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랭커는 오늘도 은퇴를 꿈꾼다(120) (120/268)

120. 현하빈, 학교를 나가다. (3)

“……축제를 다녀오신다고요?”

교장실에서 결재를 받던 현시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학생들 데리고요. 아무래도 교실에만 있는 것보다는 이런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는 게 학생들에게 더 즐거운 경험이 될 거예요.”

신이 나서 대답하는 드라마 선생님. 현시우는 그 말을 듣고 다급히 반문했다.

“학생들 전원이 다 간답니까?”

“네! 다들 좋아하던걸요.”

[다들?]

‘다들이라면…….’

현하빈은 드라마 수업을 특히 열심히 들었다. 그러니 선생님이 현하빈을 빼고 말했을 리가 없다. 현시우는 다급히 참가 동의서를 훑어보았다.

-참가 동의서, 현하빈.

아니나 다를까. 떡하니 하빈의 동의서도 거기 있었다.

“……!”

‘현하빈이 참가하는군요.’

[그럼 현하빈이 학교를 벗어나겠군.]

‘…….’

현시우가 생각에 잠긴 사이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갈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걸요. 어렵게 구한 티켓인 만큼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죠!”

“티켓이 구하기 어렵습니까?”

“말도 아니죠. 아마 강태서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못 구했을걸요.”

“강태서…… 선생님이요?”

“글쎄, 강쌤이 학생들을 위해 구했다며 어느 날 갑자기 이걸 주시는 거 있죠? 역시 무뚝뚝해 보이셔도 학생들 생각하시는 마음만큼은 대단하시다니까요.”

감격한 표정의 드라마 선생님. 하지만 현시우는 오히려 그 말에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강태서가 자진해서 티켓을 구해줬다고?’

[……냄새가 나지?]

‘네. 아주 구린 냄새가 납니다.’

물론 강태서는 현하빈과 친구였으니, 친구를 위해 관련 행사 티켓을 구해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동안 당한 게 많았던 현시우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태서 이 녀석, 다른 속셈이 있는 듯한데.’

현하빈을 일부러 학교에서 빼낼 참인가? 그럼 대체 왜?

‘일단 언제인지라도 알아두는 게 좋겠지.’

“……언제입니까?”

“이번 주 금요일 오전이요.”

‘금요일……!’

금요일에는 채남매도 출근을 하지 않는다.

‘그럼 이 학교에 나만 남는다.’

다른 선생님들도 강한 헌터였지만, 합정역 사태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랭커는 채남매와 현남매, 그리고 강태서.

채남매는 쉬는 날, 현하빈은 대체수업. 강태서는 출근하겠지만 애초에 강태서가 못 믿을 놈이었다. 현하빈을 지금 빼내는 것도 강태서고.

“…….”

현시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물론 기우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소름 끼치는 상황이란.

‘진짜로 뭔 일 터지는 거 아냐?’

[터질 것 같은데.]

축제 참가 결재를 하는 와중에 이리도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니.

현시우가 대답이 없자, 드라마 교양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어머, 교장선생님도 가고 싶으신 건가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여기 도장 찍어주세요!”

남은 건 현시우의 승인뿐.

‘안 하고 싶다. 승인 안 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승인을 안 해도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명분이 없다, 명분이.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드라마 선생님의 말대로 학생들에게 아주 좋은 기회인데 그걸 현시우가 나서서 반대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강태서, 머리를 아주 잘 썼군.’

[그러게 말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계산했는지.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인가 보네.]

‘일단…… 결재할까요.’

이건 결국 결재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교장의 결재는 형식이나 다름없는 절차. 이렇게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는 건 아무리 교양과목이라도 선생님의 고유 수업 권한이다. 잠깐 임시로 들어온 현시우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상황.

‘게다가 또 중요한 문제가 있죠.’

현시우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걸 결재 안 해줘서 교장이 허락 안 해주더라, 라는 말이 현하빈 귀에라도 들어가 봐라.

그랬다간-

‘어이, 피 씨! 문 열어!’

쾅쾅쾅.

‘가암히 가면마법사 주제에 날 축제에 못 가게 해? 넌 오늘로 가면 다 벗겨버릴 줄 알아라!’

라며, 아무것도 모르는 현하빈이 왜 축제 참가 결재 안 해줬냐고 달려와서 창문을 깨부수고 멱살을 잡을지도.

[굉장히 일리 있는데? 백퍼다, 백퍼! 아마 현하빈을 포함해 이 과목 학생들이 다 일어나서 교장실에 달려올걸?]

‘선두에는 현하빈이 아헤자르를 휘두르며 오겠지…….’

상상만 해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솔직히 세계 멸망보다 더 무섭다.

현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교장 승인란에 도장을 쾅 찍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나 혼자 어떻게든 막아볼 생각이었으니까.’

아무리 전 회차 현하빈의 소원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현하빈이 현시우 몰래 던전을 깨고 다녀도. 이런 일까지 감당하게 하는 건 역시 못 할 짓이다.

‘게다가 현하빈, 워낙 이런 거 좋아하던 애인데 한 번쯤 다녀오고 싶었겠지.’

축제에 방문하는 유명 인사들은 현하빈이 좋아하던 드라마 관련 인물들이다. 시사회와 사인회라니. 배우들을 한 번도 실물로 접해보지 못했던 현하빈의 입장에서는 정말 놓치기 싫은 좋은 경험일 것이다.

‘생각해 보니 현하빈, 이런 데 한 번도 못 가본 것 같아요. 게이트 사태 전에는 학생이라 공부한다고 바빠서 못 갔거든요. 게이트 사태 후에는 일하느라 바빴을 테고.’

[이야, 그럼 너보다 강태서 그 자식이 현하빈에게 더 잘해주는 거 아니냐? 물론 걔는 다른 계획이 있어서 그랬지만, 결과만 보면 말야.]

‘……할 말이 없군요.’

배신자한테도 밀렸다!

현시우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동생이 축제 잘 즐길 수 있도록 보내주는 게 맞는 것 같다.

‘처음부터 나 혼자 시작한 계획이니 나 혼자 마무리 짓는 게 맞아.’

만약 현하빈이 정말로 달려올 생각이면 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나중에 자진해서 달려올 수도 있을 테고.

마침내 서류들에 도장을 다 찍은 현시우가 입을 열었다.

“……축제 잘 다녀오십시오.”

“네, 물론이죠!”

드라마 교양 선생님이 서류를 받아들며 싱글벙글 웃었다.

* * *

“오예! 합법적 땡땡이다!”

하빈이 메모해 둔 ‘땡땡이 컨셉 리스트’에 줄을 죽죽 그으며 외쳤다.

“농장 컨셉 땡땡이, 담 넘는 땡땡이, 옥상 땡땡이 등을 다 해봤으니 합법적 땡땡이도 해보고 싶었어. 그것도 학교 버전으로.”

[…….]

연수원 생활 때 킬스크린 간다는 핑계로 합법적 땡땡이를 많이 해보았던 현하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학교에서 알아서 가고 싶었던 축제를 보내준다니!

“우리 드라마 교양쌤은 정말 천사가 틀림없어! 이런 분이 교육감, 아니, 교육부 장관을 하셔야 되는데!”

하빈은 티켓을 구해준 드라마 선생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만약 실질적으로 티켓을 구해준 이가 강태서인 걸 알았다면 ‘역시 갓태서!’라고 강태서에 대한 평가가 소폭 상승했겠지만, 아직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빈은 신난 얼굴로 서윤에게 합법적 땡땡이를 자랑했다.

“흠흠, 서윤아, 언니 이번 주 금요일에 축제 간다!”

“헉, 뮤즈레 예술제? 거기 티켓 구하기 힘들잖아?”

“하, 나도 그래서 티켓팅 광탈했는데. 학교에서 보내준다네? 드라마 교양 듣는 애들 단체로 다 다녀오기로 했어.”

“진짜!? 드라마 수업 듣는 애들 좋겠다.”

“그러게 너도 이걸 듣지 그랬니. 자고로 교양은 들어서 나쁠 거 하나도 없는 법이라구!”

‘하지만 언니는 교양만 듣잖아…….’

서윤은 턱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하빈은 신난 얼굴로 이불을 쭉 끌어당겼다.

“아, 빨리 금요일 왔으면 좋겠다! 갔다 와서 후기 알려줄게! 혹시 여기 오는 사람 중에 서윤이 좋아하는 배우 있어? 특별히 사인 대신 받아줄게!”

[뭣이? 내가 받고 싶은 웹소 작가랑 웹툰 작가 사인부터 먼저 받아라! 그걸 먼저 약속해야지!]

‘쉿, 잘잘. 웹툰, 웹소 부스는 따로 방문해야 해서 귀찮다고. 그건 가서 고민할 거라니까? 우린 배우 보러 가는 거랑 드라마 새 시즌 미리 보는 게 찐 목적이라구!’

[그래도 부스 들릴 시간은 있을 것 아니냐! 당장 약속해라!]

‘어허, 그럼 잘잘이는 여기 두고 간다? 아니 얘는 왜 검집에 끼워도 목소리가 작아지지가 않는 거지?’

[그야 나는 성좌니까!]

‘쳇, 성좌 알림 끄는 기능 어디 없나?’

생각해 보니 코니한테는 아헤자르가 성좌인 것조차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그것과 관련된 기능을 추가해 뒀을 리가 없었다. 하빈이 한숨을 쉬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포기하자.’

때마침 서윤의 대답이 들려왔다.

“어, 언니 그럼 난 이 배우님 사인……! 혹시 괜찮으면…….”

“아, 그래. 이분 사인은 서윤이 이름으로 받아올게! 기대해!”

“헉, 고마워!”

어지간히 좋아하는 배우였는지 서윤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확 밝아졌다. 하빈도 역시 들뜬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금요일 빨리 와라!”

그렇게 찾아온 금요일.

“흐음, 어디 보자. 사인 받을 용지 다 챙겼고, 오케이. 사진은 폰으로 찍으면 될 테고!”

평소 같으면 서윤이가 점심 먹자고 깨울 때 일어나는 늦잠쟁이 하빈이었지만, 오늘은 알람도 없이 번쩍 눈을 뜨고 벌써부터 준비물을 알차게 점검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야지.”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도 1등으로 타서 원하는 자리 선점 완료!

그야말로, 근래 들어 가장 의욕 넘치고 성실한 현하빈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빈 언니.”

다른 학생들도 꾸벅꾸벅 하빈에게 인사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얘네들은 왜 날 어려워한담?’

예전에는 스스럼없이 드라마 추천도 서로 잘 하고, 드라마 덕톡도 따뜻하게 나누던 친밀한 관계였는데 이번에 학교 게시판을 뒤엎고 신문부까지 출동시킨 하빈의 스펙을 알게 된 뒤로 학생들의 태도가 꽤 깍듯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뭐.’

하빈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축제 행사장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쾌적했다. 선생님은 버스에 탄 학생들에게 사비로 마련한 간식을 나눠주었고, 버스는 도착지까지 가는 동안 맨 앞에 달린 티비로 꿀잼 드라마를 틀어주었다. 보아하니 선생님이 직접 엄선해 온 드라마인 모양이었다.

하빈은 집중해서 드라마를 보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 각성하니까 멀미 없이 드라마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랬다. 하빈은 각성 전엔 차 안에서 영상을 보면 멀미가 나서 끝까지 시청 못 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각성빨로 쌩쌩한 컨디션을 유지하며 차 안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다!

‘각성 개꿀!’

그동안 각성자 등록과 연수원을 거치며 계속 각성으로 인한 피해를 숱하게 겪었던 하빈. 그녀는 처음으로 각성해서 만족한 점을 찾았다.

‘흠흠, 어디 보자. 오늘 받아야 할 사인 목록이…….’

하빈은 사인 받으려고 챙겨 온 노트를 펼치며 오늘 일정을 체크했다. 시사회 보고, 감독 인터뷰 듣고, 사인 몇 개 받고 나면 해가 다 질 것이다.

‘완벽한 하루가 되겠어!’

목적지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린 하빈은 한껏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축제 행사장으로 입장만 하면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근처 건물에 있는 거대한 전광판에 큼지막하게 뉴스가 떴다.

-속보입니다. 지금 SPES 킬스크린 지부에 테러범들이 난입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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