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솔직히 불금에 이러는 건 너무했잖아 (5)
교만의 마왕 크릭샤는 그동안 마계에서 무척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하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왕님께서 행차하신다!”
“마왕님!”
마계에서 크릭샤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크릭샤가 가는 길마다 마족들이 와글와글 모여 그를 축복했다. 지성이 있는 마족은 물론 본능적으로 위축되어 고개를 수그리는 마수들까지. 모두 크릭샤의 발아래 있었다.
“크흐흐, 이게 바로 사는 맛이지!”
이제 걸리적거리는 다른 마왕들을 다 처리해서, 실질적인 1인자는 크릭샤나 다름없었다. 하빈이 돌아가자마자 내친김에 사병들이랑 영지도 싹 다 정리해서 꿀꺽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래, 계획을 세웠다. 계획만.
방해하는 이 때문에 그 계획이 다 어그러진 게 문제였다.
“네? 크릭샤 혼자 이 땅을 다 가진다고요? 안 되죠!”
“뭐야? 또 뭐가 문제야?”
크릭샤는 툴툴거리며 맞은편의 분홍 머리 마족을 노려보았다. 상대는 이제 몽마들의 수장 자리를 꿰차고 새로운 마왕의 자리에 오른 그녀.
몽환(夢幻)의 마왕 이프시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크릭샤의 원대한 계획에 초를 쳤다.
“이 땅은 전부 우리 마신님이 가지셔야죠! 애초에 마계를 구한 분이 누구신데!”
이프시네가 지도에 있는 영지들을 손으로 쭉 훑으며 큰소리를 쳤다. 그녀는 다른 마왕들이 가졌던 영토와 군대를 전부 마신님께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릭샤로서는 통탄할 일이었다.
‘저 광신도 같으니! 이 아까운 땅들을 다 마신님의 것으로 바치면 어떡해!’
이제 마신도 본인 집에 가고 없겠다, 저 중에서 조금만 꿀꺽해도 아마 모를 텐데.
“크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만일 크릭샤가 이프시네에게 ‘야,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끼리 꿀꺽해.’ 따위의 말을 했다간 저 마신바라기 이프시네 녀석이 쪼르르 일러바칠지도 모르니까.
“죽일 수도 없고…….”
이프시네를 죽이기엔 하필 그녀를 따르는 약소 마족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 이프시네 님! 역시 잘 되실 줄 알았어요!”
“저희가 목숨 바쳐 보좌하겠습니다!”
약소 마족들의 능력은 하찮지만 방심할 수 없기도 했다. 공격하는 것에는 약할지 몰라도 숨는 것과 염탐하는 것에는 도가 튼 놈들. 만약 크릭샤가 이프시네를 몰래 죽인다면? 이들이 가만있지 않고 숨었다가 다음에 마신이 방문하면 다 일러바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연히 이 모든 토지는 마신님께 돌아가야 하오!”
“우리 마신님께서 마계를 구하셨는데 당연한 것 아닙니까?”
“크릭샤 님은 마신님을 존경하지 않으시나보군요!”
그날, 마왕성에 있었던 대부분의 존재들이 마신의 편으로 돌아섰다.
때문에 그들의 의견도 시종일관 ‘마신님이 다 가져!’에 가까웠다. 오히려 크릭샤를 향해 마신님을 따르지 않냐고 역으로 대들기까지.
크릭샤로서는 어이가 가출할 일이었다.
“이것들은 겁을 상실했나?”
항상 크릭샤의 눈치를 보느라 의견 하나 제대로 못 펴던 놈들이, 마신 한 번 봤다고 줄을 죄다 갈아타다니!
‘아주 대단한 신도들 납셨어.’
“크흠, 흠.”
크릭샤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마왕의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마왕의 자리는 겪으면 볼수록 이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릭샤릭샤, 이걸 봐주세요!”
“네놈은 뭔데 남의 이름을 멋대로 부르는 거야?”
매번 크릭샤가 짜증을 내도 이프시네는 그쯤이야 가볍게 무시했다.
‘이 녀석도 갈수록 간덩이가 붓는단 말이지.’
처음엔 마왕들을 볼 때마다 히익거리면서 눈도 못 마주치던 이프시네는, 마왕 자리 떠맡고 나서부터는 의욕이 넘치다 못해 겁 없이 크릭샤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왔다.
“자아, 이걸 보세요. 제가 남은 영지의 세금 납부 문제들이랑 그동안 특산품들이 제대로 교류되지 못한 부분들을 싹 다 정리했는데.”
“엥?”
“거기다 다른 약소 마족들의 쾌적한 생활을 위해 도로 정비나 치안 정비도 다시 해보려고 해요.”
“뭐 하러 그렇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해? 다른 놈들이 어떻게 살든 알 게 뭐야?”
“귀찮은 부분은 제가 할 테니 일단 봐봐요!”
신입 마왕이 된 이프시네는 예상보다 꽤 유능했다.
그동안 일곱 마왕이 서로를 견제하고 전쟁을 벌이느라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던 마계의 시스템을, 두 팔 걷어 붙여가며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으로 재정비를 할 생각이에요. 물론 이 정점에 선 건 우리의 마신님!”
마계 중심에 하빈 모습을 본뜬 동상까지 만들려고 하는 걸 크릭샤가 그나마 저지했다.
“마신님은 저런 거 안 좋아해! 눈에 띄는 거 싫어한댔어!”
“앗, 그럼 안 되겠네요.”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이프시네. 그녀는 대신 또 다른 계획을 세웠다.
“그럼 마신의 위대함을 널리 다른 층에도 퍼뜨립시다!”
“뭐, 뭘 퍼뜨려?”
“다른 층과도 교류하자고요. 화친을 맺든 포섭하든, 포교하든.”
“흐음…….”
그건 듣던 중 꽤 솔깃한 제안인데?
마계가 마계로서 존재할 때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킬스크린의 일부가 된 상황. 위아래로 수많은 층들이 존재한다.
‘먼 과거의 역사가 생각나는군.’
인간들의 영토까지 정복 전쟁을 하던 과거가.
“흠, 그건 뭐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다른 층을 넘나들다가 실수로 마신을 만나면 그건 귀찮을 것 같지만.
어느새 이프시네의 일 처리 방식에 적응한 크릭샤가 이리저리 그녀와 마계 재정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 후, 한 달여간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자, 크릭샤는 조금 방심했다.
“마신님은 온다더니 안 오네.”
그들 따위 잊어버리고 어디서 실컷 놀고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는 날까지 다신 만나지 말았으면, 후후후.’
맵닭볶음면인가 뭔가 하는 소스는 좀 궁금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도 마왕성에서 평범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던 크릭샤.
“흠흠, 오늘은 어떤 놈을 ‘묶지 말고 사형에 양보’하면 좋을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홀로 누워 있던 소파 팔걸이 부근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슈우욱-
“음……?”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쑤욱 입구가 생겨나는 광경.
“저, 저건!”
그건 바로, 그동안 마신-하빈이 그에게 방문하고 사라졌을 때의 현상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왜 이런 순간에 갑자기 마신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크릭샤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잉, 끼이잉.
그의 옆에 있던 켈베로스도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 꼬리를 말았다. 그들이 다급하게 자세를 정렬한 순간이었다.
“얘들아! 롱 타임 노 씨!”
현하빈이 해맑은 얼굴로 마왕성에 등장했다.
* * *
“가, 갑자기 무슨 일로……?”
“엥? 크릭샤야, 넌 내가 안 반갑나 봐? 난 오랜만에 봐서 되게 반가운데.”
“헤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신님은 언제나 환영입죠!”
-끼잉, 끼잉.
“헉, 켈베야! 누나 기다렸어? 짜잔, 개껌 가져왔다!”
하빈이 인벤토리에서 개껌을 꺼냈다. 평소 까망이에게 주는 츄르 바로 옆 칸에 켈베를 위한 개껌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끼잉……?
경계 어린 눈빛으로 개껌을 바라보던 켈베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가운데에 있던 머리가 가장 먼저 개껌을 덥석 베어 물었다.
-낑?!
꽤 맛있었는지 놀라서 두 눈이 커지는 켈베.
-깨앵! 왈왈!
옆에 있던 다른 머리들이 자기네들도 달라며 아우성쳤다.
“그래그래, 1켈베, 2켈베, 3켈베.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지. 내가 여러 개 가져왔단다!”
하빈이 개껌을 여럿 던져주며 크릭샤를 돌아보았다.
“앗, 그러고 보니 크릭샤를 위한 맵닭볶음면 소스를 안 가져왔다. 어쩌지?”
“그, 그건 괜찮습죠.”
‘그것도 안 가져왔으면서 또 무슨 일로 온 거야!’
크릭샤가 인상을 억지로 펴고 있을 때였다. 하빈이 고개를 저었다.
“흐음, 안 괜찮을 텐데.”
“정말 괜찮습죠! 혹시 그것 때문에 오신 거면 굳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란 말이다!’
그러나 크릭샤의 타는 속도 모르고, 하빈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 역시 크릭샤는 여전히 친절하구나. 내가 무리하지 않게 배려도 해주고.”
“저의 충정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헤헤.”
크릭샤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그 꼴을 보던 하빈이 물었다.
“그래? 그럼 이번엔 크릭샤가 필요한 일이 생겨서 그런데, 이것도 해줄 수 있겠지?”
“헤헤, 물론입…… 네?”
“지금 당장 가줘야겠어.”
“네? 어, 어디로 말입니까?”
“크릭샤가, 저주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댔지?”
마왕이라 저주와 마법에 대해서는 자신 있다고 말한 적 있는 크릭샤. 하빈에게 묵비의 저주 스킬까지 제공했던 크릭샤. 그는 쎄한 기분을 느끼며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넵…….”
“그럼 저주 잘 풀겠네?”
“네엡……. 그렇긴 하죠…….”
“그럼 저주 풀러 가자!”
“네?”
* * *
“짜잔, 그래서 납치…… 아아니, 데려왔어! 해주 전문가!”
“……안녕하세요, 김릭샤입니다.”
크릭샤가 똥 씹은 얼굴로 서윤에게 인사했다. 그는 학교에 오기 전 이미 하빈과 말을 맞추어 인간인 척 위장을 끝내고, 가명까지 만든 상태였다.
“기, 김릭샤요?”
서윤의 물음에 하빈이 설명을 덧붙였다.
“외국에 있다 오셔서 이름이 이래.”
“아하…….”
[크흠, 현하빈 네가 저번에 김씨는 아주 고귀한 성씨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렇게 남발을 하면 쓰나!]
‘미안해, 잘잘. 하지만 크릭샤와 김릭샤가 제일 어감이 어울리는 걸 어떡하면 좋니.’
[크흠흠!]
아헤자르는 가명으로 쓰던 성이 겹쳐서 기분이 미묘하게 상한 것 같지만 말이다. 하빈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응, 김릭샤라고 어둠의 루트로 활동하는 저주 전문가! 얘가 알아서 잘 해줄 거야!”
“…….”
‘역시 하빈 언니는 인맥이 넓어서 이런 분들도 다 아시는구나.’
다행히 서윤은 그동안 하빈의 엄청난 인맥 러시를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에 겨우 적응을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서윤이 공손하게 크릭샤를 향해 인사했다.
“잘 부탁드려요, 김릭샤님.”
“……크흠.”
“자, 그럼 크…… 아니, 김릭샤. 출동이다!”
“뭘 어떻게 하란 것입죠?”
“자, 이 저주를 봐.”
하빈이 쓰러져 있는 제희를 처억, 가리켰다. 이미 제희는 의식을 잃은 지 오래. 팔을 중심으로 시커멓게 번져 있는 저주를 본 크릭샤의 눈썹이 꿈틀댔다.
“누가 이런 저주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말투, 얕은 분노가 느껴지는 표정.
그 모습에 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거 대단한 저주야? 김릭샤도 못 풀어?”
“……아뇨.”
짧은 침묵이 흐른 뒤 크릭샤는 부들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쉽습니다. 다만, 고작 이딴 걸로 사칭을 당하다니 무척 기분이 나쁘군요.”
“사칭?”
“이딴 저주에 악마의 이름을 달다니. 대체 누가 이런 짝퉁 악마의 저주를 만든 겁니까! 격 떨어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