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솔직히 불금에 이러는 건 너무했잖아 (6)
“격이 떨어진다고?”
“이건…….”
서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가 하빈의 귀에만 대고 소곤소곤 말했다.
“저주를 살펴보면, 이름은 ‘악마의 저주’랍시고 설명을 붙였는데, 사실 마족들이 쓰는 저주 계열은 아닙니다. 그저 그걸 좀 어설프게 따라한 것입죠.”
“흐음?”
“누가 일부러 짜깁기해 창조해 낸 주술 같은데…….”
크릭샤의 심각한 목소리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릭샤는 못 풀어?”
그래서 풀 수 있냐고, 없냐고!
“그건…….”
어쩐지 마왕의 자존심을 건드려진 기분에 크릭샤는 생각할 것도 없이 냉큼 대답했다.
“다, 당연히 풀 수 있습니다! 아까 쉽다고 말했잖습니까! 이것 보십쇼!”
크릭샤의 손길이 제희를 한 번 스쳤다. 그러자 그의 팔에서 새까만 기운이 스르륵, 완벽하게 가셨다.
“오, 완전 빨라!”
“대단해요!”
[꽤 하는군!]
모두 감탄의 한마디를 던졌다. 크릭샤의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큼, 뭐 이 정도쯤이야 마…… 마법 주술을 좀 한다 하면, 뭐. 크흠!”
실수로 ‘마왕이라면 이 정도쯤은 한다’고 할 뻔한 것을 얼버무린 그가 뿌듯한 헛기침을 뱉었다.
‘이렇게 쉬운 걸 시키다니, 다행이군.’
다짜고짜 끌고 와서 또 뭔가 하고 걱정했었는데, 의외로 별일이 아니었다. 크릭샤는 홀가분한 얼굴로 물었다.
“헤헤, 그럼 전 이만 가보면 되겠죠?”
이제 마저 귀가하고 싶었다. 벌써부터 그를 보면 벌벌 떠는 마족들과 아늑한 집무실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하빈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지금부터 시작인데?”
“……넵? 왜죠? 방금 제가 이 인간을 고쳤잖습니까!”
크릭샤가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빈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딜 가려고? 밖에 이런 애들 더 있어.”
“예……?”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는 크릭샤에게, 하빈이 창밖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어슬렁어슬렁 운동장을 배회하는 몬스터들이 우루루 보였다.
-끼에에엑!
-끼요오옥!
어두워진 하늘과 몬스터들의 흉포한 울부짖음, 침묵에 잠긴 학교.
“지금 상황이 저 모양이라서 말이야. 여기 건물이랑 저쪽 건물까지 희생자가 꽤 될 거야.”
“그, 그 말씀은 설마…….”
크릭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저 말에 담긴 뜻 정도는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빈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응! 희생자들이 걸린 저주, 크릭샤면 간단하게 해주 가능하지? 아까 쉽댔잖아.”
“쉬, 쉬운 건 맞지만…….”
“그럼 가자! 빨리 다 풀고 가라고!”
“……그건!”
크릭샤가 주춤 물러설 때였다. 뒤에 있던 서윤도 거들었다.
“와! 김릭샤 님 감사해요!”
“아, 아니 난, 저는!”
“김릭샤, 잘 해내면 맵닭볶음면 사줄게!”
“저 그거 필요없……!”
“가자!”
말이 통하지 않는 하빈의 태도. 결국 크릭샤는 서윤과 하빈에게 질질 끌려 기숙사 건물을 돌아야만 했다.
* * *
“얍!”
-끼오오옥!
털썩.
하빈의 행진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나는 곳마다 몬스터들이 그들에게 달려들었지만, 하빈은 대충 그들을 툭툭 치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처리해 버렸다. 크릭샤 역시 몬스터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기나 했다.
“흠, 정말 성가신 놈들이군요. 감히 우리 마…….”
‘마신님의 앞길을 막다니!’라고 외치려던 크릭샤는 하빈의 눈치를 보며 말을 바꾸었다.
“마……마법사님께!”
“하빈 언니는 검사인데요?”
서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빈은 태평한 얼굴로 그 말을 정정했다.
“아냐, 서윤아. 나는 마검사 클래스라구!”
하빈의 클래스는 어쨌든 표면적으로 마검사. 예전에 현시우에게 본인 직업명은 좀 외우고 다니라는 핀잔을 들은 뒤로 하빈은 절대 그걸 까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음.”
‘마법 쓴 것 같진 않았는데…….’
이리저리 몬스터한테 검집으로 뒤통수만 갈기고 있는데 그 공격 하나하나가 말도 안 되게 위력적이다. 하빈은 서윤을 향해 ‘쉿’하는 제스처를 지어 보였다.
“서윤아 실은…… 이건 비밀인데, 사실 코니 할머니께서 주신 겁집이 무지막지하게 센 거거든.”
“우와……. 역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검집이라서 이렇게 세다는 게 들키면 곤란해.”
“그, 그렇구나!”
서윤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크릭샤가 서윤을 건너다보며 하빈에게 속닥였다. 간신배를 떠올리게 할 음흉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마신님, 귀찮게 저 인간은 왜 달고 오신 겁니까?’
그들은 제희는 기숙사 방에 놔두고, 서윤만 데려온 참이었다. 어차피 송제희는 기절한 상태라 눈을 뜨지 않아 선택지가 없긴 했다. 그들은 기숙사 방 안에 눕혀놓은 뒤, 방어 아이템 몇 개 더 둘러주고 왔다.
하지만 서윤은 이렇게 데리고 다니는 중이다. 그게 꽤 의아하게 보인 모양이었다. 하빈은 당연한 거 아니냔 표정을 지었다.
‘길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난 이 던전 처음이라구.’
서윤은 던전이 열릴 때부터 학교에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몬스터들의 양상과 던전의 흐름을 다 지켜보았으며, 기숙사 방으로 대피하기까지 다른 학생들이 어디서 어떻게 희생당했는지도 봐왔다. 또한 평소 학교생활을 착실히 한 덕에 학교 자체에 대해서 아는 것도 많았다.
“언니, 저쪽에 쓰러진 학생 두 명이 더 있었어요!”
“응? 그래? 그럼 가랏, 김릭샤! 저주 해주!”
“…….”
“빨리해야지, ‘릭샤릭샤’!”
“설마 제가 릭샤릭샤라고 외쳐야 하는 건 아닙죠?”
“응? 하면 좋지.”
“진짜요?”
이처럼, 저주 해주에 충실했던 크릭샤와 더불어, 서윤 또한 안내 역할에 충실했다.
“언니! 이쪽 구름다리로 가면 몬스터를 마주치지 않고 별관으로 건너갈 수 있어요!”
“저쪽은 포션 제조실인데 오늘 이쪽에 수업이 있다고 들었어요! 안전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기존 학생들이나 사람들이 대피하려고 모여 있을지도 몰라요.”
서윤은 꽤 좋은 파트너였다. 겁먹어서 전진을 못 한다거나, 무모하게 나서서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지도 않았다. 딱딱 필요한 정보만 알려주며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유용하면 유용했지, 발목 잡을 일은 절대 없었단 것이다.
‘게다가 수틀리면 묵비의 저주도 있으니 입막음 해버리면 된다구.’
걱정 없는 쾌속 전진!
그렇게 그들은 수많은 교실을 지나 학교 매점까지 편안하게 도착했다.
‘이, 이거 꿈은 아니지?’
너무 긴장감이 없어서 서윤은 눈을 깜빡였다. 이 김릭샤라는 사람과 하빈 언니는 몬스터 따위에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앗! 미안해 서윤아. 생각해 보니 내가 급하게 오느라 붸라 아이스크림을 못 사왔어.”
“그, 그건 괜찮아!”
“지금쯤 여기서 먹으면 딱인데…… 앗, 혹시 솔빙이 낫니? 붸라 말고 솔빙을 시켜 먹을까, 나중에?”
“…….”
-끄오오오!
그 순간 달려드는 몬스터가 있었지만 하빈은 여상한 얼굴로 퍽, 몬스터를 검집으로 때렸다.
콰직!
-끄……옭.
몬스터는 처참하게 저 복도 반대편 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하빈이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 기껏 매점 왔는데 입맛 떨어지게.”
매점에 있던 몬스터를 깡그리 해치운 하빈. 그녀가 매점 앞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했다.
“자, 릭샤도 수고했어. 여기서 좀 쉬었다 가자.”
“…….”
털레털레 걸어가 말없이 의자에 앉는 크릭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정말 많은 학생의 저주를 풀어야만 했다. 항상 마왕성 옥좌에 앉아 손만 까닥이던 그로서는 간만에 과도한 업무량이었을 터다.
멍하니 자리에 앉은 서윤과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크릭샤.
그 꼴이 좀 애처로워 보였던지, 하빈이 짐짓 상냥한 말투로 크릭샤에게 물었다.
“크릭샤 너도 배고프지? 매점 좀 털까?”
하빈이 신이 난 눈으로 매점을 돌아보았다. 원래 재난 영화나 소설에서도 사건이 터지면 식료품점을 점거하는 게 국룰이다! 식량이란 게 그만큼 중요한 요소니까.
하빈은 벌써 매점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간식을 고르고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초코롤이랑 앙버터는 벌써 나갔나? 오오, 다행히 초코롤이 남아있네.”
하빈은 음료수 칸, 과자 칸, 빵, 라면 칸, 냉장고와 냉동고를 가리지 않고 살폈다. 전혀 재난 상황 같지도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재난을 마주한 생존자의 마음으로 진지하게 매점을 털었다.
“레어 그릴스가 그랬어. 간식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고.”
“언니, 지금 들고 있는 거 빵인데. 그건 탄수화물…….”
“쓰읍! 어쨌든 지금은 모두 내 점심이란 거지.”
서윤의 말을 자연스럽게 막은 하빈이 마저 냉동고를 살폈다. 냉동고에서 뭔가를 발견한 하빈이 눈을 빛냈다.
“엇, 디핀더트 아이스크림이 종류별로 다 한 가지씩 있어! 여기 희귀한 맛도 있다! 애플망고요거트맛? 이거 저번에 다 팔렸다고 못 먹은 건데!”
지금이 바로 절호의 찬스나 다름없었다. 하빈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애플망고 구슬아이스크림을 슬쩍슬쩍 품으로 빼내 왔다.
“그, 그렇게 많이 가져가도 돼?”
하빈이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전기가 다 나갔잖아? 냉장고 꺼져서 오래 못 갈 텐데 나라도 가져가는 게 낫지. 흐음, 이 정도면 가격이 얼마일까? 다 합쳐서 삼만칠천 원? 현금으로 일단 넣어둬야겠다.”
던전이 열린 와중에 계산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냐 싶지만 하빈은 양심과 준법에 철저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매점 사장님의 손에 꼬옥 삼만 칠천 원을 쥐여 드린 하빈이 고개를 돌렸다.
“서윤이랑 김릭샤도 힘들었지? 자, 여기 김릭샤를 위한 선물!”
하빈이 쑤욱 크릭샤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새카만 바탕의 뚜껑에 온갖 경고 문구가 새겨진 특별한 라면.
바로, 맵닭볶음면이었다.
“이, 이게 뭡니까?”
어딘가 위험한 기분이 드는 포장지에 크릭샤가 주춤했다. 하빈이 설명했다.
“네가 저번에 물어본 그 소스, 그거 갖고 싶다며? 이게 바로 그 소스로 만든 라면이야.”
“이걸…… 먹는다굽쇼? 그때 그건 마신의 비법이 담긴 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신의 비법이 담긴 독?”
이야기를 듣던 서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그냥 맵닭볶음면인데…….’
둘이서 괴상한 표정을 짓는 동안, 하빈이 생긋 웃으며 맵닭볶음면 뚜껑을 뜯었다. 생소한 컵라면 용기의 모습에, 크릭샤가 미심쩍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 그리고 저번에 본 거랑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요? 통이…….”
“여기 들어있는 소스가 같은 소스야. 한번 맡아 봐.”
하빈이 새카만 소스 봉지를 뜯어 크릭샤의 코 밑에 댔다. 그 순간 매콤하고 알싸한 향이 크릭샤의 콧속을 강타했다.
“……커헉!”
“봐봐, 찐이라구!”
“이, 이건…… 이걸 왜 이런 곳에서!”
크릭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평범한 식료품점인 줄 알았는데 이런 비기를 밀매하고 있었나. 크릭샤가 심각한 얼굴로 소스 봉지를 이리저리 살필 때였다. 곁에 있던 서윤이 하빈의 소매를 잡았다.
“저, 언니. 그런데 우리 이렇게 태평하게 먹고 있어도 될까?”
“음?”
하빈은 초코롤을 먹다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자신의 몫으로 쥐여진 과자를 뜯지 않고 우물쭈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에 알림도 떴잖아.”
“무슨 알림?”
서윤이 꿀꺽, 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스 소환되었다는 알림. 방금 전에 떴는걸.”
그랬다. 그들은 지금 이 던전의 진 보스-최종 보스가 방금 소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