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31) (131/268)

131. 솔직히 불금에 이러는 건 너무했잖아 (4)

“…….”

[이런.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학생들이 있었군.]

한편, 옥상에서의 사투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현시우는 복도에서 끈적한 점액질에 뒤덮인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점액질 사이로 시체나 다름없는 핏기 빠진 창백한 표정들이 보였다. 현시우는 그들의 상태를 재빨리 확인했다.

‘아직 살아 있어.’

그들은 다행히도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상당히 심각했다.

-경고! 제물의 저주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꿰뚥렉-우레아랅의 제물로 산화되기 전까지 2일 남았습니다.

-악마종의 저주입니다. 해주가 어렵습니다.

그걸 확인한 네아이바가 혀를 찼다.

[아주 질이 나쁜 저주야. 상위 마족이나 마왕급이 아니고서는 풀기 어렵겠는걸.]

‘네아이바는 가능합니까?’

[다른 저주라면 간단했겠지만…… 악마종의 저주는 내 성향과 너무 달라서 푸는 데 오래 걸려. 감염된 학생이 많다면 2일 안에 전원을 해주할 수 있을지는 조금 우려스럽군.]

현시우는 유예 시간인 3분 동안 재빠르게 학교 본관의 상황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현시우의 예방과 발 빠른 대처 덕에 대부분의 학생과 교사들은 무사히 대피소로 대피한 모양이었다.

다만 대피하지 못한 학생과 교사들의 흔적도 종종 보였다. 학생들을 끝끝내 지켜내려고 막아서던 교사와 혼비백산 겁에 질린 학생들. 그들 역시 점액질에 감싸인 채 그대로 굳어있었다.

“이쪽도 2일의 제한 시간을 두고 저주가 걸려 있군요.”

이쪽 몬스터들은 다행히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서서히 시간을 두고 죽어가게 하는 방식을 썼군요. 왜 굳이 이런 방식을 골랐을까요?”

다른 던전이라면 ‘그냥 던전 테마인가보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그냥 던전이 아니었다.

‘마이너 패치가 설계한 던전.’

그들은 굳이 유예 기간을 둔다거나 저주를 걸어 목숨을 붙여 놓거나 하는 희망을 주지 않았다.

죽일 수 있으면 바로 죽여버리는 게 그들의 방식.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거나, 혹은 죽일 능력이 안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SSS급 던전 만드는 능력은 되면서, 학생들을 바로 죽여버릴 몬스터는 못 만든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오히려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혹시라도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살려 두려고…… 아니, 그렇게 인간적인 방식을 그들이 썼을 리 없지.’

그냥 실수했거나, 학생들을 죽이지 않고 제물로 씀으로써 더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있거나.

그중 하나일 것이다.

현시우는 상념을 끊고 건물을 마저 탐색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보스를 재빨리 처치하고 학생들의 저주를 풀어야만 한다. 그래야 모두 살릴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살릴 것이다.

* * *

“너희가 왜 여기 있어?”

하빈이 도착한 곳은 학교의 기숙사였다. 하빈과 서윤이 머물던 방.

‘홈 스윗 홈이 최고지.’

기숙사 내에는 학생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CCTV를 설치하지 않았다. 있다고 했어도 아마 진작 하빈이 입주하면서 꼼꼼히 체크한 다음 치워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하빈은 저번에 신문부 기자들이 따라붙은 뒤로 사생활 보호에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쓰던 참이었다. 들어올 때마다 도청 장치나 몰래카메라가 있는지 확인하고 방음 아이템을 꼬박꼬박 켜며 살아왔다.

그래서 기숙사 방을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빈은 일단 기숙사 방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휘릭- 탁.

“히어로 랜딩.”

언제나처럼 멋진 낙법으로 방 안에 착지하는 하빈. 여서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하빈의 모습에 꽤 익숙해졌는지 의외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송제희가 덜덜 떨었다.

“어, 어떻게 오신 거예요?”

“그건 알면 다치는데?”

“…….”

하빈의 발언에 송제희는 입을 합 다물었다. 하빈이 기숙사 방 안을 둘러보며 끄응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여기에 얘들이 있는 거야?’

여서윤이 무사한 건 다행인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이공간 진입을 이 두 명이 보게 될 줄이야. 하빈은 서윤이를 보며 송제희를 손짓했다.

“어쩌다 들어오게 된 거야?”

백 번 양보해 여서윤은 본인 방이라서 여기 숨었다 치자. 하지만 송제희가 여기 있는 건 의외였다. 하빈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본인 방 아닌 학생이 여기 들어오면 교칙 위반인데?”

송제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지금 이 상황에 교칙 위반이 문제예요?!”

“가택침입은 범죄인걸.”

“던전이 열린 상황에 가릴 게 있겠냐고요!”

제희가 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외쳤다. 바깥에 돌아다니는 몬스터를 의식한 모양이었다. 하빈은 곁눈질로 방 안에 작동되고 있는 방음 장치를 확인했다.

‘좋아, 잘 작동되고 있네.’

그 시선을 확인한 서윤이 우물쭈물 설명했다.

“그…… 미안해, 언니. 어쩔 수 없었어. 지하대피소가 무너진 잔해 때문에 들어갈 수 없게 막혀 있었거든. 꼼짝없이 죽겠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우리 방이 엄청 안전했던 게 기억나서…….”

그들이 떠드는 와중에도 몬스터들은 방 안을 기웃대지 않았다. 그들의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한 것처럼.

이건 모두 하빈의 방에 설치된 방음 아이템들 덕분이다.

‘거기다 저번에 컨티뉴에서 왔을 때 방어 아이템도 많이들 챙겨줬었지.’

저번 선물 전달식 때, 방 안에 설치하던 아이템 중 일부는 ‘코니 님의 걱정을 담은 선물’이라며 설치를 남겨두고 갔었다.

그건 모두 방어 아이템과 침입자를 막아내는 종류의 아이템들이었다. 하빈과 서윤처럼 허가된 사람, 혹은 하빈과 서윤의 허락을 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사람을 가려 받는 옵션이 설정되어 있었다.

“그것 때문에 몬스터들이 우리 방은 습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컨티뉴의 제작 아이템이라 웬만한 아이템들의 성능을 아득히 상회한다. 코니는 혹시나 싶은 테러에 대해 방비하기 위해 하빈의 주거지를 신경 쓴 것이었다.

서윤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의 방은 지하 대피소와 맞먹을 만큼 안전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래, 좋은 판단이었어.”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태도에 송제희가 눈치를 봤다.

“그, 그럼…… 가택침입 눈감아주시는 건가요……?”

“흐음.”

하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끼었다. 그녀가 한참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화재 사건 일어났을 때 놀라서 옆집으로 도망간다 해도 정상참작되는 거니까. 웬만한 계약서 같은 데도 천재지변 같은 상황에서는 책임 안 묻는다는 조항도 있고.”

“마, 맞아요! 이건 진짜 천재지변이라고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냐.”

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제희는 내가 여기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잖아?”

“모른 척할게요!”

냉큼 대답한 제희가 다급한 표정으로 서윤을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도와 달라는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 표정에 서윤도 덩달아 말을 보탰다.

“맞아, 언니! 제희가 나 여기까지 오도록 도와줬어. 언니한테 신호 보낼 때도!”

“그래?”

하빈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서윤이 고개를 재빨리 끄덕끄덕하며 말을 보탰다.

“그, 그리고 제희는 이미 벌도 받았어! 여기 오는 길에 운동장을 네발로 돌았다니까!”

“……흠?”

뜻밖의 말에 하빈이 놀란 표정으로 제희를 돌아보았다.

“제희는 정말로 네발 걷기에 진심인 모양이구나? 미처 몰랐네!”

제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거든요! 몬스터 눈 피하려고 네발로 기어온 거라고요……! 이건 어디까지나 전략적인 판단이었는데…… 윽.”

말을 하던 제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다급히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움켜쥐는 제희. 그 모습을 본 서윤이 놀라서 제희를 부축했다.

“어어? 왜 그래?! 괜찮아?”

“……?”

하빈이 제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서윤이 다급히 제희를 살피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아까 다친 상처가…….”

“상처?”

하빈의 물음에 제희가 팔을 걷었다. 팔 위로 시커먼 점액질이 묻은 상처가 보였다. 불거진 핏줄을 따라 시커먼 자국들이 번져 가고 있었다. 제희는 신음을 삼키며 설명했다.

“올라오는 길에 유예 시간이…… 다 돼서, 윽, 몬스터한테 살짝 스쳤는데…….”

그냥 보기에도 고통스러운 모습에 서윤이 그를 제지했다.

“힘든데 말하지 마!”

“포션은 먹였어?”

“……안 듣더라고.”

포션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지만, 그래도 체력이 크게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대로도 괜찮을 것이라 여기며 버텼을 뿐이다.

하지만 상처의 검은 흔적은 점점 제희의 몸을 타고 번져가고 있었다. 서윤이 말을 이었다.

“이게 저주라고 뜨는데…….”

하빈 역시 알림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고! 제물의 저주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꿰뚥렉-우레아랅의 제물로 산화되기 전까지 2일 남았습니다.

-악마종의 저주입니다. 해주가 어렵습니다.

“……2일 남았다는데?”

동일한 알림창을 봤던 제희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2일이고 자시고…… 지금 당장 뒤지는 거 아냐? 윽, 느낌 쎄한데.”

고통에도 끊임없이 말을 뱉는 태도와는 달리, 제희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아헤자르가 끼어들었다.

[저주에 당했으니, 같은 방식인 해주가 아니면 어렵다.]

‘그것도 2일 안에 풀어야 한단 말이겠지?’

해주 방법이라.

“어, 어떡하지, 언니?”

서윤이 하빈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여기 오는 길에 몬스터한테 당한 학생들을 봤는데, 다들 제희랑 증상이 비슷해! 이런 까만…… 거에 당해서 딱딱하게 굳어있었어.”

지금 제희의 팔 역시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뱉던 제희는 이제 말도 없이 눈을 딱 감고 있었다. 서윤이 제희를 흔들었다.

“저, 정신 차려 봐, 송제희!”

“…….”

흔들어도 대답 없는 제희의 모습에 서윤이 겁에 질린 얼굴을 했다. 하빈이 일단 서윤을 진정시켰다.

“있어 봐. 저주에 대해서라면 방법이 있지.”

“저, 정말로?”

아헤자르도 반색했다.

[정말이냐? 아, 알겠다! 너는 마신의 기술을 쓸 수 있었지? 혹시 해주하는 방법에 대한 스킬이 있느냐?]

‘응? 그런 거 없는데?’

[뭣이?]

하빈은 스킬 목록을 보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스크롤이 정말 끝도 없었다. 이거 보면서 제대로 된 해주 방법 찾으려면 최소 한 시간은 걸릴 듯.

“내게는 그것보다 더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 있지.”

[그게 무엇이냐?]

“그게 뭔데?”

하빈은 기대 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대답 없이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불 꺼진 형광등과 비상등을 확인한 하빈이 물었다.

“여기 전력 다 나갔지?”

“응? 으응…….”

기숙사의 전력은 다 나간 지 오래였다. 그 말 뜻은.

“CCTV도 안 돌아가겠네.”

하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흘깃 옆을 보니 송제희도 그새 기절했는지 의식이 없었다.

“좋아, 이 녀석도 이제 앞으로의 일은 기억 못 할 테고.”

[뭐, 뭘 하려고 그러느냐?]

“언니……?”

불안해하는 주변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하빈은 태평하게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여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쪽 전문인 애가 하나 있어. 걱정 마.”

그것도 아주 친절한 놈으로 말이지.

하빈이 씨익 꿍꿍이가 있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리고 잠시 후.

“하하, 마신님! 웬일이십니까! 이 크릭샤를 다 찾아 주시고!”

‘이 인간은 또 왜 날!’

교만의 마왕 크릭샤는 학교에 소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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