
‘찾아보니 마신이 준 스킬 중에서도 상위호환 스킬이 있더라고.’
고통을 주지는 않으면서 발설은 할 수 없는 업그레이드 버전 묵비의 저주!
‘아, 가면마법사한테도 걸고 왔어야 했는데.’
사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급하게 도망치느라 생각도 못 했다.
‘아니지, 걸었으면 오히려 나를 더 의심했을지도?’
어떻게 그런 스킬을 걸었냐며 찾으러 다닐지도 모른다. 이미 보스를 리타이어 시킨 것부터 찾으러 다닐 명분은 되었지만.
“에휴. 그동안 솔라리스랑 칼리고 가입 권유도 거절했는데, 설마 가면마법사가 삘 받아서 SPES에 가입해 달라고 권유하면 어쩌나?”
이미 스카우트 제안들에 진이 빠질 정도로 된통 당한 적이 있었던 하빈. 가면마법사까지 가입해 달라고 붙잡거나 같이 던전 공략해 달라고 붙잡는다면?
“정말 큰일이지 뭐야? 휴우, 역시 자기소개할 때 좀 덜 잘난 척을 할 걸 그랬어. 역시 아이큐 187의 탐정 설정은 너무 매력적이었다!”
[……할아버지를 내기에 거는 손녀 컨셉 말이냐? 그게 왜 매력적인지 난 잘 모르겠더니만…….]
아헤자르의 말을 흘려들으며, 하빈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솔라리스라면 모를까, 가면마법사가 따라붙는 건 정말 질색인데!”
[애초에 네가 가면 벗기겠다고 겁을 주었으니 상종하기도 싫지 않겠느냐?]
헤어질 때도 ‘두고 보자, 가면마법사!’라며 선전포고까지 했던 현하빈. 하긴 그러는 상대를 굳이 귀찮게 스카웃하러 찾아오는 위인은 잘 없을 것이다.
“그래. 이제 크릭샤랑 헤어지고 라티제 케이크를 포장해 가는 일만 남았어.”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공간 안으로 들어온 하빈은 크릭샤를 마계에다 다시 던져 주었다.
“오늘 고생했어, 릭샤야.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푹 쉬렴!”
“네……. 잘 들어가십쇼.”
대답할 기운도 없는지 터덜터덜 소파를 향해 돌아가는 크릭샤. 하빈이 그를 향해 덧붙였다.
“크릭샤야! 내가 오늘은 바빠서 그런데, 다음엔 꼭 오래 들러서 이프시네도 보고, 호캉스도 즐기고 갈게! 같이 마계 관광하자!”
“…….”
‘오지 말라니까!’
크릭샤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는 바로 작별의 인사를 하려다가 한참의 고민 끝에 덧붙였다.
“……사실 이프시네 그 애가 마신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긴 합니다. 언제 한번 보고 가십쇼.”
“그래?”
하빈이 반색했다.
“대신 안부 전해줘서 고마워! 다음에 선물 사 갈게! 아이스크림이랑 맵닭볶음면이랑…… 음, 또 개껌이랑!”
그녀는 짤짤 손을 흔들며 마계로 가는 오류 입구를 닫았다. 완전히 입구가 닫힌 걸 확인한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런, 크릭샤가 힘이 없네. 다른 건 몰라도 마계 관광은 안 끌리나 봐.”
하긴, 생각해 보면 관광지에 사는 현지인들은 본인 지역이 얼마나 재밌고 멋진지 잘 모른다고 들었다.
“예전에 바닷가에 사는 친구 이바다가 그런 말을 했었지.”
‘외지인 관광객분들은 매일 오션뷰, 오션뷰를 찾으시던데 난 어렸을 때부터 매일 봐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그냥 물 천지인데 이게 뭐가 그리 좋은지.’
크릭샤에게 마계 관광은 그렇게 느껴질지도.
“음, 그럼 다음에는 공평하게 크릭샤에게도 한국 관광을 시켜줘야 좋으려나? 이번에 매점 체험은 너무 짧긴 했지.”
크릭샤는 하빈과 마주치는 것 자체가 괴로움과 스트레스일 뿐이었는데.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하빈이 ☆크릭샤 한국 관광 계획☆을 짜는 동안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꿈지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
낯선 인기척에 하빈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여전히 무지갯빛의 이공간.
크릭샤를 방금 돌려보냈으니 아헤자르를 든 하빈만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일 텐데.
이공간 너머로 조그마한 인영이 보였다.
“히익…….”
심지어 하빈과 눈이 마주치자 딸꾹질을 하기까지. 자세히 보니 그 인영은 샛노란 레몬색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인간이 맞나?’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존재였다. 사람이라기보다 어딘가의 정령이나 귀신이라고 해야 더 믿을 만한 분위기.
“……저건 뭐지? 귀신인가?”
하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동안 오류를 통해 들어온 이공간은 하빈이 아니면 다른 존재들은 들어오기 어려웠다. 이제껏 이공간에서 하빈이 데려온 사람 외의 다른 누군가를 마주친 적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놀란 건 저쪽이 더 큰 듯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여기 들어온 거지?”
“뭐래?”
잔뜩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던 레몬머리. 하빈이 그쪽으로 척척 다가가자 놀라서 하얗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오, 오지 마! 넌 뭐야! 설마 관리자가 보냈어?”
“야, 누구냐고 물을 거면 너 먼저 자기소개를 해야 할 것 아냐?”
“…….”
정곡을 찔렸는지 레몬머리가 고개를 추욱 숙였다. 하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텅 빈 무지갯빛 이공간엔 레몬머리와 현하빈밖에 없었다.
‘흠, 이 녀석은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그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이곳이 현하빈만 오갈 수 있는 이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원래 예술제 행사장으로 곧장 돌아가려던 하빈은 일단 이 레몬머리를 더 추궁해보기로 했다.
“너 뭐야? 여기 너 말고 또 너 같은 놈들 있어?”
“어, 없어요! 애초에 여긴 저 말고 들어올 수 있는 격의 존재가 없을 텐데…… 저도 정말 죽을힘 다 해서 들어온 건데…… 대체 어떻게.”
[잠깐, 현하빈. 이 녀석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든다.]
‘오, 잘잘? 넌 뭔가 알아냈냐?’
[이 녀석…… 아마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잔뜩 뜸을 들이던 아헤자르. 그리고 하빈에게 붙들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낯빛을 한 레몬머리. 침묵 끝에 아헤자르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 녀석은 성좌다.]
“엥?”
현하빈은 알 수 없는 이공간에서 지나가던 성좌를 발견했다.
* * *
“미친놈! 대체 어떻게 하루…… 아니, 두 시간만에 공략한 거야? 피데스 진짜 미쳤냐!”
마이너 패치는 그야말로 패닉 상태였다.
특히 ‘네 번째’는 공포와 두려움에 잠겨 벌벌 떨었다. 에라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더듬더듬 세 번째에게 물었다.
“이거…… 오보 아니야? 진짜로 공략된 거 맞아?”
만에 하나 잘못된 기사였다거나, 루머일 수도 있잖은가. 피데스가 우리 측에 잘못된 정보를 흘리려고 속인 걸지도.
그래야만 한다. 제발.
강태서를 제외한 모든 이가 간절함을 담아 세 번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 번째는 파리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정말로 공략된 거다. 위성 카메라로 직접 봐도 공략 완료된 것으로 보여…….”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단 하나 남은 미약한 희망마저 사라진 상황. 초조해진 마이너 패치의 인원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라타는 역정을 냈다.
“네 번째! 네가 실수한 거 아냐? 던전 등급 SSS급으로 확실하게 만들었다며!”
“마, 만들었는데……? 진짠데…….”
그녀뿐만이 아닌 모두가 네 번째를 무섭게 추궁했다.
“코딩 실수했어?”
“제작비 삥땅 쳤냐?”
“아니라고!”
위기에 몰린 네 번째가 강태서를 돌아보았다.
“첫 번째! 네, 네가 설치 밑 작업을 맡았잖아! 설치는 제대로 했어?”
강태서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남 탓하는 꼴이 우습군. 제대로 했으니까 던전이 열렸겠지.”
“…….”
네 번째가 부들부들 떨며 입을 다물었다. 저건 맞는 말이었다. 강태서가 맡은 부분은 그저 ‘설치’일 뿐. 제대로 된 제작의 전 과정은 네 번째가 맡았고, 이번 프로젝트 자체를 네 번째가 책임지고 맡았다.
“아냐, 아냐! 난 정말 제대로 만들었어. SSS급 던전이었어! 그 정도의 난이도였다고. 그걸 두 시간만에 공략할 수 있었을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덜덜덜 손을 떠는 네 번째.
“시간 끌려고 일부러 온갖 이상한 문제들도 억지로 집어넣었단 말이야! 난 정말…….”
“아, 됐고. 그래서 결과가 어떤데?”
에라타가 차갑게 네 번째의 말을 잘랐다. 여섯 번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지금…… 한국의 실시간 중계들을 모니터링 중인데요, 어, 음…….”
“그래서 몇 명이나 죽었어?”
에라타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물었다. 적어도 사상자가 일정 수치 이상 나왔다면 관리자의 분노는 덜 살 것이다. 하지만.
여섯 번째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저…… 전원 생존이라는데요?”
“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라타. 그 요란한 기립 때문에 그들은 강태서가 긴장으로 쥐었던 주먹을 몰래 푸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