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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36) (136/268)

136. Counter attack (1)

하빈은 들어가기 전부터 피데스가 보스와 싸우는 장면을 확인한 상태였다. 그녀는 문틈으로 그걸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아, 진짜 못하네.”

쾅쾅 열심히 싸우기만 할 뿐 눈알 괴물에겐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뭐 세계에서 제일 세다고 다들 엄청 추켜세우던데 의외로 별거 없잖아?”

[그러게 말이다. 분명 네아이바의 계약자라고 들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네아이바가 좀 재수 없긴 해도 할 땐 하는 녀석이니 저렇게 약할 리가 없느니라.]

“엥? 아헤자르, 네가 네아이바를 안다고? 아, 하긴 워낙 유명하긴 해.”

또 TV에서 봤겠지.

하빈의 여상한 대꾸에 아헤자르가 발끈했다.

[아니! 진짜로 아는 사이다. 저번에도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우린 친구였다!]

“흠? 그런 말을 했었나?”

[분명 말했었다!]

기억이 안 나는데. 이번에도 흘려들은 건가.

하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사실이 있다면 왜 진작 아헤자르가 강력하게 어필하지 않았던 거지? 애초에 저 말이 진실일 가능성은?

하빈의 반응이 계속 뚱하자 아헤자르가 재차 외쳤다.

[왜 안 믿는 표정이냐!]

하빈은 어깨를 으쓱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초에 둘이 어떻게 친해진 건데? 그럼 뭐…… 서로 아는 척할 수는 있어?”

[그, 그건…….]

아헤자르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잠시간의 침묵 끝에 우물쭈물 대답했다.

[아는 척하기엔…… 크흠, 뭐 서로 곤란할 일이 많아서 어렵다.]

“친구 맞아?”

[……맞을 거다, 아마.]

조금 자신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빈은 별 관심 없다는 투로 화제를 돌렸다.

“뭐, 그건 됐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어쨌든 저기에 하필이면 가면마법사가 선수를 치고 있잖아?”

하빈이 문틈을 노려보았다. 쓸데없이 보스도 먼저 찾아서 여기 먼저 온 행동력 좋은 피데스.

“그럼 내가 보스를 족치려고 해도, 가면마법사가 멀쩡히 눈 다 뜨고 보고 있을 거 아냐?”

하빈은 여전히 보스와 대치 중인 피데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아 진짜. 저 인간은 왜 저렇게 걸리적거리게 서 있고 난리람? 저러면 내가 완전범죄가 안 되잖아!”

피데스만 없었으면 사람들 눈을 피해 하빈 혼자 몰래 슥삭 보스 목을 따고 나오면 됐을 텐데 말이다. 저 녀석이 멀쩡히 눈 뜨고 있어서 그게 참 어렵게 되었다. 아헤자르가 도움을 주려는 듯 조언했다.

[아! 하지만 우리에겐 그게 있었지 않느냐? 수면 향!]

저번에 코니의 수면 향을 써서 사람들을 슥삭 재워 버렸던 전적이 있는 현하빈. 이번에도 피데스를 재워 버리고 슥삭 보스 목을 따면 되는 거 아니냐는 제안이었다.

하빈은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솔직히 수면 향이 저 마법사한테도 통할지는 미지수야.’

저번에 확인해 본 결과 수면 향은 A급의 상위 랭커도 재울 수 있다. 그러나 피데스는 현존 최고의 마법사. 아무리 코니 할머니의 특제 아이템이라지만 피데스의 능력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저 정도 경지의 마법사라면 수면 효과 정도쯤은 손쉽게 견뎌낼 것이다. 잘못하면 수상하다고 어그로나 더 끌지도.

[그럼 어찌할 것이냐? 저대로 두면 안 된다!]

아헤자르가 보기에 저 상황은 피데스에게 꽤 불리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지금 피데스의 공격이 보스에게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고전하고 있는 모양. 아헤자르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도와줘야 한다! 저러다 저 인간이 죽으면 어찌 하느냐?]

‘아, 김잘잘은 맨날 누구 돕는 거 좋아해. 너 예전에도 이리저리 다 돕고 다녔지?’

[흠? 나를 찾는 자들이 많긴 했다. 이 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공식 호구였나 보네.’

[고, 공식 호구라니! 다들 이 몸을 찬양하고 칭송했느니라!]

“그래그래. 알겠고.”

[어쨌든 피데스라는 인간이 인류의 희망? 뭐 그런 자라고 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지금은 우리와 같은 목적이니 도와주는 게 맞다!]

지금 보스를 죽이기 위해 사투하는 것도 학생들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보스를 죽여야 하빈의 해피 저녁이 보장된다. 하빈은 팔짱을 끼며 고민했다.

“그럼 뭐, 나도 맞가면이나 써볼까?”

매번 느끼지만 가면마법사만 가면 쓰는 건 정말 불합리한 일이었다!

“본인만 프라이버시 지키고 정말. 나는 뭐 사생활 없는 줄 아나?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도 가면 쓸 수 있거든!”

하빈은 톡톡 자신의 얼굴을 건드렸다. 지난번 마왕성에서 썼던 가면과 다른 모양의 가면이 그녀의 얼굴 위로 스르륵 나타났다. 하빈이 문틈으로 피데스의 모습을 지켜보며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저 꼴 되게 지켜보기 힘들었어.”

[힘들다니?]

“예에전에 어렸을 때 누가 게임 막혀서 못 하고 있을 때 딱 이런 답답함이 들었었는데.”

어렸을 때 오빠의 게임 화면을 자주 훔쳐보던 현하빈. 그녀는 오빠가 게임 하다가 잘못하고 있을 때마다 쓸데없이 과몰입하곤 했다.

‘하. 저기서 점프를 했어야지! 개못하네!’

‘그럼 네가 해보든가!’

‘엥, 내가 왜? 난 시험 공부해야 하는데.’

‘그럼 왜 여기서 이걸 보고 있냐?’

‘원래 시험 기간 땐 뭐든 다 재밌다고. 오죽하면 남의 게임 화면까지 보고 있겠어?’

“……이상하게 딱 그때가 생각난단 말이지.”

그래서 묘한 오지랖이 발동한달까. 하빈은 흐음, 하고 몇 초 더 고민한 뒤 결론을 내렸다.

‘좋아 일단 들어가 보자.’

가면으로 꼼꼼히 얼굴이 가려진 걸 확인한 하빈은 마침내 문을 확 열어젖혔다.

“……도서부는 아니지만, 어쨌든 전직 도서부원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드디어 대치한 피데스, 보스, 그리고 현하빈.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 피데스는 하빈을 발견하자마자 중얼거렸다.

“현하빈……?”

“……!”

하빈의 이름을 정확히 부른 피데스. 전혀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하빈은 주춤했다.

‘앗. 대체 어떻게 알았지?’

[…….]

* * *

“혀……나빈? 그게 누굴까? 전혀 모르겠네!”

“…….”

아까부터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하빈의 태도. 심지어 본인 이름까지 못 알아들은 척 구는 꼴이란. 네아이바도 거들었다.

[저게 더 수상하잖아? 연기 왜 저래?]

‘빼박이네.’

평소에는 연기 엄청 잘 하다가도 가끔 고장 난다니까. 특히 몰컴하다 들켰을 때 제일 허술했던 현하빈. 시우는 그 특유의 반응을 익히 알았기에 더더욱 확신했지만, 일단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냥 속아줍시다.’

[왜? 어차피 교장인데 학생 정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둘러대도 이상하지 않잖아?]

‘아뇨, 모르는 척하는 게 백배 낫습니다.’

[왜?]

현시우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저희는 지금 교장과 학생의 관계니까요. 서로 정체 모른 채 존댓말 쓰면 진짜 오글거린다니까?’

[그게 진짜 그 정도로 중요할 문제냐?!]

‘당연히 그렇습니다. 네아이바는 형제자매 있어본 적 없죠?’

[어, 없지…….]

‘이거 봐요, 없으니까 이 모양인 겁니다.’

[너 저번부터 날 자꾸 무시하는데, 자꾸 나한테 이러면……!]

“흠흠.”

네아이바가 발끈하던 순간, 하빈이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흠칫하며 하빈 쪽을 돌아보았다. 네아이바와 피데스의 주목을 모은 하빈이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흠, 크흠, 어쨌든! 나는 지나가다 도서관에 들른 평범한 주민인데. 어쩔 수 없이 보스 레이드에 껴야겠네!”

“…….”

[…….]

지나가는 평범한 주민 좋아하네. 저게 말이 되는 소리냐.

물론 울림국제고 도서관은 외부인도 종종 방문하는 명물인 건 맞다. 그래서 앞부분은 쪼오금 말이 되었다. 지나가는 평범한 주민이 굳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 건 좀 이상하다고 태클 걸 수 있겠지만 거기까진 이해한단 거다.

‘근데 보스 레이드를 저렇게 하루 일과 말하듯이 말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쟤는 정체 숨길 의지가 있기는 한 거냐?]

네아이바가 고래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어쩐다? 넌 어쩔래?]

“당연히…….”

현시우는 잠깐 멈칫했다.

원래의 ‘피데스’라면 정중하게 말해서 시민을 대피소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게 상식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상대는 현하빈이다.

‘그럼 뭐 당연히 땡큐지!’

이러다 까닥하면 다 죽게 생겼는데 혈육 손이라도 빌려야 될 판 아닌가? 자진해서 도와준다는데 뭐. 현시우는 하빈의 컨셉이 깨지기 전에 얼른 말을 받았다.

“아……하. 내가 잘못 봤나 보다.”

“그치! 나는 지나가던 주민이라고!”

“크흠, 그렇지. 여긴 도서관이니까. 지나가던 주민이 있을 수 있지.”

그야말로 교과서를 읽는 급의 급조한 대사. 심지어 현시우는 하빈에게 존댓말 쓰기 싫어서 평소 같은 존댓말도 안 썼다. 기괴할 정도로 부조리한 두 남매의 발연기에 이마를 짚는 건 지켜보던 네아이바였다.

[야, 씨. 내가 현하빈 연기 별로라는 이야기 취소한다. 네가 더 발연기다 임마! 아하학!]

‘제발 조용히 해주시죠.’

[너 SPES 활동할 때랑 하빈이한테 아헤자르 전해줄 땐 연기 겁나 잘하더니, 왜 갑자기 발연기가 됐냐?]

‘하…….’

현시우는 대꾸 없이 보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어떻게 현하빈 없이 보스를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던 차였다.

‘딱 하나 단서를 찾긴 했는데 그것조차 답이 없었어.’

현시우는 고개를 돌려 알림창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사이 보스를 공략할 첫 번째 수수께끼를 찾았다.

-경고! 권한이 없습니다. 수수께끼를 풀고 단서를 모두 모으시오.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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