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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34) (134/268)

134. 이래서 비상대피 교육이 중요하다니까 (1)

보스 소환 알림이라.

“……흐음, 그래. 그런 알림이 뜨긴 했지.”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들은 2분 전에 그런 알림을 받았었다.

-경고! 진 보스 꿰뚥렉-우레아랅의 소환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스의 공격에 대비하세요!

그런 알림창을 말이다.

하지만 알림에도 불구하고 바깥은 잠잠했다. 창문으로 밖을 보아하니 운동장에 어슬렁거리는 몬스터들이 있을 뿐 사람들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별일 없는데?”

“다들 지하대피소에 숨어 있을 거야.”

사람들이 없는 이유는 모두 대피소로 미리 피했기 때문이다. 그건 현시우의 안배 덕분이었다. 서윤이 학교의 대피소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하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엥? 지하대피소? 우리 학교에 그런 게 있었어?”

“아, 안전교육 때 안내됐는데? 그…… 학교에서 여러 번 조례 시간에 알려 줬었어. 기숙사에서도 따로 교육했었고.”

“그래?”

왜 못 들었지? 혹시 그때 졸았나?

[당연히 졸았느니라!]

아헤자르가 증언했다. 평소 하빈은 조례 시간에 자는 게 일상이었다. 학교에서 하는 안전교육을 여러 번 땡땡이쳤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인물. 아마도 그래서 하나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빈은 잠잠한 바깥을 확인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흠, 뭐 어쨌든 덕분에 보스가 나타나도 별일 없네. 그럼 우리 이거 마저 먹고 가자.”

하빈이 뜯어 놓은 간식들을 손짓했다. 컵라면, 아이스크림, 과자, 빵 등등 매점에 있는 간식을 종류별로 풍성하게 뜯어 놓은 상태였다. 하빈이 당장 먹을 걸 생각하니 무척 신이 나는 듯,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보스든 뭐든, 자고로 밥심이 제일 중요하지. 싸우다가 배가 고프면 어떡해? 게다가 난 점심도 제대로 못 먹고 왔단 말이야.”

그랬다. 원래는 시사회를 관람하고 늦은 점심을 먹는 게 원래의 일정. 지금 뛰어온 하빈은 점심도 못 먹어 배가 무척 고팠다.

끄응, 하고 한숨을 쉰 하빈이 슬렁슬렁 마저 빵 봉지를 뜯었다.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서윤에게 조언했다.

“자, 일단 다들 내 말 잘 들어. 지금은 맛있게 매점을 털자! 보스와의 밀당도 중요해. 처음부터 관심을 막 주면 안 된다구.”

“보스랑…… 밀당?”

“응. 애초에 우린 보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먼저 쳐들어가기보단 저쪽이 안달복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그러니 보스가 소환되든 말든 알 게 뭐람? 일단 모른 척 하자!

하빈은 옆에 있는 컵라면 젓가락도 마저 똑! 하고 뜯었다. 그녀가 컵라면 젓가락을 친절하게 나눠주며 말을 끝맺었다.

“일단 먹자! 먹고 생각해!”

전력이 나갔지만 뜨거운 물은 정수기에 아직 안 식고 남아 있었기에 그들은 컵라면을 만들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몬스터들의 울음소리와, 시커먼 하늘. 그 와중에도 매점 안에는 피크닉 기운이 물씬 풍겼다.

크림빵을 조금 뜯어 먹는 서윤, 구슬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파먹는 하빈. 한편 크릭샤는 호기심에 맵닭볶음면을 먹었다가 펑펑 울어야만 했다.

“이, 이게 대체, 대체 무슨 맛으로……! 이번에도 절 놀리신 것입죠? 이게 어떻게 먹는 거란 말입니까!”

크릭샤의 눈물을 발견한 서윤이 당황해서 곁에 있던 티슈를 건넸다.

“으앗, 언니! 이분은 외국인이셔서 매운 거 잘 못 드시나 봐!”

“에휴, 역시 마… 아니랄까 봐. 릭샤야, 이거라도 먹어.”

마족 아니랄까 봐, 하는 말을 삼킨 하빈이 선심 쓴다는 표정으로 쌓아놓은 구슬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건넸다.

“자, 이거 달달하고 차가워서 열 식히는 게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매웠나……?”

서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남은 맵닭볶음면을 한 젓가락 맛보았다. 아무 표정 변화 없이 잘 먹는 서윤의 얼굴을 보며 크릭샤는 벙쪘다.

“아, 아가씨는…… 그 극독 음식을…… 왜 이렇게 잘 드십니까?”

“네?”

“서윤이가 매운 걸 잘 먹긴 해.”

평소 하빈과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때도 욥떡 같은 걸 잘 먹었던 서윤이다. 그걸 떠올린 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매운맛에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오랜만에 누가 생각나네.’

마음에 안 들던 꼰대 선배.

다음에 불러서 본때를 보여 줘야 할까? 하빈이 손가락에 낀 반지를 흘깃거리는 동안이었다.

크릭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여, 역시 마신님의 고향……. 약한 인간마저도 저런 능력을 가지고 있군.’

고개를 깊게 끄덕인 크릭샤가 머뭇머뭇 아이스크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구슬 아이스크림은 아쉽게도 냉동 장치의 전력이 나가는 바람에 조금 녹아 있었다. 그러나 알알이 구슬처럼 분리된 모습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이건……?”

구슬 아이스크림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크릭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차가운 걸 보니 얼음입니까? 하지만 생긴 것이 워낙 독특하여…….”

하빈은 서윤에게 안 보이도록 입을 뻥긋했다.

‘엥. 마계에는 아이스크림 없어?’

‘아이스크림?’

크릭샤의 의아하단 반응. 그걸 본 하빈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마계는 굉장히 척박한 땅이었는데. 일단 냉장유통 시스템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얼음 얼리는 마법은 있을 것 아냐?’

‘얼음 얼리는 건 가끔 합니다만. 그 얼음으로 딱히 다양한 요리를 하진 않습니다.’

저런, 안 됐군! 하빈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우유빙수도 있고 초코맛, 딸기맛, 콜라맛 아이스크림까지 엄청 다양한데! 그걸 못 먹고 산다니 참 아쉬운 삶이야!’

구슬처럼 된 것도 있고 눈처럼 된 것도 있고 뿔 모양이나 그런 것도 있고!

‘호오……. 마계에 돌아간다면 연구해 봐야겠군요.’

크릭샤가 서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을 벙긋하며 대화를 마쳤다. 잠깐 대화에서 소외된 서윤을 위해 하빈이 화제를 돌렸다.

“흠흠, 어쨌든 아이스크림 종류 말하다 보니 아까 붸라랑 솔빙 못 사온 게 너무 아른거리네.”

이게 다 이 망할 던전 때문이잖아.

덕분에 시사회는 다 보지도 못한 채 온 데다, 저녁 계획까지 일그러지게 생겼다! 하빈이 젓가락을 들어 저 멀리 창밖을 휙 가리켰다.

“안 되지, 안 돼! 오늘 저녁엔 꼭 둘 중 하나는 시켜 먹어야겠어.”

“붸라랑 솔빙을? 오늘 시킨다고?”

서윤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SSS급 던전이 어떻게 반나절만에 공략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아이스크림은 지금도 먹고 있잖아…….”

“아, 서윤이는 아이스크림 질려? 그럼 메뉴를 라티제 케이크로 바꿀까? 원래 배우님들 사인 보면서 덕톡하려던 게 오늘 일과였는데……. 지금 보스 족치면 오늘 저녁엔 시켜먹을 수 있겠지?”

하빈이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 오후 한 시니까, 넉넉잡아 두 시까지 던전을 깨면 시간 여유가 한참 남는다. 하빈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이었다.

[좋은 생각이니라! 당장 보스를 잡자! 잡으러 가자!]

아헤자르가 신이 나서 하빈을 재촉했다.

[드디어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보스를 때려잡고 학생들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고 의외의 인물이 초를 쳤다.

“어, 언니 아무리 그래도 보스를 어떻게 잡아? 여긴 SSS급 던전이라고.”

“아, 맞다. 그랬지?”

하빈을 붙잡은 건 여서윤이였다. 그녀가 심각한 목소리로 걱정을 늘어놓았다.

“으응……. 언니가 아무리 A급 헌터라고 해도, 그, 코니님의 무기가 있어도…… SSS급 보스는 위험할 거야.”

서윤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하빈을 만류했다. 덕분에 하빈은 자신의 컨셉을 떠올렸다.

‘아차. 나 A급 헌터라고 사기 쳤었지.’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지 뭐람. 확실히 A급 헌터 혼자 단신으로 보스를 족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했다. 하빈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서윤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연히 내가 안 잡지. 내 말은 우리 교장쌤이 알아서 잡아 주실 거란 이야기란다!”

“아, 맞다. 피데스 님!”

서윤이 눈을 빛냈다.

“언니, 그러고 보니 피데스 님이 던전 중간 보스도 잡으셨던 것 같아! 던전 공략하려고 애쓰시나 봐.”

“오, 그래?”

“학생들 대피하라는 방송도 했어!”

“오……?”

가면마법사, 꽤 일을 잘 했네?

‘이대로 놔두면 가면마법사가 알아서 잡는 거 아냐?’

하빈은 아주 잠깐 피데스한테 보스를 맡겨볼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영 믿음이 안 가느냐?]

‘응.’

그 가면마법사, 일단 오늘 안에 못 끝낼 것 같아.

오늘 안에 못 끝내면?

오늘 안에 간식도 못 먹는단 거지.

하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릭샤. 잘 들어. 지금부터는 찢어진다.”

“예?”

아이스크림을 퍼먹던 크릭샤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하빈이 휙휙 손짓했다.

“넌 서윤이랑 같이 학생들을 구하고, 난 교장선생님을 도우러 가볼게!”

“어, 언니? 교장선생님을 어떻게 도와?”

서윤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빈은 대충 손을 휘휘 저었다.

“내가 다아, 교장한테 몰래 받은 부탁이 있어서 그래. 어쩔 수 없이 가봐야겠다!”

“그래……?”

현하빈은 A급 헌터에 코니 님과 솔라리스, 칼리고와 친분이 있다. 그럼 피데스와 나눈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다. 서윤이 보기에 그 변명이 꽤 그럴듯했다. 서윤은 일단 눈치를 살피며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크릭샤가 하빈을 붙잡았다.

“저, 저를 두고 가신다고요? 이 아가씨랑? 단둘이?”

“왜? 김릭샤는 해주해야 할 애들 아직 한참 남았잖아? 던전 무너지기 전에 다 끝내놔야지.”

던전이 무너지고 나면 크릭샤는 숨어야 하니까 말이다. 신원이 보증되지 않은 마족 김릭샤는 던전 안에서만 은밀히 활동해야 하는 존재.

던전이 다 풀리고 사람들이 몰린 와중에도 버젓이 학생들의 저주를 풀어주고 다닌다? 그러다가 마족인 거 들키기라도 하면 낭패다.

“……크흠, 알겠습니다.”

그 뜻을 알아차린 크릭샤가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비은 이번엔 서윤을 돌아보았다.

“서윤이는 얘한테 길 안내, 할 수 있겠어?”

“무…… 물론이지.”

서윤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느끼고 있었다. F급인 그녀지만, 그런 그녀라도 학생들을 구할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 이거라면 어떻게든 해내고 말 것이다. 둘의 동의를 얻은 하빈은 즐거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됐네. 난 그럼 가볼게. 둘 다 파이팅!”

해맑은 목소리로 외친 하빈. 그녀는 평소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매점의 쓰레기들을 착실하게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그리고 손을 탈탈 털고 돌아서려다 멈칫했다.

‘앗. 근데 보스 족치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하빈은 보스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 * *

한편, 학교를 뒤지며 보스의 소재를 찾던 현시우.

‘남은 건 역시 이곳뿐인가.’

웅장한 건물 앞에 선 현시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남은 건물은 도서관뿐이었다.

높다란 원목 양 문에 그가 손을 올리려던 때였다. 옆에 있는 창문에서 희미한 신음이 들렸다.

“대학원생 살려, 대학원생 살려!”

“……!”

구조 요청인 모양이었다. 현시우가 그쪽 창문 틈을 슬쩍 보았다. 퀭한 얼굴을 한 대학원생들이 현시우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살려 주세요! 여기 대학원생이 있어요!”

“대학원생 살려, 대학원생 살려!”

[왜 ‘사람 살려’라고 안 하고 ‘대학원생 살려’라고 하는 거냐?]

‘그러게요?’

잠깐의 의문이 스쳤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현시우는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직 몬스터들에게 안 당하신 모양이군요.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대학원생들은 미소를 지었다.

“후후, 이 정도 위험은 대학원생에게 아무것도 아니죠.”

“맞아요. 방독면 안 쓰고 독가스 다룬 적도 있는걸. 이 정도 비상대피쯤이야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어요.”

“헤헤, 교수님만 아니면 돼.”

“졸업 못 한단 소리만 아니면 돼.”

웃으면서 서로 티키타카를 주고받던 그들이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표정이 굳었다.

“여, 역시 졸업도 못 하고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지금 제 연구실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같은 졸논이 있어요.”

“빨리 저희를 구해줘요!”

“대학원생 살려, 대학원생 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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