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반전(反轉) (3)
피데스.
정의롭고 똑똑한 세계 최강자의 이미지로서 그의 평판은 좋다 못해 신격화될 정도였다. 온갖 정재계 인사들과 종교계 인사들이 피데스를 상당히 경계할 만큼.
‘저러다 저놈이 권력이라도 쥐면 골치아파진다.’
‘종교라도 세우는 거 아냐?’
‘대체 원하는 게 뭐지?’
그러나 피데스는 언제나 절묘하게 그 견제를 피해갔다. 쓸데없는 견제를 피하면서도 사고는 확실하게 막아내고, 사람들은 제대로 구하고.
그래서 여론과 대중의 선호로는 피데스를 이길 자가 없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피데스를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피데스를 견제하는 다른 세력들 외에, 평범한 대중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피데스를 의심했다.
너무 선을 지켜서.
너무 정의로워서.
너무 친절해서.
오히려 그래서 더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웹소설 보면 흑막들이 대부분 저렇던데.’
‘헌터물 보면 꼭 관리국이나 협회장이 나쁜 놈이더라.’
‘저 녀석은 뭘 바라고 저렇게 착하게 굴어?’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피데스의 진정성이 보였기에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데스를 웬만큼 믿었다. 또한 피데스를 지지하는 광팬들이 그런 여론을 가만히 놔두질 않았기도 했다.
‘우리 갓데스 님이 알아서 세계 지켜주신다는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웬 모함이야!’
‘아무리 세상이 헌터물처럼 바뀌었다 해도 의심병이랑 과몰입은 알아서 자제합시다! 어디서 생사람을 잡아요?’
‘피데스 미만 잡. 아무튼 피미잡! 피미잡!’
믿음과 호의, 존경과 광신, 경계와 불신 사이.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해석이 오갔겠지만, 적어도 강태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피데스는 인류의 편이다.
이유도 간단했다. 사람들이 의심하는 ‘최종 흑막’이란 놈들을 강태서는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이 바로 최종 흑막이다.
마이너 패치랑 시스템 관리자가 최종 흑막이고, 굳이 따지자면 강태서가 바로 ‘착한 척하는 구린 놈’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피데스는 정확히 그 반대에 섰다.
관리자와 마이너 패치를 적대한다. 특히 에라타는 허구한 날마다 피데스 때문에 이를 갈았다.
‘피데스 개자식, 그 녀석 때문에 이번에도 관리자님한테 깨지게 생겼잖아! 대체 어떻게 그런 놈이 랭킹 1위가 된 거야? 치트도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게다가 그 녀석은 어떻게 하는 일마다 우리랑 부딪혀? 하하, 지가 진짜 정의의 편이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매번 피데스에게 졌다는 전적이 있었지만, 에라타의 실제 능력은 상당히 출중한 편이었다. 상대의 약점과 의도를 캐치하는 능력은 성가실 정도로 좋았다. 그런 에라타가 내린 결론이 그거였다.
‘피데스는 미친놈이 맞아.’
‘이딴 세상에서 정의감을 가진 최강자라니, 아주 미친놈 아냐? 하다못해 비리라도 저지를 것이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어?’
‘대체 그 자식은 목적이 뭔데!’
에라타가 싫어하고, 시스템 관리자가 견제한다.
그럼 피데스는 진짜라는 거다.
진짜 인류의 편.
매번 강태서 앞에서 날 선 본색을 드러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강태서 개인에 대한 태도일 뿐 그의 진짜 목적은 언제나 옳은 방향. 지금 이 상황에서 학생들을 지켜낼 만한 강자. 학생들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의인은-
강태서가 알기로 피데스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태서는 그를 향해 말을 뱉었다.
“네가 분명 저번에 말했었지? 학생들에게 피해가 간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거라고.”
그럼…….
“어디 한 번 막아 보던가.”
* * *
한편 그 시각, 현하빈은 축제 부스를 신나게 둘러보고 있었다.
‘시사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대.”
하빈이 여기 온 찐 목적인 시사회. 아쉽게도 본격적인 상영 일정은 시작되지 않았다.
‘아, 빨리 보고 싶었는데.’
유명 감독과 배우들의 참석도 있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아서 시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대신 선생님은 그때까지 행사장을 자유롭게 둘러보고 오라고 했다.
“자, 약속한 시간까지 여기 모이는 거예요!”
“네에!”
‘알차게 둘러보고 와야지!’
하빈은 행사장 주변 부스를 눈으로 훑었다. 푸드트럭은 물론, 웹툰이나 웹소 작가들 사인회, 전시회, 특별무대 등등의 작고 소소한 행사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좋아, 어디부터 들를까?’
하빈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선생님이 모이라고 한 약속 시간 전까지, 맛있는 음식도 다 먹어볼 거고, 굿즈나 추첨 같은 이벤트도 빼놓지 않고 착실하게 구경할 요량이었다.
신이 나서 가판대를 경쾌한 발걸음으로 지나치던 하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엥? 저긴 왜 저렇게 사람이 많아?”
행사장 한쪽 구석 부스에 희한할 정도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빈은 빼꼼 고개를 뻗어 그 앞을 쳐다보다가, 그래도 사람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자 앞으로 총총 다가갔다.
“뭐예요? 새치기하지 마세요!”
줄을 서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신경질적으로 하빈에게 지적했다.
“앗, 저는 그냥 이게 무슨 줄인지 궁금해서.”
하빈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줄을 서 있던 사람이 품에 안고 있던 책을 처억! 꺼내 들었다.
책에는 제목이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나 혼자만 역대급 천재 무한회귀 EX급 헌터로 귀환해서 레벨업!>
<작가: 클리셰>
“이 작품 알죠? ‘클리셰’ 작가님 사인회예요.”
“아하…….”
나 혼자만 역대급 천재 어쩌구 라는 작품을 쓴 작가님이 저기서 사인회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빈이 김샜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에휴, 뭐야. 맛집이라도 있나 싶었네.”
줄 서서 먹는 맛집이면 얼른 달려가 줄 서려고 했는데.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하빈이 푸드트럭 구역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자, 잠깐! 잠깐 멈춰 보거라!]
‘음?’
아헤자르가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뭐야, 김잘잘. 너도 줄 서고 싶어서 그래?’
안 그래도 하빈은 저 이름 긴 판타지 소설을 아헤자르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다. 아헤자르는 그걸 꽤 재밌다고 평했었고.
[아니, 아니 바로 그 옆줄!]
‘옆줄?’
하빈이 흐음, 하는 표정으로 옆에 있는 줄을 보았다. 삼삼오오 늘어선 줄 끝에 작품명이 적혀 있었다.
<황제를 길들이다가 때려쳤습니다.>
<-부제: 인간이 할 짓이 아님->
저번에 아헤자르가 몰래 캐시 써서 읽던 로판 제목이었다.
“…….”
[사인 받아야 한다! 빨리 줄 서라!]
‘아이 진짜.’
[빨리, 사인 받아다오! 아헤자르 이름으로 사인 받아다오!]
“…….”
아무래도 김잘잘은 그새 본인 이름으로 사인 받을 계획까지 다 짜둔 모양이었다. 하빈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안 돼, 김잘잘. 아헤자르는 너무 판타지스러운 이름이야. 여긴 대한민국의 한국이라고! 한국에 왔으면 한국다운 이름으로 사인을 받아야 오해를 안 사지.’
[아, 그런 것인가? 그, 그럼 김잘잘 이름으로 받아야 하는 건가?]
‘그래. 내가 그것까지 다 생각해서 잘잘이 이름을 지어 준 거라니까? 특별히 성까지 붙여서 열심히 지었어. 김잘잘이라고.’
[어, 어째 속는 기분이 든다만…….]
아헤자르가 망설이자, 하빈이 쐐기를 박았다.
‘뭐? 내가 왜 잘잘이를 속여? 잘잘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참고로 김씨 성은 한때 이 영토의 왕족이었던 성씨라고!’
[뭐, 뭣이?! 왕족의 성씨라고?]
‘응! 위대한 왕족의 성씨지.’
가야였나? 어디 왕족이었더라?
하빈이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헤자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 김잘잘이, 무려 왕족의 성을 붙인 이름이었단 말인가!]
‘그럼그럼. 내가 아무 이름이나 막 붙였겠니?’
[허어…….]
김잘잘……. 생각보다 위대한 이름이었군.
아헤자르가 그 이름을 곱씹으며 만족스런 듯 감탄을 내뱉었다. 하빈은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가 ‘황제를 길들이다가 때려쳤습니다’에 늘어진 줄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여긴 저쪽보다 줄도 적은데 그냥 잘잘이 이름으로 사인 받아 줄까?’
사실 아헤자르 이름으로 사인 받는 것도…… 판타지 컨셉 잡은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조금 쪽팔리지만 못할 건 없었다. 사인해 주는 작가 입장에서도 ‘그냥 판타지풍 닉네임이겠거니’, 할지도.
결론을 내린 하빈이 터벅터벅 걸어가 줄 끝에 섰다.
* * *
‘아이,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그냥 푸드트럭 쪽에서 뭐 하나 사 올 걸 그랬나?
차례를 기다리던 하빈이 입술을 삐죽이며 인벤토리에서 솜사탕을 꺼냈다. 심심할 때 먹으려고 넣어둔 거였는데, 이렇게 쓰게 될 줄은.
그걸 확인한 옆 사람이 깜짝 놀랐다.
‘가, 각성자!’
인벤토리를 쓸 수 있는 능력자는 당연히 각성자였다. 하빈은 워낙 짐꾼 일을 하느라, 그리고 요즘 별별 일을 겪느라 각성자가 주위에 있는 것이 익숙해졌지만.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인데 각성자라니!’
지금 보니 교복에도 울림국제마법학교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울림국제고의 위상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각성자에, 울림국제고 학생이라니! 인생 꽃길이구만.’
‘지금 학교 갈 시간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 건 책의 작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마침내 줄의 끝에 도달했을 때 만난 ‘황제를 길들이다 어쩌구’의 작가, 필명 ‘오마주’는 하빈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독자님, 학교 갈 시간에 여기 와주신 거예요? 와, 거기다 울림국제고시면 각성자신가 보네요.”
하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현장 학습으로 왔어요.”
“오, 현장 학습으로 여길 오셔요?”
“흠흠, 좋은 선생님을 뒀죠.”
하빈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길 데려와 주신 드라마 교양 선생님은 최고다.
‘역시 교육부 장관이 되셔야 하는데.’
하빈은 감상에 빠져 있었지만, 최애 작가님을 만난 아헤자르는 그 짧은 침묵을 견디지 못했다.
[지, 지금 오마주 작가님을 만났는데 그런 시답잖은 대화나 나누고 있을 수는 없다! 작품 아주 잘 봤다고 빨리 말씀드려라!]
‘난 못 봤는데.’
[빨리, 빨리!]
하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제 친구가 작가님 팬이라서요, 사인 받아 달라고 난리를 치더라니까요? 작가님 작품 엄청 재미있게 잘 봤대요.”
[특히 세계관이랑 묘사가 훌륭했다고 전해라! 그, 특유의 핍진성이 좋았다.]
“세계관이랑 묘사가 훌륭했대요.”
“아, 세계……관이요?”
“핍진성이 좋았다나.”
“……음.”
그 말을 들은 오마주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오마주는 그걸 내색하지 않고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크흠, 친구분께 정말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아, 사인은 친구분 이름으로 받으시나요?”
“네.”
“친구분 성함이……?”
“음…….”
하빈은 잠깐 ‘김잘잘’로 대답할까 하다가 짧은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에이, 그래도 처음 받는 사인인데 본명으로 받아보고 싶겠지?’
김잘잘, 내가 인심 썼다.
결론을 내린 하빈이 입을 열었다.
“아헤자르요.”
“네……?”
능숙하게 사인을 하려던 오마주의 손이 멈칫, 굳었다. 서서히 고개를 든 오마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헤자르라고 하셨어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