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24) (124/268)

124. 반전(反轉) (4)

“그, 그 친구분 뭐 하시는 분이세요?”

아헤자르의 이름을 들은 오마주가 잘게 떨리는 눈으로 하빈에게 물었다. 아헤자르는 신이 나서 중얼거렸다.

[당연히 세계 최강의 성좌……!]

현하빈은 그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웹소설 덕후인데요.”

“그, 그래요? 학생인가요?”

“같이 학교 다녀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아헤자르는 현하빈과 같이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출석부에 없는 존재. 성좌로서 몰래 따라다닌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빈은 고개를 깊이 끄덕끄덕하며 덧붙였다.

“웹소 교양과목에서 엄청난 두각을 드러내는 친구죠.”

[크흠.]

아헤자르가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그동안 아헤자르는 현하빈이 듣는 웹소, 웹툰 교양 수업에서 신이 나서 활약하곤 했다.

‘저, 저 소설은 나도 읽어 보았느니라! 성녀가 최종 흑막이었다! 선생님이 낸 퀴즈의 정답은 바로 성녀다!’

‘저 웹툰, 마지막엔 저기서 나온 보스가 주인공의 죽은 줄 알았던 연인이었던 걸로 반전이 나온다!’

‘저기서는 주인공이 사실 마왕의 숨겨진 핏줄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르는 게 하나도 없었던 카카페 캐시마스터. 덕분에 하빈은 아헤자르의 대답을 그대로 써먹었고, 교양 선생님은 현하빈을 무척 아꼈다.

‘정말 웹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학생이군요!’

아무튼, 선생님에게도 인정받은 김잘잘의 덕력. 하빈은 그 점에 대해 특별히 어필했다.

“그 친구가 안 읽어 본 웹소가 없을 정도로 웹소 덕후인데, 다른 작가님 말고 꼭 오마주 작가님 사인 받아야 된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오마주 작가님을 좋아하나 봐요.”

[흠흠. 잘 전달했다. 그래도 계약자라 그런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아는구나. 크흠.]

아헤자르가 퍽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작가의 표정은 점점 희게 질렸다.

“아, 아 그러시군요……. 그, 학생이시면 각성자? 혹시 어느 쪽 각성자이신…… 혹시 번역가거나 역사서 수집…….”

횡설수설하던 작가는 낭패한 표정으로 입을 합 다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언했어요. 여, 여기, 친구분이 좋아하셨으면 좋겠네요.”

오마주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사인지를 돌려주었다. 아헤자르가 통탄을 금치 못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행본을 사서 챙겨올 것을! 단행본 앞 페이지에 사인을 받았어야 했는데!]

어차피 성좌라 책 같은 거 보관하기 어렵다고 사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뒤늦게 엄청난 후회가 되는 모양이었다. 아헤자르가 애달픈 목소리로 하빈을 졸랐다.

[여기 종이책을 사서 사인 받을 수는 없겠느냐?]

‘흠?’

오마주 작가의 곁에 ‘황제를 어쩌구’ 종이책 단행본이 조금 쌓여있었다. 하빈이 물었다.

“혹시 이 종이책도 판매하시나요?”

“네, 네엡.”

[그, 그럼 당장 사야 한다!]

아헤자르가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 말에 하빈이 삐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장난감 가게에서 비싼 게임기를 집어 든 아이를 쳐다보는 짠돌이 살림꾼의 눈빛.

‘에엥, 누구 돈으로?’

[그건…….]

‘사면 어디 둘 건데?’

[그, 그러니까…….]

아헤자르는 대번에 말문이 막혔다. 팬심이 앞서서 일단 지르고 봤는데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아헤자르는 돈도 없었고, 솔직히 저걸 보관하는 건 하빈의 몫이고.

[…….]

포기한 듯 침묵하는 아헤자르.

‘장난이 좀 심했나?’

어깨를 으쓱한 하빈은 다시 작가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종이책 지금 구매해서 사인 받을게요. 그래도 되나요?”

“아, 네…….”

[사, 사 주는 것이냐?]

‘그래. 이건 김잘잘 올해 생일선물.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니 그냥 지금 사줄게. 내가 정말 특별히 인심 썼다.’

[고, 고맙다! 정말 고맙다! 이 은혜는 내 언젠가 잊지 않으마!]

‘그 말 채씨한테도 마구 던지던 거 들었거든? 빈말 아냐?’

[아, 아니다!]

‘흠……. 뭐 그렇다 치고.’

그 와중 오마주 작가는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슥슥 사인을 하고 있었다. 아까도 사인을 하면서 하빈에게 여러 질문을 했던 오마주 작가였는데, 지금 종이책 구매로 인해 사인을 더 해주는 상황이 되었으니.

꽤 시간이 길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뒤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좀 빨리합시다. 혼자 너무 오래 시간 쓰는 거 아니에요?”

‘이런.’

이제 사인 받자마자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 때마침 오마주 작가도 사인이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작가가 무언가 결심했는지 책을 건네주며 입을 열려고 했다.

“저 혹시…… 아헤자르라는 이름.”

“아, 그건 그냥 친구가 쓰는 닉네임이에요, 닉네임!”

하빈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헤자르는 쓸데없이 웅장하고 판타지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리고 성좌의 이름이기도 했던지라 하빈은 사실 그 이름을 밖으로 꺼내는 걸 달가워하진 않았다.

혹여라도 아헤자르가 성좌인 걸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름을 듣고 의심받을지 모르니까.

‘그러니 이번은 정말 김잘잘을 위한 특별 서비스였다구.’

어차피 이분은 각성이나 헌터와 관계없는 평범한 웹소설 작가님. 그러니 아헤자르라는 이름 하나 정도로는 별로 파헤칠 것이 없을 것이란 결론에서 특별히 귀찮음을 감수한 것이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책을 받아든 하빈이 재빨리 인사를 하고 탁탁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분, 생각보다 투머치 토커인 것 같은데, 적당히 끊어주지 않으면 한참 붙잡히겠어!’

지금 현하빈은 빨리 먹거리를 사러 가야 했다. 또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까지 생각한 나름의 배려다. 하빈은 오마주가 붙잡을 새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그 현장을 벗어났다.

“……도, 독자님!”

허망하게 하빈을 부르던 오마주는 그대로 동작이 굳었다.

아헤자르.

‘분명 아헤자르라고 하셨어.’

두 번이나 사인을 했으니 확실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오마주는 곰곰이 머릿속을 되짚었다.

‘아헤자르라니, 내가 소설 쓰면서 그 설정까지 푼 적은 없는데…… 실수했나.’

사실 오마주 작가는 별스타나 르위러 쓰다가 독자님께 실수로 중요 설정 스포하는 바람에 출판사에 혼나서 계정 잠금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다가 한 번 실수로 풀었나?’

아니면…….

‘술 먹고 나도 모르게 한 번 올리고 삭제했나? 그래서 기억이 없나?’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아니겠지.’

오마주 작가의 머릿속에, 순간 집 금고에 철저하게 숨겨놓은 아이템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렵사리 수집해서 집에 고이고이 모셔 놓은 ‘???의 역사서’라 이름 붙여진 아이템들.

‘내가…… 그걸 배경으로 소설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독자님은 아니겠지…….’

오마주의 표정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 * *

‘언니는 잘 즐기고 있으려나?’

엄청 신나 보이던데.

서윤은 아침부터 행복한 얼굴로 짐을 챙기던 하빈을 떠올리며 설핏 웃음을 지었다.

‘하세론 배우님 사인 받아 온다고 그랬었지? 기대된다.’

그리고 실물 봐서 좋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하빈 언니가 수업 신청할 때 옆에서 같이 신청할 걸 그랬다. 같이 드라마 교양 수업을 들었으면 수업도 재미있게 같이 듣고, 오늘도 함께 놀러 갔을 텐데. 서윤은 조금 후회를 했다.

‘처음 봤을 땐 너무 무서워 보여서 같은 수업 신청해 볼 엄두도 못 냈었지.’

하빈은 처음 기숙사에 배정받았을 때 서윤에게 몇 번 같이 듣자고 꼬신 적이 있었다.

‘서윤이 넌 교양 안 들어?’

‘응? 으응…….’

‘엥? 왜 교양을 안 들어? 그런 거 들으라고 학교 오는 거잖아.’

‘……?’

서윤이 그때 하빈의 제안을 거절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이왕 학교에 온 김에 알차게 꽉꽉 전공을 채워 들어서 성실하게 학교를 다니려고.

두 번째는…… 그냥 하빈 언니가 좀 무서워서. 거리 두려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착하고 친절한 하빈 언니를 두고 여서윤 자신은 대체 무슨 오해를 했단 말인가.

‘음……. 오해한 것보다 더 무서운 언니이기는 했지만…….’

성격이 무서운 언니로 오해했는데, 보면 볼수록 성격은 착하고, 대신 능력과 배경이 무서운 언니였다.

뭐 그런 반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언니인 건 맞았다.

‘나중에 저녁에 오면 오늘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배우님 사인 받으면 파일에 끼워 둬야겠다!’

상상만 해도 벌써 들뜨는 기분이었다. 서윤이 실실 웃음을 짓고 있을 때였다.

“야, 넌 또 뭘 멍을 때리고 있어? 같이 와서 이거 들어야 해.”

옆에서 툴툴대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서윤은 고개를 돌렸다. 송제희가 훈련기구 앞에 서 있었다. 두 명이서 들어야 하는 모양의 기구였다.

“반대편 들어.”

“엇, 응응!”

그들이 있는 건 체육 창고였다. 지금 서윤은 훈련부 동아리 활동을 위해 체육 창고에서 훈련 기구들을 꺼내는 중이었다. 모두 동아리 차원에서 이미 선생님들께 사용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각성자용 훈련 기구들은 각양각색의 기능들을 가지고 있었다. 차고 있으면 능력을 50% 제한하는 기능을 가진 구속구, 1톤짜리 아령, 은신을 도와주는 망토, 불에도 타지 않는 과녁 등등.

다양한 능력을 지닌 학생들에게 맞추어, 그때그때 다양한 훈련을 하기 위해 정말 많은 종류의 훈련 기구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 그들이 옮기고 있는 건 훈련용 인형이었다. 난이도를 설정하고 전원을 켜면,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처럼 모의 전투를 할 수 있었다. 공격 능력은 없고, 재빠르게 피하는 능력과 마법 저항 기능이 있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마법사들이 훈련하기에 딱 좋았다.

“빨리 동아리실로 돌아가자, 이러다 늦겠어.”

여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 인형들로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순발력을 키우자고 동아리 차원에서 그렇게 일정을 정해둔 것이었다.

오늘은 여서윤과 송제희가 비품을 가져오는 역할로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인형을 들고 옮기던 와중이었다.

끼기긱- 끼기기긱-!

“……뭐야?”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에 송제희가 동작을 우뚝 멈추었다. B급 각성자답게, 제희는 소리와 기감에 아주 예민했다. 잠깐 이질적인 소음에 동작을 멈추어 주변을 살폈다.

끼기긱-

“이 소리는…….”

‘이건 던전이 열릴 때 나는 소리인데.’

그것도 일부러 던전에 침입할 때가 아닌, 멀쩡하던 공간이 던전에 휘말릴 때 나는 소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공기 흐름이 좀 이상한데…….”

서윤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보탰다. 그녀의 말을 들은 제희가 다급하게 문밖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운동장 저편 그 너머의 하늘이 기이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끼기긱- 끼기기기긱!

끼기기기긱-!

새파란 하늘이 쩌적쩌적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파랗던 하늘이 모두 시커먼 먹구름이 뜬 듯 잿빛 하늘로 바뀌었다.

알림창이 뜬 건 그 순간이었다.

[경고! 던전▨ 쩳№떯흙헰! 에 진입했습니다!]

“뭐?”

읽을 수 없는 괴상한 이름에 제희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재빨리 던전의 정보를 살폈다.

[던전 ㄷㅡㅇ%급! : B]

“그래도 다행히 B급이면…….”

B급이 절대 낮은 등급은 아니지만, 여긴 울림국제고다. 한국의 상위 등급 각성자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집결된 곳. 잘 대응하면 큰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제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이었다.

알림창이 비웃듯 깜빡였다.

[던전 ㄷㅡㅇ%급! : B?]

띠링.

[던전 ㄷㅡㅇ%급! : A!]

“……뭐야?”

왜 갑자기 등급이 상승해?

얼빠진 표정을 지을 새도 없었다. 등급 표시 알파벳은 기괴한 노이즈와 함께 지지직거리며 계속 바뀌었다.

[A!_-Aa++aaaa]--

---!As_]

[S-_____---!

한참을 일렁이던 알림창은 마지막으로 붉은색 경고창을 띄웠다.

[최종 판정 등급 : SSS]

[경고! 던전 등급이 플레이어의 능력치에 비해 과도하게 높습니다.]

[생존 확률 계산 :0%]

[신속히 탈출할 것을 경고합니다!]

“씨……. 이게 무슨 미친?”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모두 사라진 송제희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가야 한다. 여기 있다간 죽는다.

이딴 알림창 없어도 그 사실쯤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빠른 판단을 마친 송제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서윤, 지금 당장 교문 쪽으로 뛰어…….”

그러나 알림창은 한마디를 더 보탰다.

[경고! 던전 공략 전까지는 나갈 수 없습니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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